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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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웬지 이 문장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려주고 있는 느낌이다. 강은 강인데 '검은 강'.  1958년 가을부터 시작된다. 번역자(박상미)가 번역에 공을 들였겠지만, 문장이 서정적이다. 그러나 웬지 차가운 느낌이 든다. 


2. 작가가 화자가 되어 묘사를 해나간다는 것을 밝힌다. "나는 그녀의 생활을 안에서 밖으로, 그 중심에서부터 묘사할 예정이다." 여기서 그녀란 이 소설의 모델이 되는 가정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네드라이다. 그녀의 남편은 건축설계사이다.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3. "그들(이들 부부)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남편)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 두 삶을 바라보면서 각자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길 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4. 건축설계사인 비리에겐 꿈이 있다. 작더라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을 짓길 원한다. 그러고 나면 더 큰 것. 한 계단씩 올라가길 원한다. 그는 유명해지길 원한다. 그는 인류의 중심에 있고 싶어한다. 그거 말고 열망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다. 그저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길 원할 뿐이다. 


5. 그렇다면, 그의 아내 네드라는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우선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내향적인 성격이다. 그렇지만, 한편 저녁식사의 분위기를 띄우는,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여자다. 그녀의 얼굴은 사람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갑작스럽게 터지는 미소가 주위사람을 혼미하게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부 사이엔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쇼퍼홀릭이기도 하다.


6. 외견상으로 이들 부부. 이들의 가정은 해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함이 존재한다. 아마도 우리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대동소이할 것이다. 저자가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 계속 지켜본다. "그들의 삶은 함께 꾸려졌고, 함께 짜였다. 그들은 마치 배우들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 오래된, 불멸의 연극대본 이상의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는 배우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은 무슨 뜻인가. 일단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는 뜻이리라. 자기 맡은 역할만 충실하다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공허함을 감출 수 없다.


7. 이들 부부외에도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별로 유명하지는 못하지만 화가가 한 사람 있다. 그에겐 열일곱살 딸이 있다. 그의 아내는 젊음의 막바지에 있다는 수식이 붙는다. 그녀는 밤새 밖에 내놓은, 아름다운 만찬과 같다고 한다. 화려했지만 손님은 돌아가고 없는 그런 분위기. 이런 표현이 아마 저자의 매력인 듯 싶다. 화가의 아내는 들판에 혼자 나간 암말이라는 묘사도 보인다. 광기를 기다리며 풀을 뜯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한다. 그녀가 자주 가는 곳은 뉴욕 시내,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산부인과, 미술용품점 그리고 가끔 오후엔 영화를 보러 간다. 산부인과를 왜 가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냥 긍금하다.


8. "아침에 빛은 소리 없이 내려왔다. 집은 잠들어 있었다. 머리 위 공기는 반짝였고, 무한했다. 그 아래는 촉촉한 땅이었다. 이 땅을, 이 풍성함을, 이 밀도를 맛볼 수 있을까. 흙냄새가 냇물처럼 공기 속을 흘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치즈 껍질이 빵처럼 굳어 있었다. 다 마셔버린 와인 잔에서 시큼한 향이 났다."


9. 작가의 표현을 빌어 비리(남편)가 그들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에 공감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은 두 가지 양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들 부부의 삶이었고(적어도 삶을 위한 준비였거나),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위한 삶의 삽화. 그들은 서로 말없이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버전은 서로 얽혀 있었다. 하나는 숨어 있고 다른 하나는 드러난 채. 그 시절 그들은 아이들이 어떤 불가능함을 갖기를 원했다. 성취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 완벽하게 순수하다는 의미에서의 불가능함. 아이들은 그들의 작물이고, 밭이고, 땅이라고 한다. 어둠 속에 풀려난 새들이라고 한다.  아울러 아이들은 살아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소망을 내비친다.


10. 두 부부 사이에 아직은 드러나지 않는 균열이 만들어지고 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각자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 남편 비리의 삶은 천천히 둘로 나뉘어진다. 비리에게 비리가 일어난다. 그의 아내 네드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 똑같은 것 같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붕괴는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 이떤 국면에 이르러야만 벽에 균열이 보이고 기둥이 쓰러지고 건물의 앞면이 내려 앉는다."   


11. 이 들 사이엔 많은 인물들이 모였다 흩어진다. 마치 소용돌이 주변에 낙엽들이 빨려들어가는 듯 하다가 어떤 힘에 떠밀려 튕겨 나가듯 그렇게 멀어진다. 어느 덧 그들의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던 어느 해 가을 그들 부부는 이혼했다.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그 가을의 청명함이 둘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내 네드라는 마침내 눈을 뜬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보였고, 강력하고 느긋한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흔 하나라는 나이가 잠시 비참한 마음을 뿌려줬지만, 흡족했다. 그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 후 그 두 사람은 날개를 단 것 같기도 하고, 날개가 꺽인 듯한 삶을 잠시 맛보지만, 그 끝은 가을도 지나고 황망함만 남은 겨울 바닷가 그 자체이다.  혼자만의 봄 날은 없었다.


12. 이 책의 작가 제임스 설터는 최근 87세의 나이에, 35년 만에 장편 소설 [올 댓 이즈]를 출간했다고 한다. 이 책 [가벼운 나날]은 1975년도에 출간되었다. 설터는 한 동안 "작가들의 작가", "엘리트 작가"로 불리워지며 아는 사람만 알고 읽는 사람만 읽는 작가였다. 그러나 설터는 여전히 작가로서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싶었을까? 아니, 굳이 무슨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가 그려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소설 속엔 나도 있고, 당신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결혼 생활이 있고, 미처 당사자들의 눈에 안 띄는 다른 내면의 일상이 있다. 이 소설의 모델이 된 실제 부부가 있다. 공교롭게 이 책이 출간 된 후 이 부부는 이혼을 했다고 한다. 


13. 책의 원제는 'Light Year' (광년, 光年)이다. 이 책의 번역자가 고심을 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랬다는 번역후기를 접한다. 원 뜻은 그러하지만, 역자는 그저 가볍게 번역을 했다. '가벼운 나날'로 번역한 것은 잘 되었다고 생각든다. 그렇지만 소설속 인물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가벼워 보이는 나날'일 뿐이다. 우리 삶인들 다를까. 단지 그저 내색을 안하고 태연하려고 애쓰는 것 뿐이리. 고고해 보이는 백조들의 발이 수면 밑에선 얼마나 바쁜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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