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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케네스 브래너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정의라는 저울이 기울어질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피해자들이 고통을 벗어나 안식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 참된 정의일 것이다.' 

- 극 중 에르큘 포와로의 독백 -


개인적으로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 최고작은 [회상 속의 살인]과 [끝없는 밤]이라 생각하지만 대외적으로 그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 핵심적인 모티프를 제공했다며 누군가 떼써도 별반 할 말이 없는 소설이다. 1985년 1학기 중간고사 끝날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붉은 문고판을 사다가 밤새 읽었고 그 이듬해인가 KBS1 명화극장에서 방영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4년작 영화를 봤으니 근 30년만에 케이블로 새로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만난 셈이다. 


서스펜스의 밀도랄까, 추리물로서 쾌감은 원작에 비해 떨어진다. 당연한 것이, 한때 정통 셰익스피어극의 계승자로서 명성을 얻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20세기 중엽 출간된 이 한 편의 추리 명작을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고전 비극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성과 법의 잣대로만 심판할 수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잔인한 진실 앞에 햄릿처럼 고뇌하는 회색 뇌세포의 영웅 에르큘 포와로 탐정. 그리고 미스터리 참극의 한가운데 놓여진 또 다른 구심점 허바드 부인. 멜로드라마틱한 패트릭 도일의 음악이 깔리면서 그 두 인물을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와 미셸 파이퍼의 맹기(猛氣)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뚫고 나오기 직전의 클라이맥스에선 감상 내내 불만스럽던 나조차도 기묘한 감동에 사로잡혀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도입부의 성물(聖物) 도난사건은 그 정확한 원전이 떠오르질 않지만, 사건을 마무리하고 런던으로 향하려는 포와로를 다시 나일강으로 호출하는 에필로그에서 [나일 살인사건]을 후속편으로 예고하며 본작은 두 시간에 걸친 대장정을 매조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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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좀 해 두자.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인두껍 괴물 여러 마리가 뒤엉켜 물고 뜯는 세상의 단층도를 블랙코믹 엽기극으로 그린 황인호 감독의 2014년작 [몬스터], 두 초인의 대결 양상에 인간 존재의 모순을 겹쳐 둔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2014년작 [몬스터즈], 과연 개인이 괴물인가 세상이 괴물인가를 처연하고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던 2004년작 [몬스터]와 한중일 다국적 옴니버스 호러 [쓰리, 몬스터]까지 21세기 들어 도대체 '몬스터'를 제목 삼아 인간 이면과 시스템 치부를 드러낸다는 전략의 극영화가 몇 편이나 쏟아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허나 더 이상 찾아 볼 필요도 없이 단언컨대, 금번에 보게 된 2013년 일본 영화 [몬스터]가 그중 최악이다. 흉한 외모에 대한 편견과 멸시로 점철된 각박한 세상을 헤쳐 온 한 여성의 기구한 삶, 철부지 어릴 적 극진했으나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 자신을 못 알아보고 야멸차게 거부했던 첫사랑을 향한 애증 - 복수심과 순정 사이의 갈등 - 에 초점을 맞추면서 '여인잔혹사'의 서사를 따르지만 그녀의 생애와 주변 시선을 통해서 그 어떤 의미있는 담론도 끌어내지 못한 채 안팎으로 빈약하고 진부한 치정 멜로에 그치고 말았다. 편견과 냉대가 빚은 괴물이라는 콘셉트만 앞세울 뿐, 가뜩이나 조악한 만듦새에다 남성주의에 편중된 시각까지 내게 있어선 재론의 여지없이 졸작이다. (IPTV. 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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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잔, 더러울 예, 잔예(殘穢). 더러움이 남다, 부정을 타거나 원념(怨念)이 서린 장소에서 연쇄적으로 재앙이 벌어지는 현상. 원작자 오노 후유미가 지어낸 신조어라 한다. 화자 겸 주인공 '나'(다케우치 유코)는 독자들이 제보한 체험이나 지역 전설을 토대로 잡지에 괴담 칼럼을 연재중인 소설가. 어느 날  새로 이사간 아파트 다다미방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음에 의문을 품고 사연을 보내온 건축디자인 전공 대학생 쿠보(하시모토 아이)와 함께 미스터리를 파헤치다가 결국 그녀도 저주에 말려들게 된다는 줄거리다.

 

 

본작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이다.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 가옥에서 살던 코이도 영감의 저장강박증이 실은 환영과 환청의 공포에 질려 원혼이 출몰할 가능성이 있는 빈 공간은 모두 쓰레기로 채워 넣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설정.

 

[잔예 - 살아서는 안되는 방]은 그 제목에서도 연상되는 바, [주온]을 쏙 빼닮은 영화다. 과거 참극에서 빚어진 원한이 '집터'를 진원지 삼아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며, 해당 조건에 걸려든 자는 선악 여부 관계없이 변괴를 맞는다. 차별점이 존재한다면 서로 별 연관없어 보이던 환담들이 그 배후의 근원을 역추적, 캐내면 캐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되는 구성 방식에 있다. 다다미방에서 들려오던 빗자루로 뭔가 쓸어담는 듯한 기척은 아파트가 세워지기 훨씬 전 해당 집터에서 살던,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기들 울음 환청에 목매달아 자살한 여인의 옷자락이 흔들리는 시체를 따라 바닥에 스치는 소리였으며, 그 아이들의 죽음은 사람을 해치고 집을 불태우라 속삭이는 원귀에 홀린 자의 소행이었다. 원귀의 정체는 100년 전 화재 진압을 이유로 입구를 틀어막은 탄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한 광부들의 한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광부들의 원혼이 작품의 주된 흐름과 별개로 여겨졌던 프롤로그 '갓파' 미라 에피소드와 이어지면서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저주의 순환고리를 이룬다.

 

 

이 장면 역시 섬뜩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사건에 그닥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던 잡지사 직원에게까지 죽은 광부들의 망령이 찾아온다. 다만, 모든 재앙의 원흉이랄 수 있는 탄광 사건으로부터 그 어떤 맥락의 함의도 이끌어내지 않고 그저 중립적인 공포 소재로만 다룬 점이 아쉽다.

 

'저주의 내막을 들은 자도, 전한 자도 죽는다.' ... [잔예]의 결정적인 구멍이라 여겨진 부분은 원작 소설과 별도로 추가했다고 알려진 에필로그다. 넘치는 의욕을 주체 못하겠다는 듯 온갖 종류의 기담들을 쓸어담은 플롯 와중에 별별 인물들까지 다 난입, 산만하게 이어지는 몸통 전개야 전형적인 호러 양식에서 빗겨난 현장 취재 르포 형식에 가까워 나름 참신하게 볼 수 있었다. 허나 저주의 매듭이 끊기면서 모두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던 영화가 느닷없이 돌변, 단초 제시도 없이 2년 뒤에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씩 변을 당하면서 악순환이 되풀이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순간 마치 [주온]에 [링]과 [데스티네이션]까지 우격다짐으로 조잡하게 뒤섞은 카피본처럼 돼버리는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꽤 많이 갖췄음에도 불구, 다 보고나면 별반 잔상이 남지 않는 작품이다. (2016년, IPTV. ★★★)

 

 

 

 

 

 

 

 

 

P.S. 비록 직접 읽진 않았으나 목차를 살펴볼 때 원작소설 상으론 역사·정치·사회적 콘텍스트 위에 장르성이 구현됐을 가능성이 크다 (단서 / 금세기 / 지난 세기 / 고도성장기 / 전쟁 후 I·II / 전쟁 전 / 메이지·다이쇼기 / 잔재). 짐작컨대, 버블경제 부흥과 붕괴 및 그 사회적 여파의 인자들은 이미 먼 과거부터 존재했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며 증식했으리라는. 흡사 작품 속에서 돌고 도는 저주의 순환 구도처럼. 영화에선 그런 은유 내지 맥락이 전혀 짚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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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하라키리 (1962)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미이케 다카시 감독,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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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 하는 관객들은 무슨 죄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서전 비슷한 것], p.236)' 과장 좀 보태서, 일본영화사 100년의 거장이 마치 30년 후를 미리 내다 보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쓴 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 위에 군림하던 전통과 이념의 악용 및 폐해를 비판한 1962년작 [하라키리]를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그 전설적인 원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박 탓이었는지 모든 의미를 웅장하고도 섬세한 필치의 영상으로 전달하던 [하라키리]에 비해 과도하게 장식적인 숏과 설명조 위주 대사로 전개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개명된 제목 '일명(一命)'에서 감지되듯 오리지널의 복합적인 주제의식 중에도 유독 휴머니즘에 무게 중심을 둔 점이다. 특히 비운의 사무라이 모토메와 그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장인 한시로를 차례로 대면, 윤리지옥 통과제의를 거치며 고뇌하는 이와이 가문 사이토 카게이 집사의 마지막 비정하고 위선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부조리한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은폐되고 유지되는지를 냉철하게 주시한 1962년작에 반해, 야쿠쇼 코지가 분한 본작의 사이토 집사는 우유부단한 휴머니스트로 묘사되면서 다소간의 온기를 불어 넣는 대신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최적화된 원작의 정신을 상당 부분 희석, 훼손하고 있다. (그의 캐릭터에 절름발이 핸디캡을 부과함으로써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를 활유한 시도 역시 효과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인공 한시로의 일당백 결투에서 1962년작은 빈 주먹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내내 강조하는데 2011년작은 대개 손바닥을 펴고 있다는 차이가 눈에 띈다.) 
 

 

 

 

본편의 실책은 뭣보다 미이케 다카시에게 연출을 맡긴 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짧은 기간 안에 효율적으로 개성적인 영화를 찍어내는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다. 허나 그것이 컬트 지향일 경우로 한정된다. 원래 필모그래피상 등락이 심하기도 했거니와, 최근작 중에 2012년 [악의 교전]과 2013년 [짚의 방패]의 대조적인 결과야말로 그의 세계를 집약·대변해주는 일종의 징표라 할 수 있다. 전자 같이 다채로운 비주류 감성을 허용하는 펑크에선 거의 미친 듯한 폭발력을 선뵈는가 하면 후자처럼 일정한 주제와 메시지의 범주를 두는 정극일 경우엔 여러 부분 타협하면서 그 컨셉과 설정에 질질 끌려 다니곤 하는 것이다. 더욱이 본작은 오리지널 각본도, 소설 각색도 아닌 레전드 고전의 첨삭 리메이크이니 하물며. 평소 성공작에서의 재기 넘치는 고어 활극 때깔 때문에 낙점된 듯한데, 비범한 스타일과 문제의식으로 번뜩이던 올타임 클래식이 전혀 다른 세계관 및 성향을 지닌 감독과의 잘못된 궁합으로 인해 그 어떤 독자적인 결도 찾아볼 수 없이 주석만 달아 늘린 휴먼드라마로 패착한 듯하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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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30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은...
할복하면 역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가 생각납니다. 할복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줬던 것 같아요.

풀무 2016-10-01 00:26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무척 연관 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십 년 쯤 지났을까요. 칼에 지다,를 각색한 [바람의 검 신선조]를 보긴 했는데 영화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던 걸로 기억돼요. 붉은돼지님 주신 덧글에 원작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수입] Hara-Kiri: Death of a Samurai (할복 : 사무라이의 죽음)(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New Video Group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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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쟁 수요가 없어지자 그 흐름에 적응 못한 - 현대사회로 치면 실업난에 처한 - 사무라이들은 기근과 병고에 시달린다. 특히 억울하게 영지를 몰수당하고 영락한 주군을 떠나 떠돌던 낭인들 경우 다른 군주를 찾아가 구차하게 사느니 무사답게 자결로 생을 마감하겠노라 할복 의식을 치르기 위한 장소를 빌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군주는 그의 결의를 치하하고 일정 금액 생활비를 내주거나 아예 가신으로 삼는 것이 일종의 상호 암묵적인 관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피치 못할 할복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어 '광언할복(狂言切腹)'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존재했다. 다키구치 야스히코의 1958년 소설 '이문로닌키(異聞浪人記)'를 원작으로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이 연출한 [하라키리]는 이러한 에도 시대의 비극적인 위장 할복 사건을 에워싸고 난립하는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하라키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액자 구성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할복을 또렷이 대비하는 동시에 아우른다. 극한 생활고 속에 병약한 아내와 갓난둥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역 유지인 이와이 가문에서 위장 할복을 시도하던 치지와 모토메(이시하마 아키라)가 간계에 걸려들어 본보기로서 실제 감행하게 되는 처참하고 굴욕적인 할복.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등진 손자와 딸의 복수 및 갖은 모독을 당하며 고통스레 숨을 거둔 사위의 명예 복원을 위해 이와이 가문에 혈혈단신 뛰어들어 고도의 심리전으로 맞서다 육탄전까지 불사, 총격 세례 직전에 스스로 산화화는 주인공 한시로 츠구모(나카타이 타츠야)의 비장한 할복. 끝으로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악용, 비정한 논리로 진퇴양난의 덫에 옭아매어 능욕하면서 치지와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이와이 가문 충복들의 자결 내지 진실을 은폐하고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상명하달식 강제 할복.

 

 

 


배우들 연기부터 그들을 담아낸 테이크와 숏의 장단 및 호흡 안배, 정(靜)과 동(動)의 리듬감 배합까지 완벽하다.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은 '할복 의식'이라는 미명 하에 빚어지는 참극을 영화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구도와 명암, 동선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그 변질된 원칙주의 허례허식의 실체를 까발릴 뿐 아니라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인간 감정의 다양한 양태와 단면들을 치밀하게 배치한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롱테이크로 응시하는 이와이 가문의 가보, 기실 그 속이 텅 빈 채로 산 자들 위에 군림하는 붉은 갑주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울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정신, 인간의 존엄과 생명마저 잠식하는 그 과장된 이념에의 맹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당대의 황폐하고 부조리한 시대상 묘사가 그대로 작금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공명하는 수정주의 사무라이극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 리뷰 상품을 잘못 연결하여 새로 링크합니다.

http://dvd.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96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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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쉬운 리메이크작,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2011)
    from 잿불의 기억 2016-09-30 18:50 
    '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 하는 관객들은 무슨 죄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서전 비슷한 것], p.236)' 과장 좀 보태서, 일본영화사 100년의 거장이 마치 30년 후를 미리 내다 보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쓴 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 위에 군림하던 전통과 이념의 악용 및 폐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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