언제부턴가 '필사하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필사하기 좋은 책들이 필사 노트와 함께 팔리기도 했었다. 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필사의 유익함을 체험한 터여서 내심 그런 분위기가 반가웠더랬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밑줄 하나 긋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게으른 태도인가. 또한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도 그 책 속에 담긴 문장들을 단 한 줄도 옮겨 쓰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심한 태도인가.

 

나는 책을 읽는 동안에 노트에 뭐라도 좀 끄적거려야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근사한 대학 노트를 마련하는 걸 무슨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아래 사진만 봐도 그렇다. 이 노트는 군복무 시절에 PX에서 구입했는데, 합성수지 커버에 중간 중간에 색깔이 다른 컬러 내지도 딸려 있는 걸 보면 (병사 월급에) 돈푼깨나 줬던 듯하다.



이 노트를 보노라면 무슨 습작이라도 한 권 쓸 것처럼 자못 거창하게 어쩌구 저쩌구 장식을 해 놓았지만, 사실 그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별다른 건 없다. 그저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남긴 잡다한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싶긴 하다. 만약에 내가 이런 독서 노트조차 남겨 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까뮈를 1984년 9월 15일에 만났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또한 그해 9월에 읽었던 몽테뉴의 수상록이 내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알라딘 서재에 터를 잡고 이런 저런 리뷰나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을 때에도 당연히(!) '독서 노트'를 새로 마련했었다. 그런데 그 때는 독서노트를 한꺼번에 좀 많이 샀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책을 읽겠노라 다짐했기 때문에 독서노트 몇 권쯤은 금방 채울 듯했고,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자면 다량의 독서노트가 필요할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왕창 구입한 독서 노트를 쓴 지 여러 해가 지나자 차츰 독서 노트에 책 속의 내용을 옮겨쓰는 분량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헀다. 왜냐하면 언제부턴가 독서 노트를 디지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독서 노트도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불편해졌다. 책 속의 문장들을 독서 노트에 옮겨 적고, 그 문장들 사이로 내 생각을 마음껏 적어 넣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기 시작하니 도무지 '검색'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간신히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필요에 따라) 일일이 다시 타이핑을 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게 해서 오랫동안 습관화되었던 '아날로그 필사'도 차츰 '디지털 필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제서야 겨우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날로그 독서 노트는 어느덧 구시대의 유물로 변했다. 한때는 이 노트 속에 담긴 내용들까지 몽땅 디지털화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새로운 책들도 읽어야 했고, 새롭게 읽은 책 속에 담긴 좋은 문장들도 부지런히 타이핑해서 갈무리하기 벅찼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해 왔던 독서 노트들도 차츰 내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기를! 또한 너희들을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너무 겁먹지도 말기를.





지난 연휴 동안에 <밑줄긋기와 필사에 대하여>라는 동영상을 하나 만들면서 그 동안 내가 필사에 힘을 기울였던 책들을 한꺼번에 불러 내서 책장 앞에 쌓아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발췌 필사를 마무리한 책이 대략 서른 여섯 권이고, 필사를 절반 혹은 1/3쯤 진행했던 책들도 열 권 남짓 되었다. 이 책들의 쪽수를 다 더해봤더니 무려 29,341쪽이나 되었다!(필사를 마친 책이 22,222쪽, 필사를 중도 포기한 책이 7,119쪽이었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난 뒤에 유튜브 검색창에서 '필사'를 검색해 봤더니 의외로 필사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깜짝 놀랐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흐름 때문인지 펜으로 또박또박 써나가는 필사 영상이 의외로 어필하는 듯하다. 내가 독서 노트를 버리고 디지털 필사로 갈아탄 것이 도리어 시대 흐름에 역행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더이상 아날로그 필사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PGOAnsodd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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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5-05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사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되는지는 몰라도 그래도 뭔가를 적으며 읽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은 벌써 제 기억에서 차이가 나더라구요^^
그 많은 기록의 산물이 oren님을 유투버로 이끌지않았나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oren 2020-05-05 13:51   좋아요 1 | URL
필사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기 보다는 아날로그 필사에서 디지털 필사로 ‘진화‘했다고 보는 게 더 좋을 듯해요. 물론 ‘필사‘라는 말 그대로, 펜을 들고 종이에 꾹꾹 눌러 쓰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필사가 맞겠지만, 베껴쓰기에 방점을 찍게 되면 타이핑해서 옮겨 적는 행위도 필사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요. 이 시대 최고의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겔 역시 ‘디지털 필사‘를 강조했고요.

저는 오늘에서야 문득 ‘필사의 놀라운 힘‘을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필사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표현력, 어휘력, 설득력‘ 등이 향상되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필사 인생 12년>이라는 타이틀로 영상을 만든 김시현 작가님의 영상을 보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저는 필사 경력이 17년씩이나 되니, 그 세월 동안 천재 작가들의 문장을 끊임없이 베끼고, 교정하면서 다시 읽고, 갈무리한 필사 내용을 수시로 꺼내 반복해서 읽고 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그런 능력들이 향상된 것일 테지요. 몽테뉴, 헨리 데이빗 소로우, 쇼펜하우어, 니체, 호메로스, 플루타르코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애덤 스미스,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베르그송 등등을 만난 것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인데, 그들의 문장을 베끼고 다시 읽고 하는 사이에 그들의 멋진 문장력까지도 알게 모르게 모방하게 되니, 필사만큼 좋은 독서법도 드물지 않나 생각합니다.

참고로, 김시현 작가님의 <필사 인생 12년> 동영상도 한번 살펴보세요~
https://youtu.be/G3WYhlO5_Bs

막시무스 2020-05-05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첩과 함께 백두산, 이집트 여행!
너무 인상적입니다! 이번 영상도 잘 보았고 많이 배웠어요!ㅎ 감사합니다!

oren 2020-05-05 13:48   좋아요 0 | URL
산행수첩에는 정말 많은 땀이 베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는 순간을 넘어 탁 트인 능선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행수첩‘을 꺼내 자그마한 기록을 남기는 기쁨을 쉽게 포기하진 못하겠더라구요.^^ 제 영상 애시청해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0-05-06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뛰는 놈 위에 날으시는 분이십니당~~
저도 한때 노트에 열심히 필사했었는데... 요즘은 가끔 노트북으로 좋은 글을 옮겨 적습니다.
볼펜보다 자판이 편해서요. 그리고 오디오북을 애용하고 있어요.
오렌 님의 유튜브를 들을 때도 있어요. 눈이 피로하니 귀를 사용하게 되네요.
의외로 듣는 재미가 있어요.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합니다만...

오렌 님의 글씨체를 보니 주관이 뚜렷하고 의지가 강하고 바른생활 아저씨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네요.
느낌이 그렇습니다. ㅋ

oren 2020-05-09 15:28   좋아요 1 | URL
페크 님께서도 필사를 좋아하시는 줄은 예전부터 잘 알고 았었지요.^^
책 속의 좋은 문장들을 정말 많이 알고 계시는 분 가운데 한 분이 페크 님이셨으니까요.
밑줄긋기와 필사는 어쩌면 <능동적인 독서>의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늘 해 왔던 숙제가 바로 ‘어디서 어디까지 베껴 오라‘는 거였으니까 말이지요.
제 글씨체는 정성들여 쓸 때는 봐줄 만하다 싶어도, 바쁘게 대충 쓰면 이내 흐트러지고 마는 듯해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답니다. 잘 차려 입었던 옷도 벗어놓으면 꼴사납게 변하듯,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아무튼 제 글씨체도 좋게 봐주시고, 제 영상까지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페크 님~~

초록별 2020-05-10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유튜브 시청 잘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블로그도 하시나요?

oren 2020-05-10 22:3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록별 님~
블로그는 알라딘 서재 블로그가 메인입니다.^^
네이버 블로그도 있긴 하지만, 최소한으로 이용하고 있답니다.
https://blog.naver.com/ojcojj
유튜브에 올리는 제 영상 봐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marine 2020-06-15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를 잘 못 써서 필사 대신 자판으로 치는데 문제는 손가락이 아프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책도 옮겨 적다 보면 이해가 확실히 잘 되는 것 같긴 한데 중요한 부분만 옮기는데도 시간이 너무 걸려 그 시간에 책을 더 읽는 게 나은가 늘 고민이 됩니다.

oren 2020-06-20 00:2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필사‘는 예로부터 아주 고된 작업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고된 일을 통해서 뛰어난 작가의 문장들이 내 몸 속으로 조금씩 들어와 앉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