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혼혈왕자 (2disc) - 한국어 더빙 수록
데이빗 예이츠 감독, 엠마 왓슨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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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까지는 아기자기 다채로운 잔재미에 보는 맛이 쏠쏠할 뿐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내가 사는 현실과는 괴리된, 그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아동용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원작소설도 읽지 않은 주제에, 당시 거의 동시에 개봉되던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장중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시리즈로 끝맺게 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런 해리 포터의 모험과 내밀한 성장담이 와닿기 시작한 건 [아즈카반의 죄수] 혹은 [불의 잔]부터였던 것 같다. 작품적인 완성도나 자체완결성 여부와는 별도로, 어둠의 흑마술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청소년기를 거치는 해리 포터의 내외적 갈등과 성장통이 제법 생생하게 묘사되면서 볼거리와 감정이입 측면에서 적어도 내겐 전작들을 능가했다. 해리와 볼드모트로 상징되는 선과 악이 충돌하며 혼재하는 상황을 잘 담아냈고, 더구나 내 시각에선 그들이 절대선, 절대악도 아니었기에 어느 식자의 '단순한 세계관' 운운하던 타박은 부당했다.

 

시리즈 본유의 풍미보다는 영국 교육 제도에 대한 경박스런 풍자에 너무 치우친 거 아닌가 싶어 다소 실망스럽던 [불사조 기사단] 이후 몇 년을 잊고 지낸 해리 포터. 극장에서 놓치고 지난 달 케이블로 접한 [혼혈 왕자] 편은 드넓은 습자지 위를 검푸른 잉크가 번져가며 덮는 느낌이었달까. 어둡고 무겁고 탁했다. 영화의 핵심은 해리와 볼드모트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난다는 죽음의 예언에 이어 제목으로도 쓰인 혼혈 왕자(스네이프 교수)라는 인물이 지닌 극중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 볼드모트가 자신의 불멸을 도모하며 영혼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봉인해 놓았다는 '호크룩스'의 정체와 그 파괴를 위한 덤블도어 교수의 희생이다. [불의 잔]부터 감지되던,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라는 선악의 대척점이 무언가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흡사 배트맨과 조커처럼 서로의 순환오류를 같이 얼싸안고 가는 듯한 그 기묘하고 불길한 기운에 대한 단서가 앞으로 펼쳐지게 될 나머지 '호크룩스'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제시될 듯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내겐, 편을 거듭할수록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악의 실체가 존재감을 더하며 점점 더 어둡고 비장하고 입체적이 되어가는 호그와트의 우주가 흥미와 감동을 더해간다. 볼드모트를 위시한 악의 세력은 마치 세상 도처에 드리운 야만과 폭력, 전체주의의 억압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리는 점점 스스로의 정체성과 태생적인 모순을 자각하고 극복해가면서 악을 상징하는 볼드모트와의 내적·외적 투쟁을 벌인다. 매 편마다 해리가 거쳐가는 통과의례, 그 치열한 과정 자체가 곧 한 인간의 성장이고 삶으로 여겨진다. 이제 내겐 [해리 포터] 시리즈의 대미이자 백미라고 입소문 자자한 [죽음의 성물] 두 편을 보는 일만 남았다. 십 년을 이어온 '역사'의 마지막 장이라니 왠지 아쉬워서 보지 않은 채로 덮어두고도 싶지만 언젠가 또 밤새워서라도 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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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딸아이는 영화도 꽤 많이 봤겠지만 책을 최소한 15번을 읽었어요. 어떤 책은 더 읽은 것도 있고요. 저는 한 권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영화에 대한 느낌은 서쪽섬님과 공감이에요~~~.

풀무 2014-12-30 17:58   좋아요 0 | URL
와우.. 따님이 대단하십니다. 전 몇 년 전 병원 장기 입원 때 읽겠다고 [반지의 제왕] 몇 권 들고 갔다가.. 못 읽겠더라구요. 그후 [해리 포터] 시리즈는 더 분량이 많은 것 같아 엄두를 못냅니다.
 
레퓨지
프랑수아 오종 감독, 멜빌 푸포 외 출연 / 투앤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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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을 탐닉하던 루이(멜빌 푸포)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다. 연인 무스(이자벨 카레)의 뱃속에 무책임한 핏덩이 하나 남긴 채. 남자의 부모는 아들 없는 손주를 원치 않으나 '그가 내게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한 무스는 아기를 낳기로 결정하고 한적한 해변가 마을에 홀로 둥지를 튼다. 문득 미심쩍어 사전을 찾아보니 제목 레퓨지(Refuge)엔 피난처, 은신처 그리고 쉼터의 뜻도 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줄거리 상으론 흔하디 흔한 신파극 외양이다. 허나 진짜 영화는 중반부터였다. 여자의 집에 장례식에서 잠깐 마주했던, 죽은 루이의 동생 폴(루이스 로낭 슈아시)이 찾아오고 동성애자인 그와 무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입양돼 같이 자라면서 한때 형과 연인 사이였던 그에게 그녀와 아기의 존재는 각별하다. 오해와 갈등, 화해와 위안을 거쳐 서로 애틋한 감정이 싹튼다.

 

 

 

 

 

연출·각본이 객기와 도발에서 명상과 성찰로 선회 중인 프랑소와 오종이다. 레퓨지는 그의 전작 타임 투 리브의 연장 내지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려한 영상이나 도발의 정서가 많이 희석된 아쉬움 만큼 앙금처럼 남아있던 감상주의와 자기도취도 휘발되면서 깔끔해졌다. 그도 나이 들어가며 조금은 싱겁게 깊어지는 중이다.

 

일견 이질적인 멜로드라마 정도로 보이는 레퓨지의 서사는 이성애와 모성이라는 통념의 해체를 주제로서 완곡하게 품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미지의 흐름 혹은 충돌은 지속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성애의 독점, 출산과 육아에 대한 모성의 전담에 흠집을 내고 이해와 연민의 감정, 연대라는 가치로 은연중 그 결핍을 메운다. 마지막, 무스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당신이 더 잘 보살피리라 믿는다는 편지와 함께 갓난아기를 폴에게 맡긴 채 지하철을 타고 홀연히 떠나간다. 약간의 당혹감에 뒤이은 담담함. 폴은 묵묵히 아기를 보듬는다. 아마도 그건 세상에서 조금씩 떠밀린 두 사람 간 최선의 교감이고 공동의 모반이 아니었나 헤어려 본다. 그들의 앞날을 그려보던 나는 먹먹해지면서 아득한 기분에 잠겨 티비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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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2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내용이네요~~~~. 저도 찾아 봐야겠어요.

풀무 2014-12-29 17:11   좋아요 0 | URL
독특한 면에선 정말이지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곰곰발님 외에 알라딘에서 덧글 주신 분은 처음이세요. 반갑습니다.
 
늑대아이
호소다 마모루 감독, 미야자키 아오이 외 목소리 / 버즈픽쳐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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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엄마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늑대인간이었습니다 ...' 사람인 어머니와 늑대인간이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 유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한 편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글로 남겨둬야 할지. 소박하고도 창대하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성장에 관한 속깊은 얘기들을 담아내며 인간과 세계를 포괄하는, 판타지 풍이면서 동시에 안티판타지스런 작품이다.

 

천애고아로 보이는 여대생 하나는 철학 수업 도강 중이던 늑대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딸 유키(눈 오는 날 태어나서 雪)와 아들 아메(비 오는 날 태어나서 雨)를 낳는다. 극중 화자 유키의 나레이션대로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사냥 본능이 발동'했던 걸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아빠는 사람 아닌 늑대의 모습으로 하천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싱글맘이 된 하나는 실의에 빠질 겨를도 없이 세간의 이목을 피해 조금만 흥분하면 늑대로 변하는 두 오누이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도시를 떠나 외딴 시골로 내려간 그들은 낡은 집을 수리하고 이웃들 도움으로 밭농사를 지으며 터를 잡는다. 생의 환희와 시련을 맞으며 늑대아이들은 점점 자라나고 바깥 세상과 접촉하면서 사람도 늑대도 아닌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돈을 겪는다. 전학 온 동급생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유키는 늑대로서의 자신을 거부하며 온전한 사람으로 남고자 하고 동생 아메는 숲을 동경하며 야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머니로서 갈등도 미련도 많던 하나였지만 종국엔 아이들 각자의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먹먹했다고 해야하나 뭉클했다고 해야하나. 엔딩 자막이 다 오르고도 몇 분을 멍하니 있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만화로서의 한계도 있다. 주인공 하나의 성격은 괴로워도 슬퍼도 속으로 삭이고 사랑으로 버티는 전형적인 캔디 유형이며 하나와 늑대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역시 단조롭고 일방적인 감이 있다. 영혼이 된 부성은 멀찍이서 관망하는 내내 육아가 온전히 모성에만 떠맡겨진, 이야기 뼈대에 스며든 정치성 역시 부당하다. 허나 작품 본유의 미덕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사람과 자연을 생생하게 담아낸 화풍이 섬세하고 현실과 초현실, 생활과 동심이 혼재하는 얘기를 이질감 없이 아우른 화술은 유려하다. 장면 장면 넘어갈 때마다 그에 어울어지는 서정적인 음악 역시 가슴을 울린다. 뭣보다 세상사 모질고 냉혹한 이면까지 넉넉히 품어 녹여낸 작품의 품성, 그 성숙한 시선이 웬만큼 진지한 실사영화들도 도달하기 힘든 삶에의 깊은 성찰에 닿아있다. 개인적으로 [환타지아], [스노우맨], [이웃집 토토로], [곰이 되고 싶어요]에 이어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될 또 한 편의 명작 애니를 만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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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2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일본 애니는 디즈니만화가 접근하지 못하는 깊이가 있습니다. 디즈니 만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차이가 확 나요. 서로.... 제가 보기는 다르게 애니를 자주 봅니다. 애니는 거의 다 극장에 가서 보는 편입니다. 애니야말로 극장 가서 보면 더 재미있더라고요...

풀무 2014-12-28 23:52   좋아요 0 | URL
예. 확실히 세계관도 화풍도 확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동양 어른들이 보기에 디즈니는 1940년에 만든 [환타지아] 외엔 뭐 기억할만한 작품 제대로 만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즈니 쪽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나 호소다 마모루 흉내내봤자 [포카혼타스] 정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 뭐 또 말씀대로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디즈니처럼 매력있는 요소들 가득 채워 매끈하게 작품들 뽑아내는 스튜디오가 드물다는 생각도 합니다.
 
미스터 노바디
자코 반 도마엘 감독, 자레드 레토 외 출연 / 캔들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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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제8요일] 이후 13년만에 세상에 내놓은 [미스터 노바디]는 그 사유와 연출에 있어 거창하고도 집요한 작가적 야심이 엿보이는 영화다. 망각의 천사가 인중 마크를 찍는 걸 잊어 자신의 탄생 전 과거부터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아홉 살 소년 니모 노바디의 선택에 따라 연령대 별 평행우주 - 아홉 가지 시공간 - 이 펼쳐지는 복잡한 서사에 비둘기 심리 실험 및 상대성, 카오스, 엔트로피, 기생충 가설(숙주 공진화), 빅뱅과 빅크런치 등 무수히 많은 과학 이론 및 철학 담론을 아우르며 아트하우스풍 멜로부터 SF까지 각종 장르를 종횡무진 누빈다. (첨언하겠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미스터 노바디]의 사유를 온전히 음미하기 위해서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대표작 [토토의 천국]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토토의 천국]에서 노년의 토토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린 토토를 화자로 삼는다. 혹은 역으로, 어린 토토가 노년의 자신을 상상하며 그 관점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즉, 감독은 자기가 누렸어야 할 인생의 정수를 타인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강박증 주인공을 상정하고 다중 화자의 관점과 시점을 공명시키면서 폐쇄적인 '존재' 개념을 해체한다. 그는 [토토의 천국]에서 이미 평행우주 개념을 작품에 접목시켜 강압적인 '존재'와 '선택' 개념의 해방, 자유를 통해 누려지는 삶의 환희를 노래하며 한 편의 우화 내지 동시와도 같은 인생 찬가를 영상에 옮긴 셈이다.

 

[미스터 노바디]는 내게 있어 [토토의 천국]의 확장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난해하게 와닿는 이유는 아홉 살 니모 노바디가 상상하는 혹은 미리 내다보는 노년의 니모 노바디가, (즉 [토토의 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평행우주로 분열된 동일한 주인공이 작중 화자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용을 회술하는 니모 노바디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굴 따라가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아홉 살 니모에게서 파생된 118세 노인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니모가 존재하는 세계에선 그 누구도 그의 국적이나 과거 행적을 알지 못한다. 모두가 세포 재생술을 받고 자신에게 줄기세포를 제공할 돼지 한 마리 씩 갖고 있는 근미래, 그곳에서 니모 노바디는 자연 노화로 사망할 마지막 인간으로 매스컴에 소개되고 그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박사와 기자의 인터뷰에 의해서 영화 내용이 전개된다. 앞서 설명한 영화 설정을 파악한다면, 그의 기억이라는 것이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이 아니고 아홉 살 니모의 관점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다양한 삶의 선택지임을 알 수 있다.

 

어린 니모가 어머니를 따르느냐 아버지를 따르느냐에 이어 어머니를 따를 경우 만나게 될 안나라는 여성 그리고 아버지를 따를 경우 만나게 될 앨리스와 진이라는 여성들과의 사랑과 삶을 통해서, 그 각각의 경우 속에도 여러 갈래로 나뉠 우연과 선택에 따라 그의 다채로운 팔색조 인생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그 모든 가지 않을 길까지 탐색한 후 니모 노바디는 깨닫는다. 모든 길이 올바른 길이며 각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란 존재는 내가 있기 전에 나를 있게 한 것들과 내가 있던 동안 선택하고 관계한 모든 것들은 물론 선택하지 않은 길들, 그리고 내가 없는 훗날 나로 인해 일어날 일들과 일어나지 않게 될 일들까지도 포함한 총체임을. 인생은 선택의 문제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한 우열의 기준은 없음을. 어떤 선택이든 그 자체로 삶임을. 순간, 니모가 어머니 아닌 아버지를 따랐을 경우 앨리스의 뼛가루를 뿌리기 위해 화성으로 가던 우주선에서 만나게 됐을 과학자 안나의 예측대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수축으로 돌아서는 빅크런치 현상이 일어나면서 시간은 되돌려진다. 노년의 니모가 존재하던 평행우주는 해체되고 아홉 살의 니모는 기차 레일에서 발을 옮겨 숲을 향해 달린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비껴 선 것이다. 그건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피치 못할 선택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의 불확정성, 비결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걸 넘어선 벗삼음, 무한한 선택 가능성으로의 도약이다.

 

복잡한 설정과 내용을 서정적인 영상에 담아낸 자코 반 도마엘 특유의 연출이 돋보였으나 영화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거늘, 중간중간 각종 가설 및 담론에 대해 설명조로 일관하는 장면들이 심히 걸린다. 플래쉬백과 슬로우모션 등 온갖 영화 기법들이 너무 자주 남용된 점도 작품적으로 시정이랄까, 그 고유의 풍미를 깎아내렸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그 외적 양식과 스토리텔링은 물론 대사까지 미니멀하게 단순화하면서 작품 자체를 열어 확장한 데 비해서 [미스터 노바디]는 너무 복잡하게 꼬아서 되려 작품이 닫혀버린 감이 있다. 허나 작법과 표현상 아쉬웠던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노바디]는 감히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비견할 만한 인간과 우주에의 비전을 품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 수많은 영화팬들에게 거듭 재발견되면서 명작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는다. 

 

P.S. 중간중간 삽입곡으로 쓰인 유리스믹스의 Sweet Dreams, 네나의 99 Red Luftballons 같은 80년대 팝 명곡들 덕에 한층 더 즐거운 감상이 됐다. 영화 후반부에선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전작 [제8요일]에서 주연을 맡았던 파스칼 뒤켄이 카메오로 깜짝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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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그리폰 북스 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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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영화 시나리오는 내게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긴 프롤로그에서, 영화는 크리스의 가족을 소개하고 그의 노모에게 과도한 비중을 둔다. 노모는 가족의 유대를 상징할 뿐 아니라 조국, 대지를 상징하고, 이것은 러시아의 민속 문화에서 강력한 함의를 지닌다. 나로 말하자면, 크리스의 가족 관계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영화에서도 문제시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논의 끝에 나는 어렵사리 크리스의 가족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내 소설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고향, 달콤한 지구'와 '차가운 우주'의 이미지가 대비되는 '인식의 드라마'가 형상화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우주 정거장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만들어져, 행성의 광활하고 열린 공간과 작고 폐쇄된 우주 정거장 간의 적대감을 상징하는 드라마 말이다. 안타깝게도 타르코프스키는 한쪽 편을 들어 '차가운 우주'에 대비해 '따뜻한 고향 지구'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지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인간의 마인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는 인식의 드라마 대신 타르코프스키는 인식의 문제와 그 한계와는 무관한, '대단히 탁월한' 도덕극을 만들어 냈다. - 나리만 스카코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3장 솔라리스의 환상, 125쪽, 1979년 'The Profession of Science Fiction'지 스타니스와프 렘 인터뷰 인용 -

 

 

솔라리스 행성에 파견된 심리학자 크리스와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의해 그의 과거 기억에서 복제된 죽은 아내 하리의 모사체. 솔라리스 행성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스스로 사고하며 대기권의 생물체 뇌파로부터 잠재의식을 받아들여 그 기억 속 존재를 물질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라 할 수 있다. 하리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토로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실체로 묘사된다.

 

 

공상과학소설 [솔라리스(1961)]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이 자기 작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 각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1972)]에 진저리를 쳤다는 사건은 영화광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화다. 원작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관점은 왜곡과 일탈, 예술적 변형, 창조적 파괴라 할 만큼 소설의 의미론적 방향성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원작소설의 정신은 세간에 회자되는 '이해할 수도 친해질 수도 없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니, 다만 인간이 보이는 모든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라는 '솔라리스 잠언'에 드러나 있다. 스타니스와프 렘 자신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작품 취지로 들었다. 소설 속에서 솔라리스의 우주정류장에 유배된 학자들은 전혀 지구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자신을 잃어 버린 채 헤매고 다니는 개인에게 지구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낯설고 황량한 곳이며 솔라리스라는 행성, 그 미지의 적대적인 공간이 되려 지향, 도약으로까지 비춰진다. 허나 행성을 관찰하며 환원하고 과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던 솔라리스트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이 되며 냉철하고 이지적인 인간의 정신은 끝내 외계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와의 접촉에 성공하지 못한다.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 명대사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부질없다. 우리에게 우주 정복의 야망 따윈 없다. 지구의 영역을 우주로 확대할 뿐이다. 더 이상의 세계는 필요 없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할 뿐이다.' 소설이 지구와 행성 솔라리스를 분리한 선형적인 세계라면 영화는 지구와 솔라리스 사이에 상호 침투, 합성이 반복되는 비선형의 세계다. 타르코프스키는 우주와 외계행성이 주요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지구의 중력, 인간 존재의 무게를 싣는다. 지구는 인간에게 아늑한 고향이며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지구를 향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솔라리스트들의 괴로운 기억을 복제하길 멈추고 마침내 지구를 복제하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솔라리스의 바다가 보내온, 아니 실은 스스로의 기억과 자의식의 투영이자 죄책감과 양심의 일부인, 자신 때문에 자살했던 아내 하리 앞에 참회하고 화해에 이르며 솔라리스가 복제한 지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그 품에 안긴다.

 

결코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이 인간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수긍하면서 오히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기억과 환상을 매개로 주인공 크리스 내면의 영역으로 옮겨진다. 영화 속 솔라리스의 바다가 지구의 대륙과 섬을 복제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외형적인 접촉 불가능성이 내면적인 접촉의 실현 가능성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환원적인 이성에 국한될 때 타자와의 접촉 및 이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던 인간의 인간중심적인 입장과 사고가 사랑의 가치를 긍정하고 휴머니티의 한계를 자성하면서 타자를 끌어 안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그 가부, 시시비비와 별도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솔라리스]를 통해서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공상과학영화라는 장르마저 인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솔라리스]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사회주의의 대답 내지 대응이라고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고 실제 작품을 본 식자들은 보란 듯이 그 평을 폐기 처분했었다. 허나 돌이켜 보건대 그게 사실 전혀 근거없는 평가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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