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그의 아내 - 아웃 케이스 없음
박희순 외, 신동일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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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인물의 욕망과 관계를 살피면서 우리 사회를 유비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도식적인 만큼 통렬한 영화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둔 신혼 친구에게 아들을 낳으면 민혁(민중혁명 약자)으로, 딸을 낳으면 예니(맑스의 아내)로 이름을 지으라는 사내가 있다. 군대에서 동갑내기 고참과 후임으로 철학 에세이 책을 주고 받던 예준(장현성 扮)과 재문(박희순 扮)은 사회에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고졸 출신 요리사 재문은 예준을 동경하며 그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운동권 출신으로 고도자본의 첨병 역할을 자처, 남들 보기에 버젓한 외환딜러로 살아가는 예준에겐 노동 계급의 재문과 친구라는 사실이 삼팔육 세대 지식인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동시에 속된 우월감과 허영심을 채워주기도 한다.


물론 두 친구 간에 인간적으로 순수한 감정 교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구조 속에서 계급 차이는 늘 정신적 유대를 압박하고 구축한다. 예컨대, 자신을 쉐프(chef)라고 하는 재문에게 예준이 분명히 못박는 장면이 있다. 넌 쿡(cook)이라고. 영화 내내 유물론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카메라는 극중 인물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 관계 깊숙히 도사리고 있는 계급적 균열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는다.


두 친구 사이에 재문의 아내 지숙(홍소희 扮)이 있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으나 말 그대로 '결혼'은 '생활'이었고, 남편 친구 예준의 경제적 도움이 싫진 않지만 늘 그에게 맹목적일 만큼 예속적인 남편이 마뜩잖다. 남편은 쉐프가 되기 위해 미국 이민을 알아보던 중 사기를 당하고, 미용실 운영에 출산과 육아까지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그녀는 점점 지쳐 간다. 자기계발 겸 기분 전환 삼아 파리 미용박람회에 다녀오기 위해 지숙이 집을 비운 사이, 재문과 예준이 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던 중 너무도 끔찍한 비운의 사고가 터진다. 그 우발적인 사건은 이미 세 사람 관계 속에 내재해 있던 위선과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그들 모두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파국으로 내몬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역학으로 우리 일상 속에 스민 자본과 계급,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과 죄의식까지 파고드는 영화의 통찰이 무겁고도 예리하다.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처럼 보이는 사람들 관계망이지만 자본으로 엉켜 그 밑바닥을 이루는 구조의 지반은 강성하고 견고하여 좀체로 깨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지옥 같은 몇 년을 뒤로 하고 다시 가정을 이뤄 외진 곳에서 새출발한 재문과 지숙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수신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자본은, 구조는, 그렇게 망각 속에서도 끊임없이 개인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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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의 영화 - 시간과 공간의 미로
나리만 스카코브 지음, 이시은 옮김 / B612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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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책들은 역사상 지명도 높은 사상가들의 이론과 타르코프스키 영화 간의 연결고리 찾기에 급급했다. 즉, 기존의 타르코프스키 해설서들이 플라톤주의와 러시아 정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하이데거의 양심과 프루스트의 회상, 라캉과 데리다의 사유를 끌어다 놓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단정적인 끼워 맞추기 진술을 일삼았다면, 나리만 스카코브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시간과 공간의 미로]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사상들을 인식의 프레임, 필터 내지 매개 이상으로 삼지 않고 투명하게 작품 자체에 천착한 이해가능성과 직접적인 체험성 측면의 논의를 펼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영화' 관련 서적으로서 당연히 갖췄어야 할, 허나 지금껏 보기 드물었던 미덕이고 강점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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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문화사 -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
옐토 드렌스 지음, 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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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두 번 술잔 기울이는 정도지만 대학 때부터 그나마 마음 터놓고 지내는 절친 넷이 있다. 그들과의 신년 술자리 모임에서 오간 얘기다. 학생 때부터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고 저마다 다른 교감이 오갔다는 회계사 A는 여기서 자기만큼 여자에 대해 잘 아는 남자는 없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와이프가 산부인과 의사라서 본인도 거의 준의사 급으로 생리학적 측면에도 훤하다며.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고교 때부터의 여친과 결혼, 누구보다 빨리 가정을 이룬 B는 늘상 A를 비웃는다. 니 방위 나왔재. 현역과 방위의 차이가 기간 차가 아닌기라. 내무반 생활을 해봤느냐 안 해봤느냐 그기라. 여자도 마찬가진기라. 떡 많이 쳐봤다고 여잘 알아? 실제 생활 속에서 오래 부대끼며 알아 가는기라...

졸업장에만 경제학 전공이라 적혀있지 거의 인문·사회 타과 수업을 전공 삼았던 C가 끼어든다. 이런 무식한 형이하학 종자들이. 니들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인류 지적 유산들 탐독하며 시계열로 횡단면으로 여성성에 대해 누벼 봤어? 옆에서 잠자코 안주만 축내던 우리 학번 홍일점 D여사가 그간 오가던 대화를 일축한다. 이것들이 진짜. 개한민국 수컷 문화에 찌든 아색히들이 여성을 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C가 살짝 뒤집기를 시도한다. 세상사는 되려 외부자에게 더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많지. 그에 D의 굳히기 한판. 학교 다닐 때 나보다 분개(分介)도 못했던 것들이. 다 찌그러졋! (재밌는 게, C와 D는 CC였고 지금은 부부다.)

글쎄. 어느 쪽이 진실일까. 아니, 누가 그나마 덜한 구라일까. 이 책을 읽어 보면 막연히나마 판이 짜일지도. 중반까지 생물학 내지 해부학 기조에 가까워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부터는 쓱쓱 잘 읽히니 궁금하실 분들껜 일독을 권할만 한 책이다.

 

P.S.1. 원제는 'The Origin of the World'인데 굳이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이란 선정적인 부제까지 필요했을까. 부당하게 금시시되어 온 여성의 기관과 욕망에 대한 백과사전식·문화인류적 기록이고 논의라는 측면에서 전혀 없는 얘긴 아니다만 '이타적 유전자' 이후 가장 의뭉스런 작명. (여성의 질을 공공연히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하여 여전히 꺼려하는 내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생각일지도)

 

P.S.2. '어떤 남성들, 특히 동성애자들은 두 종류의 절정을 안다고 한다. 음경 자극을 통한 일반적인 것 외에 항문을 통해 전립선을 마사지해서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음경 자극과는 아주 다른 감각이라고 한다. ([버자이너 문화사], '또 다른 오르가슴', 87쪽)' 인간의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측면이다.

 

P.S.3. 페미니스트들 경우 기존의 성과학은 오르가슴이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성 체험에 자연스런 하나의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미리 깔고 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는 엄청난 다양성·파상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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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1-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 섹스 경우 전립선을 통한 오르가슴이 최고라고 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하네요.

풀무 2014-11-27 15:38   좋아요 0 | URL
악! 역시 곰발님은 이미 알고 계셨구나요!
참.. 그러니까 이게 성정체성과는 또 관련없이 오직 그 자극을 얻기 위해 동성애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네요.
그나저나 어떡하죠! 이 아주 다른 감각이란 거 너무 궁금해졌음요! (읭???????)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8 18:38   좋아요 0 | URL
궁금하면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직접 경험을.. ㅋㅋㅋㅋㅋㅋㅋ

풀무 2014-12-28 23:48   좋아요 0 | URL
음. 그냥 손가락이나 기구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당.. (하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알렉산드르 카이다노프스키 외 출연 / 영화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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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운석이 떨어진 이후 방문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뤄준다고 알려져 있는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 국가에서는 그곳을 폐쇄하고,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대가를 받고 그 금단의 장소로 안내해 주는 자를 '스토커'라고 일컫는다. 스토커와 시인, 과학자는 나름의 소명과 목적의식으로 비밀의 방에 접근하는데, 서로 가치관의 충돌로 갈등하는 과정에서 자신 내부의 심연과 대면하는 사색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전에 잠입자 역할을 하던 선대 스토커의 일화가 소개된다. 그는 금지구역 비밀의 방에서 죽은 형제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었으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간절했다고 하나 자신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욕망은 사실 동생이 살아나기를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다는 것. 혹은 금지구역 비밀의 방이라는 실체가 꾸며진 허구이며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결국 그 스토커는 자살했다고 한다.


기나긴 우회와 심리적 방황 뒤에 그들은 비밀의 방에 도달한다. 교수는 누군가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 그 방을 파괴하는 목적을 드러내나 이내 조립하던 폭탄을 물에 던져 버린다. 무엇을 그토록 추구했는지, 무엇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 모른 채 혼란 속에서 그들은 금단의 방에 들어서기를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솔라리스>와 마찬가지로 원작이 따로 있으며 표면적으로 SF적인 설정을 빌리지만, 타르코프스키 영화답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심오하고 다의적인 성찰로 확장된 작품이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생에 있어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한다.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은 인간이 헤쳐나가야 할 실존적 삶의 과정이다. 비밀의 방 자체는 궁극적인 진리 혹은 구원일 수도 있고 구전으로 진화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부재(不在)하는 신(神)에 대한 메타포일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관념적 영화일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인류 보편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매료되어 피상적인 사변으로 그칠지, 가변적인 삼라만상 속에서 치열하게 요동치는 인간 내면과 마주하게 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진실을 외면하고 존엄성을 상실한 채 구원받지 못하는 타인들에 대해 괴로워하며 스토커는 가족의 품에서 미완의 안식을 얻는다. 아내는 카메라를 직시하며 스토커와 결혼하기 전에 그의 원죄와 불행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는 삶이 좋았기에 내린 선택이었노라고 독백한다. 딸은 표도르 츄세프의 욕망에 관련된 시를 읊으며 탁자 위의 컵과 접시들을 응시하고 물건들은 염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실존의 원형 속에 인생유전은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2006년 가을에 남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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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초입, 정확히는 1991년에서 1992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대학로에서 이화로 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길 어귀에 자리했던 비인가 시네마테크 '영화사랑'에서 처음 접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에 매료됐다. [증기롤러와 바이올린]부터 [희생]까지 여덟 편 전작을 감상하고도 이후 그의 영화라면 기회 닿는대로 재감상을 불사했지만 작품 이해에 늘 한계가 있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큰 특징이랄 수 있는 시공간의 전치 즉, 불연속·비선형적인 작품 세계 자체가 난해하기도 했으나 그의 성장부터 작품 활동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 특히 러시아 정교 - 코드에 대한 사전지식 결여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영화들에 조금이라도 더 파고들고자 감독이 직접 쓴 자서전 겸 미학 에세이 [봉인된 시간]을 여러 차례 정독했고 김용규 교수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까지 찾아 읽었으나 읽을 때 뿐, 책을 덮고 나면 나와 영화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음에 허탈하곤 했다. 전자는 작품 자체보다 더 까다로운 저자 직강처럼 와닿았고, 후자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수전 손택이 지적한, 작품을 파편화된 일련의 단위체로 뽑아 임의로 배열하면서 예술의 텍스트를 바꾸고 한정짓는 우를 범했달까. 영화를 텍스트로서 접근, 분석한다며 철학과 신학을 덮어씌워 박제하고 주저앉혀 놓은 형국이었다. 그에 비해서 최근에 잡고 있는 나리만 스카코브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시간과 공간의 미로]는 보다 작품 자체에 천착한, 영화 읽기와 체험하기 양쪽에 모두 충실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나리만 스카코브는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일탈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일곱 편을 각각 꿈(이반의 어린 시절), 환영(안드레이 루블료프), 환상(솔라리스), 기억(거울), 계시(잠입자), 회상(노스텔지아), 망상(희생)의 키워드로 살피고 있다. 그중 오늘 읽은 부분은 5장, '잠입자의 계시' 챕터다. 동구 유럽의 사상과 종교 및 문화에 정통한 학자의 시선을 빌어 작품을 곱씹자니 역시나 기존의 나는 [잠입자]를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지적 토양 안에서 아전인수, 상당 부분 오독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된다. 어찌 보면 실존에 입각하여 나름 당찬, 창의적인 오독이기도 하였으나 과거 리뷰의 정오(正誤) 겸 보완의 의미로 이 포스트에 틈 나는대로 나리만 스카코브의 고견을 보충, 정리해 두기로 한다.

 

- [잠입자]는 무엇보다 인류 문명의 폐허가 된 풍경을 탐사하는 영화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시간성의 묵시록적 종말과 지상 영역의 공간적 변형은 말년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주된 테마로 발전하여 일각에선 그의 마지막 세 작품 [잠입자], [노스텔지아], [희생]을 묵시록 3부작으로 보기도 한다.

 

- 당대 소련의 컬트 SF소설가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원작이지만 스탠리 큐브릭과 아서 찰스 클락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철저한 통제와 간섭 하에 쓰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했다. 초기 시나리오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원작소설 [길가의 피크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나 최종 버전에서는 초반의 발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스토커란 인물도 극적인 변천을 겪은 끝에 원작 소설의 냉소적인 방랑자에서 정신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성스러운 바보에 가까워졌다.

- '구역'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장소, 시간의 경과가 쇠퇴 일로에 접어든, 부패한 공간이다. 후기 산업 사회의 황무지이자 야생 식물의 서식지로서 ​한계상황 속 시간성의 묵시록적 종말을 환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구역'의 척박한 모습은 관찰자의 내면 의식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구역'은 솔라리스 행성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경이롭고 궁극적으로 '이질적인' 장소이다.

 

- 상징주의에 대한 배격은 잘 알려진 타르코프스키 영화 미학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항상 무언가를 의미하고, 문자 그대로 상징하는 반면, 이미지는 결코 충분히 규정되는 법이 없다. 이미지는 기표-기의의 선형적 관계 대신 무한한 가능성에 지배받기 때문이다.' 허나 타르코프스키가 주장하는 상징주의라는 용어는 미학적인 '상징'과 비교해 볼 때 다소간 오해와 혼란을 내포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가 배격한 '상징'이란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 의미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확정된 진술임에 반해, 미학에서의 일반적인 '상징'은 일대다, 다대다 관계로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즉, 타르코프스키가 이미지라고 표현한 것이 진정한 상징의 의미일 수 있다.

 

- [잠입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과 흙, 수풀의 이미지는 천상-지상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물의 유동성이 사물을 포용하여 '구역'의 중력을 극복한다는 환상을 주는 반면, 진흙과 수목은 그것들이 여전히 지구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킨다.

 

- 주인공 스토커에 의해서 인용되는 신약 구절들이 중요한 의미를 띤다. 그의 독백은 명징한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의 세계관은 노장 사상에 기반을 두지만, 그 온순한 비폭력주의 철학에는 환영적인 묵시록의 변형된 테마가 녹아 있다. 스토커는 누가복음 24장 13~18절을 암송하고, 요한 계시록 6장 12~17절의 인용을 몸소 체험하는데, 상호 텍스트적인 두 인용구는 명백히 기독교의 진리를 밝힌다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신약 인용문에는 담론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들의 신학적인 내용은 타르코프스키의 연출 의도, 미학적 전략에 따라 등장하는 영상들에 가려 존재가 무색해진다. 감독이 택한 영화 기법은 인용문의 메시지를 한층 복잡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그것을 뛰어 넘는다. 그 결과 텍스트가 제시되는, 심지어 더 이상 기의와 기표가 아닌 단일한 통합적 실체로서 기호의 총체성을 되살려 재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관객은 당혹스러운 영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의도된 의미론적 '피로'로 인해 신약 인용 시퀸스에서 중요한 것은 인공물과 자연 요소의 '의미'가 아니라 그 '질감'이 된다.

 

- 요한 계시록의 장르는 모종의 지식을 드러내려 애쓰지만 그 텍스트는 그것을 감추려는 구조다. 이 대단히 애매모호한 특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결정적으로 비밀을 드러내는 일은 끝내 보류된다. 판독이 불가능해진 텍스트는 의미의 영역에서 질감의 영역으로 전환되고 화면의 피사체들에 의해 그 물질적인 존재감이 의미론적 잠재성보다 중요해진다. "요한이 우리에게 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요한 계시록의 의도이다. 혹시 환원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 아닐까? 요한 계시록의 요체는 우리의 지식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희망을 남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무지 안에 희망이 있다. 지식은 천박하고 무지는 고귀하다." 타르코프스키가 요한 계시록을 대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관념과 예술적인 이미지 차원에서 이 신성한 텍스트와 다면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미학은 단일한 의미(그가 이해하는 용어의 개념에 따르자면 엄격한 상징주의)의 독재에 맞서 싸워 초상징주의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 요한 계시록 에피소드는 곧바로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인용문인 누가복음의 엠마오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 속 인용문은 고유명사 표현을 누락시켜 성경의 원전에서 벗어난다. 고유명사가 텍스트에서 일종의 말소와 추방을 당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상당 부분 낯설어짐과 동시에 '인식의 실패에 관한 텍스트'임이 강조된다. 사실 고유명사는 영화 [잠입자] 전체에서 철저히 부재한다. 스토커, 작가, 교수, 스토커의 아내, 스토커의 딸... 모두가 별칭으로 불린다. 비밀스런 담론에서 이름, 정의, 기록 등이 모두 제거되고 의미의 엄격한 한계를 벗어나면서 관객은 진리의 현현을 눈앞에서 묵도하고도 진실을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한 성경 속의 두 제자 꼴이 된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충분히 깨어있지 않은 것이다. 카메라는 묻는다. '당신들은 깨어 있는가?'라고.

 

- 누가복음 시퀸스는 실제로 어떤 현상을 새로운 견지에서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 관한 이야기다. 누가복음 인용문에 나타난 바대로 '알아보는' 능력은 정신적인 자질이다. 일상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비정상적 인식인 것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잠입자]의 '구역'은 그저 우리가 사는 장소일 뿐일 수도 있다. 그 속에 비일상적인 현실,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고 본래 이 영역이 진정한 현실이며 일상생활에 매몰된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란 주장이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그저 수많은 종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잠입자]를 통해서 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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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1-2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입자 정말 좋죠 ? 저도 막연히 좋다 좋다 했는데 막상 왜 좋은지는 설명이 불가. 사실 타르콥스키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타르콥스키 영화는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인물들은 이때 항상 중력으로 부터 벗어나기도 하고 말이죠.
이 장면들이 마술 같습니다.

풀무 2014-11-27 15:4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 책의 해석이 너무 맘에 들긴 하지만 사후적인 분석이고.. 볼 때마다 늘 타르코프스키만의 그 시간을 체험하면서 매료되고 압도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