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 감독이 필름 위에 새긴 21세기형 '실락원'이랄까. 같은 얘기를 가지고 디즈니 스튜디오에선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를, 테렌스 맬릭은 이렇게 사색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디즈니의 [포카혼타스]가 나빴단 얘긴 아니다.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 나는 [포카혼타스]가 [인어 공주]나 [라이온 킹] 같은 당대 디즈니 애니에 뒤지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작 [뉴 월드]는 영적 층위와 현상적 층위에서 모두 해독 가능한, 자연과 인간을 그리며 노래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미국 건국 초기 유럽인들의 신대륙 개척 혹은 식민화에 대한 영화일까? 사실 영화 초반엔 꽤 많은 부분을 영국에서 온 개척자들과 원주민들의 대립과 전투 묘사에 쏟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정치적 알레고리로 접근해도 별 무리는 없을 성싶다. 예컨대 영국인 스미스 선장(콜린 파렐 扮)이나 존 롤프(크리스찬 베일 扮) 두 남성을 유럽 식민국으로, 원주민 포카혼타스(코리언카 킬쳐 扮)를 미지의 개척지로 환원하는 식의 해석도 합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허나 아련한 느낌 몇 가닥 쥔 채로 감상을 마친 시점에서 그렇게까지 작품을 난도질해가며 박제하고 싶지 않다. 이건 무엇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서로 혼(魂)으로 소통한 두 남녀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다. 그들이 주고받은(혹은 그랬어야 했을) 사랑이라는 의식과 기억에 대한 영화이고 우리가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잊혀진 태초의 기억, 그 원형에의 노스텔지어에 대한 영화다.

 

 

 

 

표면적으론 가슴 아픈 사랑 영화이나 그 이전에 자연의 영화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카메라는 작품 대부분을 인간을 품은 대지와 강, 바다, 나무와 하늘을 담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여러 서적과 영화들로 전해졌듯, 여기 신대륙 원주민들은 세상만사 모든 것을 자연과 영혼의 맥락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다. 그런 순수하고 평온한 기운이 포카혼타스라는 여주인공의 시선과 독백을 통해서 영상에 고스란히 배어난다. 그녀가 삶을, 타자를, 세계를 마주하는 태도는 스미스나 존의 그것과 대비되면서 그들을 온전히 품어낸다.

 

 

 

 

이 영화는 또한 한 여인의 행적보다 그 내면에 치중한 시적인 일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스미스 선장과 마음의 대화로 사랑을 속삭이던 원주민 족장의 딸 포카혼타스에서 다른 남자 존의 아내가 되어 가정을 이룬 영국 부인 레베카로 살다 간 여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미스와의 재회, '당신과의 사랑이 한낱 꿈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랑만이 진실이었다'는 그 앞에서 조용히 아쉬움을 묻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모든 주변 사물과 사람들을 포용하며 초연히 죽음을 맞게 되는 그녀를 카메라는 시종 자연의 품성과 연계하여 우리 기억 저편의 잊혀진 대륙, 아메리카 신대륙 아닌 본연의 '신세계'로서 두 시간 넘게 응시하고 있었다.

 

 

 

 

광활한 대지와 대기의 순환을 고즈넉하게 담아낸 영상이, 심금을 울리는 제임스 오너의 음악이, 배우들의 흔들리던 눈빛과 서로 마음으로 주고받던 대화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같은 주제라도 내겐 [트리 오브 라이프]의 고양된 간증보다 [뉴 월드]에서 나지막히 속닥이던 사랑의 넋두리, 아련한 향수(鄕愁)의 읊조림이 더 간절히 와닿았다. 아직도 작품에서 전해지던 감정의 떨림, 그 여진에 가슴 먹먹하다. (★★★★☆) 

 

P.S. 인디언 말로 '포카혼타스'는 작은 장난꾸러기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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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2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으며 막 두근대는, 꼭 찾아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이런 보석을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쪽섬님.

풀무 2016-01-23 05:52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테렌스 맬릭 감독의 최고작은 여전히 [천국의 나날들]을 꼽게 되면서도 70년대의 자연주의적이라 할만한 두 작품과 그와는 반대 궤도를 맴도는 듯한 최근작들 사이에 [씬 레드 라인]과 [뉴 월드]가 있고 그 전작을 두루 살필만한 가지가 있는 영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리한 감상글을 읽어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참 오랜만에 뵙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워낙에 게으른 서재 친구라..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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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품을 낳는 것이 아니다. 작품도 감정도 일단은 세계에 내재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주워모아 손바닥에 올린 뒤 보여줄 뿐이다. 작품은 자기표현이기보다 세계와의 대화(커뮤니케이션)다. 이 세계관을 겸허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로서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대립은 근원적이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세계', p.26 -

 

머릿속에 구상한 이미지를 화면에 구현하기보다 눈앞의 이미지를 발견해 카메라에 담는 것에 익숙하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문예학을 전공하고 픽션 영화 감독 이전에 방송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이력을 시작한 그의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관객으로서 영화작가와 소통하고 교감함에 있어 당사자가 만든 영화들 이상의 창구가 없다고 여기지만 종종 영화 작업 배후와 이면을, 연출자 이전에 한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를 들춰보고 싶은 창작자가 있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중 한 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니시시폰' 신문에 연재된 컬럼 중심으로 기존작들 속에 반영됐을 체험과 추억들은 물론 작품 골조를 이룬다 할 세계관과 연출관, 사변들까지 한데 묶어 엮은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는 내게 있어 적합하고 의미로운 책이었다.

 

​그의 연출작을 여러 편 봤지만 대표작 한 편만 고르라면 두말없이 [걸어도 걸어도]를 꼽게 된다. 한 웅큼 온기를 머금은 채 삶과 일상, 사람들 감정 면면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허나 결코 안온한 감상에 빠지지 않고 마음 한 켠 싸하게 파고 들어 세상의 빛과 음영까지 환기하는 그 특유의 시선 및 기조가 글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후반부 - 5장과 7장 - 에선 영상 매체를 포함한 매스미디어 전반에의 비판과 더불어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인들 일상과 가치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날선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선보여 참신했다. 그 면면이 차기작들에 녹아들어 한층 더 깊고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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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10-08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의 이미지를 발견해 작품에 담는다는 생각과 말이 좋습니다. 저는 내일 바닷마을다이어리 볼 예정이에요^^

풀무 2015-10-08 16:5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은 일본에 계신 건가요..? 아님 부산국제영화제..? 암튼 부럽습니다. :)

프레이야 2015-10-08 23:32   좋아요 0 | URL
BIFF 내일 저녁 바닷마을다이어리, 매진이네요. 내일아침에 현장티켓팅 해야겠어요. 자리가 남아있을지ㅠ 고레에다 인기 좋군요 역시ㅎㅎ

풀무 2015-10-09 08:43   좋아요 0 | URL
지금쯤 티켓팅 하셨을지.. 꼭 성공하셨길요. 전 내년에 정식 개봉 거쳐 IPTV로 나오면 그때야 볼 수 있겠네요.

프레이야 2015-10-09 13:04   좋아요 0 | URL
전석 매진이군요. 대신 다른것으로 티켓팅했어요.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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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두툼한 편지 다발을 내게 건네면서 "이걸 읽어보세요. 이런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그건 혼담의 중개를 맡은 내 친구가 그녀 앞으로 보낸 편지였는데, 그 편지를 읽고 나는 경악했다. 편지 내용은 온통 나에 대한 험담이었고, 험담하는 기술이 참으로 천재적이었다.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문장에 소름이 끼쳤다. 그 친구는 결혼 중개를 부탁받고는 도리어 결혼을 깨뜨리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가끔 나와 함께 야구치 집을 방문해서, 내 앞에서는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그 편지를 보고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험담을 하는 사람이랑 그 사람을 믿고 험담을 당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을 믿겠니?" 결국 그녀와 나는 결혼했다.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찾아왔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절대 집에 들이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친구에게 그 정도로 원한을 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뭐가 살고 있는 걸까? 그 뒤에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사기꾼, 돈에 미친 사람, 표절하는 사람. 하지만 모두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일수록 더 선한 얼굴을 하고 친절하게 말을 하니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p.240~241

 

장모가 현명하시네. 이렇게 가감없이 결혼 골자만 술회하는 글도 간만에 읽어본다. 그나저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젊은 시절 전형적인 재능있는 열혈 마초 유형이었다. 

 

이건 일본인의 유연성일까 아니면 허약함일까? 나는 적어도 일본인의 성격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양면성은 내 자신 속에도 있다. 만일 패전 조칙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일 그것이 국민 모두에게 자결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면 그 거리의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자아를 악덕으로 보고 자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양식 있는 태도라고 배운 일본인은 그 가르침에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아를 확립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p.250

 

그러게. 일본엔 이런 집단 환상이 강력히 존재하는 듯하다. 이십대 때 [에반게리온] 오리지널 봤을 때도 놀랐던 게, 최종회에서 한 시간 내내 이어지던 그 장황한 설변이 결국 인류보완계획 - 전 인류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 - 이었다.

 

범죄자를 낳는 것이 사회의 결함이라고 하는 논리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범죄자를 옹호하는 것은 사회의 결함 속에서도 범죄로 치닫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무시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우에코사(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나리오 공동작업 짝패였던 초교동창 붕우)는 걸핏하면 우리 둘을 비교하면서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에쿠사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다를 뿐이다. 우에쿠사는 내가 회한과 절망과 굴욕과는 인연이 없는 타고난 강자이고, 자신은 타고난 약자라 끊임없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의 관찰은 얕은 것이다. 나는 삶의 고뇌에 저항하기 위해 강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표면적인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둘 다 약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특별히 강하지도 않고 특별히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약점을 보이는 게 싫은 사람이고, 그저 남에게 지기 싫어서 노력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뿐이다. pp.276~277

 

이 부분 읽으면서 뜬금없이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렸다. 극과 극이지만 같았던 사람들.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이키게 되고. 헌데 내 생각은 구로사와 옹과 조금 다르다. 본디 인간이, 차포 다 떼고 근원을 파헤집고 들어가 클로즈업하면 다 거기서 거기. 그 사람이 어떤 가면을 집어 들고 얼마나 빈번하게 오래 쓰고 있느냐,가 곧 그 자신이다.

 

각설하고, 작년에 사두고서 만으로 일 년을 묵힌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 비슷한 것]을 정독했다. 1950년작 [라쇼몽]을 넘어서는 더 이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쓸 수 없다고, 그 이후 스무 편 넘게 감독한 본인 작품들이 자신에 대해 말해주리라,며 마치고 있다. 사실 그의 인생 말년이 진짜 파란만장했을 텐데.

 

총평이라면 역시나 영상만큼 글에도 달변이고, 인생 얘기와 영화 얘기가 날줄 씨줄로 테피스트리를 이룬 본문도 재밌었지만 부록으로 딸린 필모그래피 해설, 그리고 감독이 1975년에 직접 썼다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번역문이 알찼다. 자, 이제 그만 곰발님 보내온 스티븐 킹 소설로 들어가 볼까. 여튼 요즘 틈만 나면 책을 잡게 돼서 영화에 소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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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9-2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인생 말년 얘기를 읽고 싶네요!!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자기개발서 비슷한 것 다 읽으면 이번엔 진짜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어볼까봐요~~^^;

풀무 2015-09-21 20:48   좋아요 0 | URL
저두요..! 195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해외 감독들로부터는 극찬과 존경을 받았으나 스튜디오 제작 방식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같은 일본 영화제작자들 사이에선 엄청난 제작비로 예술연하는 영화를 찍어 흥행이 어렵다며 기피 대상이 됐던.. 그 다음 인생 얘기를 읽고 싶은데 말입니다.
스티븐 킹의 사계,중에 봄 이야기 그러니까 쇼생크 탈출,을 다 읽었는데 역시 소문대로 타고난 스토리텔러이더군요. 영화로 여러 번 봐서 읽는 내내 장면장면 떠오르는데도 재밌었습니다. ^^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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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이성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진화되어 왔다. 사회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인간 유전자의 진화적 산물이다.  -본문 중에서 -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 대응되는 제목을 붙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인가. 유전자의 이기성 내지 이해관계에 의해 '진화적으로 안정화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이 추동되어 개체, 군집 단위의 이타주의 성향이 형성된다는 '이기주의적 이타주의'에 다름 아니다. 즉 이기적인 유전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현하는 이타적인 인간성의 아이러니를 이미 언급하고 규명한 [이기적 유전자]의 주제에 주류 인문·사회과학적 해제를 덧붙인 동어반복인 셈. 따라서 원제가 '德의 기원(The Origins of Virtue)'인데 '이타적 유전자'로 명명한 번역/출판 의도는 '이기주의'에 대한 또 다른 역설적 표현이어서 흥미로우나 다분히 선정적이며 이기적 유전자론의 본질을 곡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내겐 결정적인 감점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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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드니 빌뇌브 감독, 제이크 질렌할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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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일 뿐이다. (Chaos is order yet undeciphered.)' 영화 오프닝에 제시되는 화두를 영화에 맞추자면 이렇게 쓸 수 있겠다. '도플갱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자신의 무의식 내지 또다른 욕망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도플갱어 (The Double)]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소설을 각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한마디로 괴작이다. 허나 망작은 아닌, 되려 모호함이 겹겹의 다의성으로 확장되는 가작 이상의 영화다. 

 

권태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역사학 교수 아담(제이크 질렌홀)은 동료가 추천한 2005년 영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를 보던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배우 앤서니(역시 제이크 질렌홀)의 존재에 이끌려 그를 찾아 나서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의 실존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처음엔 만남에 뚱했던 저돌적인 성격의 앤서니가 되려 자신과 얼굴은 물론 목소리에 흉터 자리까지 똑같은 아담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담의 연인 메리(멜라니 로랑)에게까지 흥미를 느끼면서 서로의 삶을 바꿔보자 제안한다. 앤서니의 임신한 아내 헬렌(사라 가돈)에게 기묘한 끌림을 느끼던 아담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두 사람 간의 기이한 불안과 혼돈의 정체성 게임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파국을 맞는다. 

 

연출 의도 자체가 영화를 어떤 결로 읽어도 통하는 텍스트로 열어둔다. 내 경우 어찌 봤느냐,면 앞서 언급한대로. '도플갱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자신의 무의식, 또다른 욕망이었을 뿐', 자신의 삶에 위기감과 환멸을 느끼던 주인공 아담이 도피처(도피자아)로서, 욕망의 해방구로서 도플갱어 앤서니를 만들어낸, 한 사람이 겪는 두 겹의 삶에 관한 영화로 봤다. 내가 짚은 층위에선 아담과 앤서니가 동일인물이고 헬렌은 아내이며 메리는 혼외연인이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쾌락을 추구하고픈 욕망에 추동됨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결국 다시 현실로 소환될 수밖에 없고, 자꾸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욕망 덩어리, 도플갱어 앤서니는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 즉, 가공할 적(enemy)이 된 셈이다. 따라서 메리와 함께 앤서니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아담에게 마지막 순간 지금껏 앤서니를 통해서만 접촉하던 금기시된 욕망을 대변하는 거미가 엄청난 위압감으로 현현하는 건 수순이다. 결국 아담은 자아 통제에 실패한 것이다.

 

도입부와 중반부에 등장하는 거미(를 짓이기는) 여인이나 잿빛 안개로 자욱한 도시에 서있는 대형 거미 등 거미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한편으로 중간중간 카메라가 스쳐 지나며 잡아내는 황색 도시 하늘을 덮은 전신줄, 아담이 도플갱어 앤서니를 찾게 되는 인터넷 웹 자체, 마지막 앤서니와 메리가 타고 있던 차가 전복되면서 방사형으로 금이 간 차창 등을 통해서 거미줄 이미지가 간접적으로 반복된다. 아마도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아담 스스로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도시의 이쪽과 저쪽을 묶어놓고 거미줄에 스스로 걸려들었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듯하다. 전반적으로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화로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다소 식상한 감이 아쉽지만 주인공 아담을 통해서 잿빛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웃픈 초상을 볼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우화이고 희비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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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19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 아주 식상하고 지루했는데, 서쪽님이 마지막 인용하신 `도시의 이쪽과 저쪽을 묶어놓고 거미줄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해석, ˝카프카의 작품을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화로 만든 것 같은 인상˝ 부분은 아주 잘 캐치하신 듯!

풀무 2015-09-19 12:42   좋아요 1 | URL
제 경우는 예전에 들떠서 [그을린 사랑]을 봤다가 드니 빌뇌브 감독에게 무척 실망했던.. 그 반사작용인지 이후 [프리즈너스]와 [에너미]는 되려 그보다 재밌게(?) 본 편입니다. 헌데 정말 이 작품은 너무 크로넨버그 스타일이긴 했죠..? :) 제가 그간 알라딘에 자주 접속하지 못했었는데 아갈마님도 영화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