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시험 준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머리 싸매고 책과 씨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핑계를 대는 것은 '시간이 없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으려해도 하루에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간 서적들, 소위 베스트셀러 라고 내세우는 인터넷 서점의 얼굴 마담들. 그 중에서 참으로 내게 필요한 책을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아가며 사람과의 인연도 좋아야겠지만, 책과의 인연도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느 블로그 대문에 이런 말을 걸어놨지요.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애틋한 사랑을 만남과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 정여울은 책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책더미 속에 파묻혀 길을 잃기보다는, 내 마음의 빛깔과 소리에 따라 언제든 골라 읽을 수 있는 좀 더 작고 아늑한 내 마음의 서재를 꿈꾼다." 사람을, 여행을, 문학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정여울은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삶'에 조용히 노크하기, 그것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서재' -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난무하는 요즈음에 마음에 와 닿는 진솔한 울림입니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교 추천도서 목록을 뒤지던 중 번뜩 깨달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렇게 평생 '타인의 목록'만 넘보다가는, 결코 나만의 '마음속 서재'를 만들 수 없겠구나. 그리고 뒤이은 깨달음은, '앞으로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의 목록' 때문에 '이미 읽은 책들이 놓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시 새로운 책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고 오직 저자가 읽은 책들로만 이루어진 작고 아름다운 마음의 도서관을 가꾸기로 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읽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퍼뜨려 나누는 것'이랍니다.
인문학, 또는 교양이 진정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면,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라는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곧 나의 손과 마음을 순수하게 보듬어안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저자는 교양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를 소개합니다. 사교계 데뷔를 위해 춤을 교양의 한 부분으로 익혀나가는 과정 중에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봉사하는 교양. 물론 금방 탄로가 나는 부분이지요. 주인공 토니오는 집단적 교양의 인프라에 사육당하는 것보다는 혼자만의 내면 탐구에 빠져 글쓰기와 글읽기에 탐닉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진정한 교양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기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조용히 덧붙입니다.
'지름신은 콤플렉스 환자에게 해열제만 주신다' 의외로 주변에 쇼퍼홀릭이 많습니다.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소비'로 극복하려 한다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명품에 집착하는 선을 넘어 '성형중독'까지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결핍에 호소하는 소비의 형태가 '가상의 소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것보다 여행기를 읽고, 진짜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것이 덜 위험하다고 언급합니다. 경제적이기까지 하겠지요. 콤플렉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가상으로 설정한 후, 그렇게 날조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결점을 폭로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매우 예리한 관찰입니다.
괴테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떤 대상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 지혜로운 삶은 그 어떤 대상을 찾느냐가 숙제인 듯 합니다.
'재능'이 뭘까요? 내가 찾아낸 내 안의 것일까요? 아니면, 남들이 그저 갖다 붙여준 이미지일까요?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사랑하는 일,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내 재능이고 내 적성이라고.." 무슨 일을 하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빼놓을 수 없지요.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내가 잘 하는 일인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만한 일인가.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을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지요. 저자는 덧붙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 한 방'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재능=직업=인생'이라는 위험한 도식이 자리 잡고 있답니다. 재능은 삶의 토양의 '비료'는 될 수 있어도 '흙'자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잔잔한 감동이 전해집니다. 좋아하는 꽃향기나 향긋한 커피내음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듯이 마음을 안정시켜줍니다. 그 이유는 저자의 겸손하면서도 내면적인 힘이 묻어 있는 글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만나야 하는지, 책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책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느니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후 아니면 그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투명한 나 자신과 만나는 비밀 통로로서 '글쓰기'를 권유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정면에 내세워 '마음의 서재'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정작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사랑, 삶, 아픔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를 나답게 세운 상태에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만나는 세상을 꿈꾸며 그렇게 살아가자고 손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책에 대한 책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러한 삶을 '책'이 곁에서 조용한 친구가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저자의 마음을 전달받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詩가 있어서 옮겨봅니다.
미국 시인 윌리스 스티븐스의 '집은 고요하고 세상은 조용했다'라는 詩입니다.
집은 고요하고 세상은 조용했다
독자는 책이 되고 여름 밤은
책의 살아 있는 마음 같았다
집은 고요하고 세상은 조용했다
말은 책이 없는 양 말하여지지만
독자는 지면 위에 몸을 굽히고
굽히고 싶어하고, 무엇보다도 책이
진리인 학자이고 싶어하고, 그에게
여름 밤은 생각의 완전함 같기를
집은 고요하고 고요할 수밖에
고요함은 의미의 일부, 마음의 일부
그것은 지면에 다다가 차오른 완전함
그리고 세상은 조용했다, 조용한 세상의 진리
그 안에 다른 의미가 없는, 그것은 바로
조용함이며, 바로 여름이며 밤이며
독자가 몸 굽히고 그 자리에 책읽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