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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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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문장이었을 것이다. 자네는 어찌 죽으려는가. 인간은 어머니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어머니 없이는 죽을 수도 없네. 스물 언저리.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읽으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마지막 대화에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어머니'를 21세기 페미니즘에서 박제한 '모성'으로밖에 대입하지 못하겠는 분들은 조용히 이 포스트에서 나가주기 바란다.) 그 뒤 사반세기를 훌쩍 넘긴 시점에서 요코야마 히데오의 [빛의 현관]은 내가 읽으며 눈물을 떨군 두 번째 소설이 되었다. (그렇다고 두 소설의 문학적 성품과 수준이 동류 동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Y주택' 의뢰인 일가족의 실종 배후를 좇으면서 유년을 회고하는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의 유랑(流浪). 그와 이혼한 아내 유카리가 지향했던 정주(定住). 독일에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터키에서 타계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그리고 프랑스에서 숨을 거둔 일본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의 체재(滯在). 처음엔 세 가지 기둥을 세워놓고 그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맞대고 또는 뒤섞으며 적당히 안주하는 소설로 읽혔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일본 거품경제 붕괴 전후의 냉엄한 현실에 수많은 사람들 사연과 위태로운 관계망 그리고 마법 같은 선의와 속죄가 씨줄 날줄로 엮인다. 무엇보다, '쉽사리 입에 담으면 너무 진부해지는 아름다움'에의 탐구 내지 추구라는 관념의 동심원 정중앙에 가계와 세대를 넘나드는 인연과 각자의 '삶'이 놓여 있다. 


[지와 사랑] 속 골드문트가 얘기한 '어머니'를 굳이 [빛의 현관]에 치환하면 한 사람의 '원풍경(原風景)'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 페이지에 걸쳐 책은 말한다.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의 유년 시절 기억과 그가 살아온 생의 모든 노정이 그의 원풍경, 가슴에 품고 있는 '노스 라이트'가 되었노라고. 인간의 진창과 하늘을 아우르려 애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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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여름날
멀리까지 가서 자두를 한 상자 사왔다
자두 사러 나선 길은 아니었지만
겸해 돌아오는 길에
자두 한 상자를 손에 넣고 두둑해진 날

수줍은 듯 시설도 하얗게 낀 붉은 자두를
오천원 만원 하면서 골라 담지 않고 상자째 사서 왔다
제 주먹만한 자두를 보고 침은 이미 한 컵씩 삼킨 아이들이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 매달려 찔러보는 걸
집에 가서 먹자고 매운 말로 다그치며 돌아왔는데

다음날 씻어 먹이려 열어 본 자두는
반 이상은 썩고 그나마도 다 물러있었다

살면서 누구든 이런 날이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썩은 과일을 정성스레 모셔오는 날이
죽은 사람을 산사람인양 업고 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썩은 자두의 그 한없는 단내를 맡으며
집은 과일마다 썩은 과일이었는데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타박을 받던 마음 생각이 났다 


- 이현승, [모든 시] 2018년 가을호, '김종삼 생각' -


평과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년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잡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원정'(園丁) - 


낭독회 자리에서 이현승 시인이
김종삼 시인의 '원정'을 읽을 때
그렇게 목이 메었다고 한다.
원정(園丁)은 정원이나 과수원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호(號)이기도 했다.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풍경' -


몇 그루의 소나무가
얕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 대학 건물은
귀가 먼 늙은 석전은
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위치엔
누가 그린지 모를
풍경의 배음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배음'(背音) -


그러고 보면 북 치는 소년이 곧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
김종삼 시인이 참으로 아끼던 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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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시일 내에 꼭 다시 한번 보리라 했으나 게으름 탓인지 생활에 묻혔단 핑계로 넘기고 넘겨 지금까지 왔다. 3년 전, [사요나라 이츠카]를 보면서 가장 밀접하게 연상되던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연출작 [순수의 시대]였다. 당시 작성한 리뷰를 들춰보면, '관습과 제도의 울타리를 이용해 사랑을 지켜내는 미츠코와 타인들의 편견 앞에 애석한 마음을 꺾어 묻어버린 토우코, 그녀들 사이에서 세간의 시선을 방패막 삼지만 뒤늦게 본심을 깨닫는 유타카의 삼각 관계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를 그대로 연상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그 때의 내겐 유타카(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츠코(이시다 유리코), 토우코(니카야마 미호)가 그대로 뉴랜드(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메이(위노나 라이더), 엘렌(미셸 파이퍼)에 겹쳐졌던 셈이다. 허나 다시금 돌이킬 때, 전자가 탈역사화된 시공간을 무대로 동시대와는 철저히 분리된 해방구를 그리며 로맨틱한 감정 및 회한에 방점을 찍었다면, 후자는 인물과 관계 자체에 시대 및 구조가 땀땀이 새겨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1994년 가을, 동숭동에 있던 개봉관에서 봤으니 벌써 20년 넘게 흘렀다. 어제 관련 네이버 캐스트를 접하고 오늘은 알라딘 도서 정보에서 주요 문구들을 찾아 읽는데, 문장마다 콕콕 박히면서 23년 전 본 뒤로 큰 줄기 외엔 모두 기억에서 유실됐다 여겼던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얼마나 가슴을 뒤흔드는지 모르겠다. 요참에 영화 말고 아예 원작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진다.

 

 

  

 

 

 

 

 

 

 

뉴랜드는 진지하지만 차분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약혼녀의 환하게 빛나는 미모, 건강, 우아한 태도와 민첩한 머리 회전, 책과 사상에 대한 수줍은 관심에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솔직하고 충실하며 용감했고, 그의 농담에 웃어 주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유머 감각도 있었다. 순진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쾌락에 눈뜨게 될 강렬한 열정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한번 슬쩍 훑어 보면 이 모든 솔직함과 순진함이 단지 인공적으로 꾸며진 데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낙담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본능적으로 뒤틀린 교활함에 가득 차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순수가 어머니, 숙모, 할머니들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선조들의 음모로 교묘하게 조작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왕처럼 마음껏 부술 수 있는 눈으로 빚은 조각인 양 그가 원하고 가질 관리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강요되어 왔다는 점 때문에, 이 순수에 억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p.62 -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 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웃던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당신.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요? 그런 곳에 가 본적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곳을 찾으려 시도한 이들이 한둘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요. 그들은 모두 잘못된 역에서 내렸어요. 볼로뉴, 몬테카를로 같은 곳 말이죠. 그곳은 그들이 뒤에 두고 떠나온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더 작고 음침하고 난잡하다는 것만 빼고 말이죠."  - p.356 -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이제 자신이 관습 속으로 얼마나 깊이 가라앉아 버렸는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 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복권에는 셀수도 없는 많은 표가 있었지만 상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 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라는 평을 받았고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가 옮은 폐렴으로 갑자기 죽었을 때에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들이 함께한 긴 세월을 통해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즁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 p.425~426 -

 

"아버지, 올렌스카 부인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랑 그분은 보통사이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었나요?" "아름답다고? 모르겠다. 그녀는 달랐어." "아 바로 그거였군요!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랑이 시작되기 마련이죠."  - p.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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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포털 사이트에 '하루 5분 연구소'라는 곳에서 선정한 '최고의 소설 도입부 탑 10'이 소개됐었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된 건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소설 자체가 좋아야 첫 문장도 그만큼 빛을 발하는 것 같다.

 

10위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대이며, 최악의 시대였다.
10위 - 호메로스, [일리아드],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
9위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9위 - 김훈, [칼의 노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8위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모양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
7위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6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5위 - 이상, [날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4위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3위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2위 - 허먼 멜빌, [모비딕],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1위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내 경우, 8위에 선정된 톨스토이 작품 중엔 호흡이 다소 길지만 [부활] 첫 문장이 좋다.

 

몇십만이나 되는 인간이 어느 조그마한 장소에 모여 엎치락뒤치락하며 자기네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제아무리 애를 써보았자, 또 땅바닥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제아무리 돌을 깔아보았자, 그 틈바구니에서 싹터 나오는 풀을 말끔하게 뽑아보았자, 석탄이나 석유의 연기로 아무리 그을려보았자, 또 나뭇가지를 자르고 새나 짐승을 죄다 쫓아보았자 - 도회지 안에서의 봄도 역시 봄은 봄인 것이다.

 

한국소설에선 최인훈의 [광장]. 내겐 [설국] 이상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외국소설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여기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김욱동 번역본으로 옮겨 놓는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한 편 더 꼽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어른들은 웃었고, 나중에는 얘가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지 이 창백하고 어린애답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가벼운 미움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면의 고백] 펼친 김에 도입부 인용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3부 3장 치열한 마음의 참회(시) 중에서.

 

아름다움 - 아름다움이라는 놈은 무섭고 끔찍한 것이야! 일정한 잣대로는 정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무서운 거야. 왜 그런지 신께서는 인간에게 자꾸 수수께끼만 던져주신다니까. 아름다움 속에서는 양쪽 강 언덕이 하나로 만나고 모든 모순이 함께 살고 있어. 나는 교육이라고는 전혀 못 받았지만, 이건 꽤 연구를 많이 해서 생각해낸 거야. 실로 신비는 무한하다니까! 이 지구상에는 어지간히도 많은 수수께끼가 인간을 괴롭히고 있어. 이 수수께끼가 풀린다면, 그건 젖지 않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일이지. 아, 아름다움이라고! 게다가 내가 도저히 참을 수없는 건 아름다운 마음과 뛰어난 이성을 가진 훌륭한 인간까지도 왕왕 성모(마돈나)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출발하였으나 결국 악행(소돔)의 이상으로 끝난다는 거야. 아니, 아직도 한참 더 무서운 게 있지. 즉 악행의 이상을 마음에 품은 인간이 동시에 성모의 이상 또한 부정하지 않고 마치 순결한 청년 시절처럼 저 밑바닥에서 아름다운 이상의 동경을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거야. 야아, 실로 인간의 마음은 광대해. 지나치게 광대할 정도지.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걸 좀 줄여보고 싶다니까. 에이, 제기랄.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네. 정말! 이성의 눈에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정의 눈에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니 말이야. 애초에 악행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건가? ... 그나저나 인간이라는 건 자신이 찔리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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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1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솔라리스 그리폰 북스 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영화 시나리오는 내게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긴 프롤로그에서, 영화는 크리스의 가족을 소개하고 그의 노모에게 과도한 비중을 둔다. 노모는 가족의 유대를 상징할 뿐 아니라 조국, 대지를 상징하고, 이것은 러시아의 민속 문화에서 강력한 함의를 지닌다. 나로 말하자면, 크리스의 가족 관계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영화에서도 문제시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논의 끝에 나는 어렵사리 크리스의 가족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내 소설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고향, 달콤한 지구'와 '차가운 우주'의 이미지가 대비되는 '인식의 드라마'가 형상화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우주 정거장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만들어져, 행성의 광활하고 열린 공간과 작고 폐쇄된 우주 정거장 간의 적대감을 상징하는 드라마 말이다. 안타깝게도 타르코프스키는 한쪽 편을 들어 '차가운 우주'에 대비해 '따뜻한 고향 지구'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지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인간의 마인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는 인식의 드라마 대신 타르코프스키는 인식의 문제와 그 한계와는 무관한, '대단히 탁월한' 도덕극을 만들어 냈다. - 나리만 스카코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3장 솔라리스의 환상, 125쪽, 1979년 'The Profession of Science Fiction'지 스타니스와프 렘 인터뷰 인용 -

 

 

솔라리스 행성에 파견된 심리학자 크리스와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의해 그의 과거 기억에서 복제된 죽은 아내 하리의 모사체. 솔라리스 행성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스스로 사고하며 대기권의 생물체 뇌파로부터 잠재의식을 받아들여 그 기억 속 존재를 물질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라 할 수 있다. 하리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토로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실체로 묘사된다.

 

 

공상과학소설 [솔라리스(1961)]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이 자기 작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 각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1972)]에 진저리를 쳤다는 사건은 영화광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화다. 원작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관점은 왜곡과 일탈, 예술적 변형, 창조적 파괴라 할 만큼 소설의 의미론적 방향성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원작소설의 정신은 세간에 회자되는 '이해할 수도 친해질 수도 없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니, 다만 인간이 보이는 모든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라는 '솔라리스 잠언'에 드러나 있다. 스타니스와프 렘 자신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작품 취지로 들었다. 소설 속에서 솔라리스의 우주정류장에 유배된 학자들은 전혀 지구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자신을 잃어 버린 채 헤매고 다니는 개인에게 지구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낯설고 황량한 곳이며 솔라리스라는 행성, 그 미지의 적대적인 공간이 되려 지향, 도약으로까지 비춰진다. 허나 행성을 관찰하며 환원하고 과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던 솔라리스트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이 되며 냉철하고 이지적인 인간의 정신은 끝내 외계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와의 접촉에 성공하지 못한다.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 명대사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부질없다. 우리에게 우주 정복의 야망 따윈 없다. 지구의 영역을 우주로 확대할 뿐이다. 더 이상의 세계는 필요 없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할 뿐이다.' 소설이 지구와 행성 솔라리스를 분리한 선형적인 세계라면 영화는 지구와 솔라리스 사이에 상호 침투, 합성이 반복되는 비선형의 세계다. 타르코프스키는 우주와 외계행성이 주요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지구의 중력, 인간 존재의 무게를 싣는다. 지구는 인간에게 아늑한 고향이며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지구를 향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솔라리스트들의 괴로운 기억을 복제하길 멈추고 마침내 지구를 복제하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솔라리스의 바다가 보내온, 아니 실은 스스로의 기억과 자의식의 투영이자 죄책감과 양심의 일부인, 자신 때문에 자살했던 아내 하리 앞에 참회하고 화해에 이르며 솔라리스가 복제한 지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그 품에 안긴다.

 

결코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이 인간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수긍하면서 오히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기억과 환상을 매개로 주인공 크리스 내면의 영역으로 옮겨진다. 영화 속 솔라리스의 바다가 지구의 대륙과 섬을 복제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외형적인 접촉 불가능성이 내면적인 접촉의 실현 가능성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환원적인 이성에 국한될 때 타자와의 접촉 및 이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던 인간의 인간중심적인 입장과 사고가 사랑의 가치를 긍정하고 휴머니티의 한계를 자성하면서 타자를 끌어 안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그 가부, 시시비비와 별도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솔라리스]를 통해서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공상과학영화라는 장르마저 인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솔라리스]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사회주의의 대답 내지 대응이라고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고 실제 작품을 본 식자들은 보란 듯이 그 평을 폐기 처분했었다. 허나 돌이켜 보건대 그게 사실 전혀 근거없는 평가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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