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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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_이연주 저 | 최측의농간

 

 

 

너무 망그러져서 이젠 손보기가 어렵겠소/ 내 보기엔 적당한 의족을 걸치고 사는 게 낫겠소// 웬 바람이 그렇게 불어댔을까/ 집들이 조금씩 기우뚱거렸네/ 생각해보면 지나간 것에 비해 현재란 얼마나 가벼운가/ 나는 공원 나무의자에 허리 꺾어 집어넣고/ 앉아 있었네, 바람이 휘파람 소리 내지르며/ , 휙 내 머리털 쥐어뜯으며 지나갔네/ 그렇다네, 너무 오래/ 그 골방문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네/ 15촉의 전등불 끄물거리고/ 레코드판이 직직 끌리며 돌아가고/ 웬 바람이 그렇게 불어댔을까/ 벽에 바른 신문지의 다닥다닥 낡은 글자들을/ 나는 읽고 또 읽으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나 몹쓸 추억은 있지/ 그 술집 변기통에 처박은 그 울음소리, 그 다다미방에서/ 내 살점 뜯어내던/ 날렵하게 포복한 그 바람소리/ 이젠 이렇게 나이도 먹었으니/ 몇 가지의 말과 분노를 나는 버리려네// 선생님, 정말 의족을 사는 게 낫겠어요?” _위험한 진단전문

 

지나간 것에 비해 현재란 얼마나 가벼운가? 누구나 현재 일어난 일에 대해 매우 심각하다. 세상에 다시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이상의 일을 과거에도 미래에도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무겁기만 하던 어제 일은내려 놓은 짐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현재가 가볍게 느껴지리라. 설령 가볍게 느끼지 못할 일이 닥치더라도 현재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다. 시인은 지금 칩거 중이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오직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내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몇 가지의 말과 분노를 버리는 것. 팔다리는 다시 쓸 수 있을까? 지금 내 몸뚱이에 붙어있는 팔다리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적당한 의족을 구해 봐야할까?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더 이상 손 볼 데가 없다고 하니 정말 의족을 장만해야 할까? 어쩌면 그 의족은 팔다리용이 아닌 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어떤 보조 장치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엔 환자, 병원, 매음녀, 장님, 행려병자, 방화범, 무꾸리, 난쟁이 등 다양한 인물들과 장소가 그려진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시인은 따뜻한 시선을 보탠다. 그들의 고통이 시인의 고통이 된다. 그렇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내 자궁은 썩은 쇳조각/ 분신할 아들도 파업할 딸년도 낳을 수가 없는데요/ 여자가 바닥을 박박 기어내며 몸부림쳤다.” 발작부분. 정신병동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그저 발작으로 처리된다. ‘분신할 아들도 파업할 딸년도..’에선 산업화, 경제성장의 미명하에 진작부터 개, 돼지 취급을 받으며 혹사당하던 근로자들의 인권이 오버랩 된다. 아마도 시인은 발작 난 여인을 그리는 것보다 빛도 없이 사라진 이런 아들, 딸들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버려진 시계나 고장 난 라디오/ 헌 의자카바나 살대가 부러진 우산이다// 못 쓰는 주방용품 오래된 석유난로 팔아요// 낡은 신발짝이나 몸에 안 맞는 옷가지들/ 짐이 되는 물건들 삽니다// 우리는 구겨진 지폐와 몇 개의 백동전/ 우리는 끊어진 전선줄이다// 수신도 송신도 없다.” 폐물놀이전문. ‘짐이 되는 물건들이라. 문제는 짐이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끌어안고 사는 것이리라. ‘끊어진 전선줄이기에 당연히 수신도 송신도 되지 않는다. 불통이다. 불통은 고립이다.

 

이 책은 시인 이연주의 시() 전집이다. 시인의 생전에 출간된 한 권의 시집(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1991, 세계사)과 사후 유고시집의 형태로 출간된 시집(속죄양 유다, 1993, 세계사)그리고 시인이 활동하던 동인지에 발표되었으나 시집에는 실리지 않은 시 24편과 시극 1편이 함께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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