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마가리타 테레코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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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은 영화와 똑같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런 바람이 불었고, 그런 소나기가 왔었습니다. 방 안은 어두웠습니다. 석유등도 그때는 꺼져 있었죠. 그리고 내 영혼은 어머니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우리들은 정말 우리 어머니들의 얼굴들을 모릅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단순히 영화만을 보려고 극장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 내가 동경하던 모든 것, 나를 흥분시키고 내게 역겨운 모든 것 - 이 모든 것을 나는 마치 거울 속을 보듯 영화 속에서 보았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것들, 나를 밝고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 내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모든 것, 나를 파멸시키는 모든 것... 인간은 최소한 근본적이고 인간적인 충동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충동이든 타인의 충동이든... 

 

이 영화는 인간을 실어증의 저주로부터 구해 줍니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생각을, 불안과 교만한 생각들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영화는 나 자신에 관한 영화입니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 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 관객들로부터의 편지 인용부 -

 

실어증 치료를 받는 소년. 이 영화를 그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간이 해체되고 융합되며 진행되는 인간의 지각, 기억과 회상의 탐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우리 자신에 대한 정밀화이자 풍경화라고 한다면 어떨까.

 

1930년대와 2차대전 시기, 70년대의 시간들이 서로 기승전결 없이 교차한다. 소년의 고향집 방 안에서 비가 내리고 우중에 모닥불이 타오르며 기존 영화들의 평면적인 공간 개념들이 모두 해체된다. 그리고 소년의 기억과 미래 혹은 현재를 통해서 가깝고도 소원한 존재였던 어머니와 전시에 항상 부재하던 아버지, 고향 이웃 사람들의 단상, 사실적인 다큐멘터리 풍의 뉴스 릴 전쟁자료 화면, 원망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하는 주인공의 인생유전 등 다양한 삶의 파편들이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시적인 영상으로 꿈결처럼 흘러간다. 

  

1991년에서 92년으로 가던 겨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거울]이란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작품을 기존에 없던 전혀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정신적인 차원을 재창조 해냈다고 '읽었다'. 그러나 감독 본인에 따르면, [거울]은 우리 스스로 멀어진 근원적인 존재 양식을 응시하며 기존의 영화 매체가 잃어버린 시간의 리얼리티를 복원하고자 한 작품적 귀결, 규정될 수 없는 존재와 흐르는 시간의 포착이자 '봉인(封印)된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읽기보다는 보고 들으며 체험해야 한다. 일관된 주제에 따라 단선적으로 시퀸스들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드라마 투르기의 논리로는 이 작품에 본연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섣불리 분석하거나 박제하려 들면 길을 잃는다. 아니, 무수히 많은 길이 얽혀 있기에 그 모든 도구적 이성이 세상과 인간의 근원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 무력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는 표현이 옳겠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를 '시적 서정성의 논리'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화 문법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의 사고 전개 법칙과 삶 그 자체에 훨씬 더 근접하게 닿아 있다. 개별 존재의 정서적 구조의 특별성을 인식함으로써 섬세한 삶의 본질, 그 복잡성을 이루는 가닥의 미세한 한 올까지 작품에 담아내려는 타르코프스키만의 표현 양식이며 미학이고 철학이다. 그 긴밀한 정서적인 연결, 흐름에 오감을 맡겨야 한다. 직관으로 느끼고 그 속을 '살아야' 한다.

 

영화 애호가들은 한 영화 속에서 구성, 줄거리, 주인공 그리고 보통 예측 가능한 결말을 기대하는 데 익숙해 있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에서도 그와 같은 요소들을 찾게 되며, 결국 대부분은 실망에 가득 차서 극장을 나서게 된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에서는 이런 요소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인간에 관한 영화이다. 물론 영화의 화자 이노켄지 스모크투노프스키가 흉내내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예의 구체적인 인간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관한 영화다. 우리처럼 살아갈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일 뿐인 인간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 세상에 살고, 동시에 이 세상의 일부를 이루는 인간에 관한 영화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으로써 과거와 미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우리는 가볍고 간단하게 감상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작품에 인용된 바흐의 음악과 아르제니 타르코프스키의 시(詩)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 영화는 우리들이 별과 바다 또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듯이 그렇게 보아야만 할 것이다.

 

- 「봉인된 시간 - 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중,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물리연구소 팜플렛 인용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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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1-1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제 인생의 영화입니다. 씨네마떼끄에서 봤는데 보고 나서 10분 정도... 그냥 가만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타르콥스키 영화제 한번 했으면 좋겠네요...

풀무 2015-11-17 08:32   좋아요 0 | URL
작년 요맘때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었는데.. 전작은 아녔지만 말이죠. 올봄 종로3가 서울극장 자리로 옮겼다는데 한번도 가보질 못했네요. 언제 또 한번 하게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