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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로 중용을 풀다 ㅣ 이한우의 사서삼경 2
이한우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평점 :
동양고전(東洋古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입니다. 이는 유교의 경전으로,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말합니다. 삼경(三經)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합해 오경(五經)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부릅니다.
사서삼경 또는 사서오경은 여전히 먼 그대입니다.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존재(서가에 몇 권이 자리잡고 있기에)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하기엔 먼 존재(선뜻 손이 잘 안 갑니다)로 자리잡는 이유는 한 마디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간간히 책을 읽으면서도 이해되는 부분보다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 [논어로 중용을 풀다]의 저자인 이한우는 프로필을 통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10여 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며 조선 군주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 온 저자는 인문적 깊이와 감각적 필치가 돋보이는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로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에 대한 저서를 펴내면서 역사학계뿐 아니라 정치학자들에게까지 통시적 사회 읽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은 사서(四書)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에 의하면 "중용"이 그렇게 난해한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이 든것은 바로 번역과정에 있다는군요. 글자 한 자 한 자까지 깨치고 들어가는 번역을 하지 않는 한 이해불가라는 것입니다. 그 예를 듭니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聖人)이어야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족히 임할 수 있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기때문에 그 뜻을 헤아리기가 더욱 힘들다는 이야깁니다. 지은이가 이를 다시 번역해보았답니다.
"오직 천하제일의 성스러운 임금만이 능히 귀 밝고(聰) 눈 밝고(明) 사리에 밝고(睿) 사람에 밝아(知) 족히 '제대로 된 다스림(臨)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비교해보니, 수긍이 갑니다. 마치 위의 번역은 한글과 영어가 뒤섞여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군요. 지은이는 얼마 전 우리 사회에 "중용"붐을 일으킨 도올 김용옥의 번역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용"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 두 번째로 사서(四書)읽기의 순서와도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중용"에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들이 많기 때문에 맥락과 단어를 함께 잡아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는 제대로 읽어나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논어"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논어"를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읽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갈길이 멀어지는군요.
그러면 이제 왜 21세기에 우리는 "중용"이라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지은이는 "중용"만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책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논어"역시 인간 관계론의 보고(寶庫)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렇지만, "논어"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한데 어우려져 있는 반면 "중용"은 수기(修己), "대학(大學)"은 치인(治人)에 집중하여 공자(孔子)의 생각을 일목요연한 체계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중용"이나 "대학'이라는 경서가 없었답니다. 송나라 때의 학자 주희(朱熹)가 "예기(禮記)" 49편 중 제31편을 따로 빼내 집주를 달고서 "중용"이라 붙이고, 제42편을 끄집어내어 집주를 달고서 "대학"이라 이름을 붙여 경서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중용"이나 "대학"을 그 자체만으로 소화시키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논어"가 그 땅을 일구는 보습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지요.
지은이는 독자가 스승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사서(四書)를 읽을 경우 "논어", "중용", "대학", "맹자"순으로 읽을 것을 권고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때 사서(四書)를 읽어 나가던 순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먼저 "대학"을 읽고 이어 "논어"와 "맹자"를 읽은 다음 "중용"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난이도를 감안해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갖고 있는 "논어"를 먼저 읽고 보다 깊은 "중용"과 "대학"을 읽고 추상도 면에서나 시기적으로 사상적으로 처지는 "맹자"를 읽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사서오경의 들과 산에서 호흡해보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단상을 함께 옮겨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혹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學而 16')
나부터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받는 것에 익숙해있고 기대를 하면서도 막상 주는 것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내가 어디에가서 대접을 잘 못 해준다고 화를 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마음의 배려를 해주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경우 종종 겪어보시지요? 목에 잔뜩 힘을 주면서 "내가 누군데?"
나원참..내가 당신을 어찌 알겠오. 그리고, 설령 내가 당신이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힘을 쓸데에서 써야지. 아무데서나 그리하면 어쩌오. 일상에서 가끔 부딪는 상황입니다.
지은이는 앞서 밝힌데로 "논어"를 통해 "중용"의 문구들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다 아는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물이나 덫, 혹은 함정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어도 그것을 피할 줄을 모른다. 또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다 아는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중하고 용하는 것(中庸) 을 택하여 제대로 한 달을 버텨내지도 못한다."
이 말은 "논어" '옹야(雍也)5'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중하고 용한다면(中庸) 그 사람은 어진 사람(仁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공자는 말했다. "안회는 그 마음이 삼 개월 동안 인(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를 뿐이다."
동양고전의 멘토 신영복 교수님은 동양고전을 대함에 독자들이 현독(賢讀)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독서생활을 돌아 볼 때 여전히 텍스트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천천히라도 꾸준히 가다보면 나 자신을 읽을 경지까지 가겠지요. 아뭏든 이 책을 통해서 사서(四書)읽기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은이가 "논어'와 "중용"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어떻게든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이곳 저곳에서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고 "논어"와 "중용"을 따로 다시 읽어보는 방법도 좋겠습니다. 단, 지은이가 우려하는 것처럼 제대로 성실하게 번역이 된 책을 만나는 것이 관건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