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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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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난'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며, 가난은 하나의 현상으로 이를 둘러싼 여러 구조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이거나 우연한 구조에서의 선택이 존재했으며, 이로 인해 이행되어 온 경로가 있다는 걸 말하려 한다.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중이 가장 높은 건 현재의 노인 세대로, 노인들의 가난은 그 구조가 복잡하게 꼬인 산물이다. 지금의 일부 노인들은 사회보험 제도가 정착하기 전에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종사하던 업종이 노화되어 생계가 어려워졌거나, 가족의 문제로 모은 돈을 날린 경우도 있다. 게다가 노인이 된 상태서 생계를 위한 유일한 자구책은 노동뿐이지만, 사회적으로 노인의 노동을 금(禁)하기만 할 뿐, 이에 대한 지원은 딱히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스레 제도 바깥의 노동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존 경로가 바로 폐지를 줍는 일(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등장)이다. 리어카나 카트를 끌며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 시대 가난의 표상이다. 가난의 표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왔다. 전후 시대에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미군들에게 껌을 구걸하는 모습에서, 경제성장기 달동네의 판잣집 좁은 부엌에서 연탄불을 때는 모습, IMF 경제위기 이후 도심을 차지한 노숙인의 모습으로. 가난의 모습은 늘 바뀔 것이다. 다음에 올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달동네가 재개발되고 판잣집이 사라지면서, 넝마를 입고 고물을 주우러 다니던 넝마주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우리사회에서 가난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난은 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판잣집 대신 쪽방 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넝마주이 대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나타났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옛날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한낮의 동네에는 일할 곳 없는 노인들만 남았다. 도시의 노인들은 각자도생하며 폐지를 줍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65세 언저리를 은퇴 연령으로 정해놓고 그 연령이 지나면 미래 세대에게 일자리를 넘기기를, 이제는 쉬면서 사회의 복지제도라는 혜택을 누리기를 '강요'한다. 그런데 왜 폐지를 주워 파는 노인들이 있는 걸까? 젊은 날에 저축을 못한 것이, 연금을 부으며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자식이 있어도 그들에게 부모의 생활비를 댈 능력이 없는 것이, 과연 노인들의 잘못일까?

이제는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거리에서 폐지와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인 리어카나 카트를 끌고 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충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세 가지 반응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외면하거나, 동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세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무리 중 각자의 사정은 이렇다. 첫째, 외면하는 사람들의 경우다. 아스팔트에서 김이 나게 뜨거운 날, 혹은 언덕길이 빙판이 된 날, 폐품을 잔뜩 쌓아 수백 킬로그램은 될 리어카를 끌고 그 길을 힘겹게 걷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를 직면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젊었을 때 저축을 별로 안 한 사람들이겠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서 자식이 생활비도 안 주나 보네.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고 연금도 붓고 있으니 저런 노인이 될 일은 없을 거야. 외면하는 이들은 그들의 처지가 '내 일'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둘째,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어떤 이들은 동정하기를 택한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 경우에 속하는 이들은 가끔 노인들의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어디에 폐품이 많이 쌓여 있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집에 모아둔 폐품을 노인들에게 건네기도 한다. 이들은 늙어서도, 몸이 아픈데도, 푼돈을 위해 거리를 쏘다녀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다. 세 번째 경우의 사람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다. 그 노인들의 처지가 언젠가 '내 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이들은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걱정한다.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여 일찍 은퇴하거나, 질병으로 모아둔 재산을 병원비로 소진할 경우, 자식이 없거나 자식에게 노후의 부양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고려하며 냉정하게 미래를 계산한다. 하지만 남는 것은 실질적인 대비보다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커다란 두려움이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어쩌지.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 중에는 여성이 많다.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긴 여성노인의 빈곤은 심각한 문제다.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긴 만큼 빈곤함도 길게 겪는다. 게다가 여성노인은 남성노인에 비해 체력이 달리고, 숙련된 기술이 없는 경우가 많고, 특별한 직업 경력도 없다. 이 책은 '폐지 줍는 도시의 여성노인'을 주인공 삼아 사회와 제도 사이의 빈틈에서 연구를 이어나간다. 남성노인의 경우,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기존의 경력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여성노인의 경우는 숙련된 기술 혹은 장기적인 경력이 없는 경우가 많고,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낮은 취업문에 막혀 나쁜 환경과 조건의 서비스업으로 전환하거나 진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여성과 남성의 생애경로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조사에서 만난 노인들을 돌아보면, 남성노인은 '출생'에서 '진학(초등-중등)'에서 '취업'과 '결혼'과 '은퇴'로 이어지는 사회적 경로를 거쳐 나이 들지만, 여성은 '출생'에서 '진학(초등)' 이후 잠깐의 '취업'과 '결혼'과 '육아'를 거쳐 '자녀와의 분리'로 이어지는 개인화 경로를 거친다. 여성노인들은 남성인 파트너와 그의 임금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활이 재편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제도에서 벗어난 '시장'의 변방에 나가 직접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현재의 여성노인들은 직접 임금노동자가 될 기회가 별로 없었고, 이로 인해 경력과 숙련이 없는 상태였다. 다시 말하자면,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인 것이다.


- 소준철, [가난의 문법], p.9, p.10 p.12, p.14, p.15, p.28, p.57 -



이 논고가 저자의 주장처럼 가난한 삶의 경로와 우연하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가시화하는 과정일 뿐 가난을 박멸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도, 가난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낭만도 아니려면 선결 조건이 있다. 우선 이들이 수집한 쓰레기의 악취와 수집 과정에서의 소음을 비롯한 불편들을 곁에서 견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시1, 예시2, 예시3)


그리고 노인들에 의해 수행되는 '폐품을 재활용 체계로 밀어 넣는 비공식적인 말단 경로'를 양성화하여 '공공산업화'해야 한다. 그에 드는 세금은 '야합'이나 '강탈'이 아닌 '합의'와 '법치'에 준해야 하며, 조달과 집행에 있어서 회계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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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 2023-07-23 17: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책 소개에 대안 제시까지 고맙습니다. 뒤에 사진들도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다시, 헌법
차병직.윤재왕.윤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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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출신 차병직 변호사가 메인 저자이며 언론인 손석희와 전 대법관 김영란이 추천사를 쓴 [지금 다시, 헌법](2016)은 한마디로 '시민들도 헌법을 공부하고 이참에 불판도 갈아보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진영 막론하고 일독할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 주권 혁명 이후 근대국가의 토대이자 상징이며 실체가 되어온 헌법의 의의부터 대한민국 헌정 역사와 그 구성 및 세부 조문별 법철학적 사유 근거까지 알차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들이 헌법개정 주장의 거점 개념으로 삼은 '합목적성'에 편파적으로 매몰되어 법 정신에 있어 가장 중시 여겨야 할 '신뢰성'을 훼손하고 곡해하는 언급들이 자주 눈에 밟힌다. 특히 '주거 보장'과 '재산권', '선거권' 관련 조문 해석에서 그렇다. 성인 독자 입장에서야 걸러 가며 새겨 읽을 일이지만 중고생들에게 권장 도서로까지 추천하기는 저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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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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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품을 낳는 것이 아니다. 작품도 감정도 일단은 세계에 내재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주워모아 손바닥에 올린 뒤 보여줄 뿐이다. 작품은 자기표현이기보다 세계와의 대화(커뮤니케이션)다. 이 세계관을 겸허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로서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대립은 근원적이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세계', p.26 -

 

머릿속에 구상한 이미지를 화면에 구현하기보다 눈앞의 이미지를 발견해 카메라에 담는 것에 익숙하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문예학을 전공하고 픽션 영화 감독 이전에 방송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이력을 시작한 그의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관객으로서 영화작가와 소통하고 교감함에 있어 당사자가 만든 영화들 이상의 창구가 없다고 여기지만 종종 영화 작업 배후와 이면을, 연출자 이전에 한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를 들춰보고 싶은 창작자가 있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중 한 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니시시폰' 신문에 연재된 컬럼 중심으로 기존작들 속에 반영됐을 체험과 추억들은 물론 작품 골조를 이룬다 할 세계관과 연출관, 사변들까지 한데 묶어 엮은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는 내게 있어 적합하고 의미로운 책이었다.

 

​그의 연출작을 여러 편 봤지만 대표작 한 편만 고르라면 두말없이 [걸어도 걸어도]를 꼽게 된다. 한 웅큼 온기를 머금은 채 삶과 일상, 사람들 감정 면면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허나 결코 안온한 감상에 빠지지 않고 마음 한 켠 싸하게 파고 들어 세상의 빛과 음영까지 환기하는 그 특유의 시선 및 기조가 글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후반부 - 5장과 7장 - 에선 영상 매체를 포함한 매스미디어 전반에의 비판과 더불어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인들 일상과 가치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날선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선보여 참신했다. 그 면면이 차기작들에 녹아들어 한층 더 깊고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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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10-08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의 이미지를 발견해 작품에 담는다는 생각과 말이 좋습니다. 저는 내일 바닷마을다이어리 볼 예정이에요^^

풀무 2015-10-08 16:5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은 일본에 계신 건가요..? 아님 부산국제영화제..? 암튼 부럽습니다. :)

프레이야 2015-10-08 23:32   좋아요 0 | URL
BIFF 내일 저녁 바닷마을다이어리, 매진이네요. 내일아침에 현장티켓팅 해야겠어요. 자리가 남아있을지ㅠ 고레에다 인기 좋군요 역시ㅎㅎ

풀무 2015-10-09 08:43   좋아요 0 | URL
지금쯤 티켓팅 하셨을지.. 꼭 성공하셨길요. 전 내년에 정식 개봉 거쳐 IPTV로 나오면 그때야 볼 수 있겠네요.

프레이야 2015-10-09 13:04   좋아요 0 | URL
전석 매진이군요. 대신 다른것으로 티켓팅했어요.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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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두툼한 편지 다발을 내게 건네면서 "이걸 읽어보세요. 이런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그건 혼담의 중개를 맡은 내 친구가 그녀 앞으로 보낸 편지였는데, 그 편지를 읽고 나는 경악했다. 편지 내용은 온통 나에 대한 험담이었고, 험담하는 기술이 참으로 천재적이었다.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문장에 소름이 끼쳤다. 그 친구는 결혼 중개를 부탁받고는 도리어 결혼을 깨뜨리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가끔 나와 함께 야구치 집을 방문해서, 내 앞에서는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그 편지를 보고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험담을 하는 사람이랑 그 사람을 믿고 험담을 당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을 믿겠니?" 결국 그녀와 나는 결혼했다.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찾아왔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절대 집에 들이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친구에게 그 정도로 원한을 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뭐가 살고 있는 걸까? 그 뒤에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사기꾼, 돈에 미친 사람, 표절하는 사람. 하지만 모두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일수록 더 선한 얼굴을 하고 친절하게 말을 하니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p.240~241

 

장모가 현명하시네. 이렇게 가감없이 결혼 골자만 술회하는 글도 간만에 읽어본다. 그나저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젊은 시절 전형적인 재능있는 열혈 마초 유형이었다. 

 

이건 일본인의 유연성일까 아니면 허약함일까? 나는 적어도 일본인의 성격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양면성은 내 자신 속에도 있다. 만일 패전 조칙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일 그것이 국민 모두에게 자결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면 그 거리의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자아를 악덕으로 보고 자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양식 있는 태도라고 배운 일본인은 그 가르침에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아를 확립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p.250

 

그러게. 일본엔 이런 집단 환상이 강력히 존재하는 듯하다. 이십대 때 [에반게리온] 오리지널 봤을 때도 놀랐던 게, 최종회에서 한 시간 내내 이어지던 그 장황한 설변이 결국 인류보완계획 - 전 인류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 - 이었다.

 

범죄자를 낳는 것이 사회의 결함이라고 하는 논리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범죄자를 옹호하는 것은 사회의 결함 속에서도 범죄로 치닫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무시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우에코사(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나리오 공동작업 짝패였던 초교동창 붕우)는 걸핏하면 우리 둘을 비교하면서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에쿠사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다를 뿐이다. 우에쿠사는 내가 회한과 절망과 굴욕과는 인연이 없는 타고난 강자이고, 자신은 타고난 약자라 끊임없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의 관찰은 얕은 것이다. 나는 삶의 고뇌에 저항하기 위해 강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표면적인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둘 다 약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특별히 강하지도 않고 특별히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약점을 보이는 게 싫은 사람이고, 그저 남에게 지기 싫어서 노력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뿐이다. pp.276~277

 

이 부분 읽으면서 뜬금없이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렸다. 극과 극이지만 같았던 사람들.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이키게 되고. 헌데 내 생각은 구로사와 옹과 조금 다르다. 본디 인간이, 차포 다 떼고 근원을 파헤집고 들어가 클로즈업하면 다 거기서 거기. 그 사람이 어떤 가면을 집어 들고 얼마나 빈번하게 오래 쓰고 있느냐,가 곧 그 자신이다.

 

각설하고, 작년에 사두고서 만으로 일 년을 묵힌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 비슷한 것]을 정독했다. 1950년작 [라쇼몽]을 넘어서는 더 이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쓸 수 없다고, 그 이후 스무 편 넘게 감독한 본인 작품들이 자신에 대해 말해주리라,며 마치고 있다. 사실 그의 인생 말년이 진짜 파란만장했을 텐데.

 

총평이라면 역시나 영상만큼 글에도 달변이고, 인생 얘기와 영화 얘기가 날줄 씨줄로 테피스트리를 이룬 본문도 재밌었지만 부록으로 딸린 필모그래피 해설, 그리고 감독이 1975년에 직접 썼다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번역문이 알찼다. 자, 이제 그만 곰발님 보내온 스티븐 킹 소설로 들어가 볼까. 여튼 요즘 틈만 나면 책을 잡게 돼서 영화에 소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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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9-2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인생 말년 얘기를 읽고 싶네요!!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자기개발서 비슷한 것 다 읽으면 이번엔 진짜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어볼까봐요~~^^;

풀무 2015-09-21 20:48   좋아요 0 | URL
저두요..! 195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해외 감독들로부터는 극찬과 존경을 받았으나 스튜디오 제작 방식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같은 일본 영화제작자들 사이에선 엄청난 제작비로 예술연하는 영화를 찍어 흥행이 어렵다며 기피 대상이 됐던.. 그 다음 인생 얘기를 읽고 싶은데 말입니다.
스티븐 킹의 사계,중에 봄 이야기 그러니까 쇼생크 탈출,을 다 읽었는데 역시 소문대로 타고난 스토리텔러이더군요. 영화로 여러 번 봐서 읽는 내내 장면장면 떠오르는데도 재밌었습니다. ^^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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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이성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진화되어 왔다. 사회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인간 유전자의 진화적 산물이다.  -본문 중에서 -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 대응되는 제목을 붙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인가. 유전자의 이기성 내지 이해관계에 의해 '진화적으로 안정화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이 추동되어 개체, 군집 단위의 이타주의 성향이 형성된다는 '이기주의적 이타주의'에 다름 아니다. 즉 이기적인 유전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현하는 이타적인 인간성의 아이러니를 이미 언급하고 규명한 [이기적 유전자]의 주제에 주류 인문·사회과학적 해제를 덧붙인 동어반복인 셈. 따라서 원제가 '德의 기원(The Origins of Virtue)'인데 '이타적 유전자'로 명명한 번역/출판 의도는 '이기주의'에 대한 또 다른 역설적 표현이어서 흥미로우나 다분히 선정적이며 이기적 유전자론의 본질을 곡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내겐 결정적인 감점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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