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Why Don't You Play In Hell? (지옥이 뭐가 나빠)(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Cinedigm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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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 시온 감독이 젊을 적 인디영화 시절에 착안했다고 알려진 [지옥이 뭐가 나빠]는 한마디로 천진한 치기와 낭만이 어울어진 영상 광시곡이다. 영화적 활력으로 넘쳐나는 영화에 관한 영화 - 메타무비 - 이면서 소위 '마이너 뽕끼' 작렬, B급 무비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미친 영화'다.

 

야쿠자 보스 무토(쿠니무라 준)를 암살하러 온 반대파 야쿠자들이 되려 무토의 여장부 아내에게 황당하게 도륙되고 홀로 살아 남은 이케가미(츠츠미 신이치)는 피칠갑 난장 속에서 깜찍한 CM송을 곁들여 율동을 펼치는 무토의 딸이자 아역배우 미츠코(하라 나노카)에게 반한다. 한편 아마추어 영화광 히라타(나카지마 타츠야)를 비롯한 '퍽 보머스(Bombers)' 패거리들은 그날도 미친 듯이 온동네를 휘저으며 영화를 찍어대다 이소룡과 닮은 불량배 사사키(사카구치 타크)를 새로운 멤버로 영입하고, 도주중이던 이케가미까지 카메라에 담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출소를 앞둔 아내의 소원대로 어찌 해서든 장성한 딸 미츠코(니카이도 후미) 주연의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려는 보스 무토의 살벌한(?) 후원 하에, 이제 청년이 된 히라타(하세가와 히로키)와 '퍽 보머스' 영화패는 꿈에도 그리던 장편영화를, '세상에 길이 남을 액션 명작'을 찍게 된다. '무토'파와 그 철천지 원수 '이케가미'파의 사지절단 하드고어 실전을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있는 그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인간군상, 그들의 과거와 현재, 욕망과 열정이 '영화'를 구심점으로 한데 엮여 모인다.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복잡한 구도와 얼개를 이루지만 결국 절절한 '영화 사랑'이 작품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그 '사랑'이 [시네마 천국]에서 지향했던 양지바른 주류 클래식 필름들에 비해 온당히 대접받지 못했던 이른바 '싸구려' B급 취향에의 애정이고 헌사이며 찬가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내 경우엔 감상 도중 작품 정서와 주제가 절묘하게 확장되는 체험을 했다. 실존주의 부조리극으로 봐도 무방하리만치 시종 난무하는 억지와 우연, 피와 내장의 잔혹한 카니발이 소노 시온 감독의 엽기 코드 속에서 재기발랄 어울어져 빛을 발하는, 차라리 순수하다고 할만한 이 한 편의 '영화광의, 영화광에 의한, 영화광을 위한' 아수라 판타지를 넋놓고 즐기다 보니 역설적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 있었던 것이다. 망각의 저편에 두고 온, 지금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무엇. 그건 아마도 그 대상이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은 어떤 무모한 갈망, 간절한 발악, 지극한 그리움, 회한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나 자신, 실컷 웃고 보다가 작품 세계를 시적으로 축약했다 할 수 있을 엔딩 주제곡 끝소절에 문득 숙연해진 건 분명코 그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어나 세상에 떨어진 날부터 애초에 있을 곳 따윈 없어. 단지 지옥을 헤쳐 가는 이가 슬픈 기억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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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라
줄스 다신 감독, 라프 발로네 외 출연 / 에이스필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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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스 다신 감독의 1962년작 [페드라]는 계모와 양아들의 금기시된 사랑과 치정의 파국을 그린 흑백 고전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테세우스와 그 아들 히폴리투스, 그리고 히폴리투스에게 구애를 거절당한 계모 페드라의 욕망과 간계, 파멸에 관한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사실 생물학적으론 서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지만 어쨌든 근친상간 금지라는 통념에 위배되는 소재인지라 제작된지 5년이 지나서야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내 경우 1996년 11월 재개봉 때 코아아트홀에서 본 뒤 20년만의 재감상이다.

 


그리스 조선업계 거부 타노스(라프 밸론)는 전처와의 사이에 둔 아들 알렉시스(앤서니 퍼킨스)를 유학 중인 영국에서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의 부탁으로 양아들을 설득하러 영국으로 건너간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와 그녀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 알렉시스는 과거 어색했던 감정을 묻고 삽시간에 사랑에 빠진다. 허나 불꽃같은 정념이 각자 자리로 돌아간 뒤 현실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니, 페드라의 두려움 없는 격정, 질투, 집착도 그에 대한 알렉시스의 추스림과 도피도 모두 좌절되며 비운의 결말을 맞는다.

 


다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20년 전 스크린으로 처음 접했을 땐 마치 신화 속 두 인물을 현세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멜리나 메르쿠리와 안소니 퍼킨스, 두 주연 배우의 연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는데 이번엔 줄스 다신 감독의 연출을 비롯한 촬영, 미술 등 스탭들의 시선과 손길이 제대로 느껴졌다. 히폴리투스와 페드라의 비극을 테마로 한 석화 부조(浮彫) 작품을 찬찬히 훑으며 몽타주한 오프닝 크레딧으로 영화의 원전을 효과적으로 각인시킨 뒤 금단의 선을 넘은 아찔한 사랑과 그 종말의 비감을 차분한 흑백 톤 영상 및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음악으로 훌륭히 재현했다.

 


특히 영화 속 세부적인 내용들을 재삼 확인, 그 뉘앙스를 되새기며 만감이 교차했다. 런던에서 처음 만난 날 페드라가 알렉시스에게 그리스의 바다 제물 전설을 언급하면서 템즈 강변에 던진 결혼 반지의 의미부터 검열 문제로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된 유리창 빗물로 인해 되려 격렬한 화염이 번지듯 기가 막히게 촬영된 두 사람의 정사씬, 타노스의 급전에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가던 부분에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전환되던 야경, 신화 속의 말(馬)을 대체하는 스포츠카를 '지상에서 가장 빠른 관(棺)'에 비유한 암시, 어찌 보면 [졸업]의 전신 격이라 해도 될 만큼 페드라가 로빈슨 부인과 닮아 있으며 알렉시스는 금지된 사랑의 대가를 치룰 뿐 아니라 기성새대의 몰이해와 이기심에 의한 희생양으로도 묘사되고 있다는 점, 페드라와 하녀 안나 사이에 형성되는 심상찮은 공기, 신화에선 페드라가 테세우스에게 거짓을 고함으로써 비극이 잉태되지만 영화에선 페드라가 타노스에게 진실을 폭로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차이 등등.


무엇보다 라스트 10분이 20년 전과 사뭇 다르게 와닿았다. '달리자. 추방당할 땐 음악이 필요해. 바흐를 들으며 호송되는 것만도 영광이지. 잘 있거라 등대여, 바다여. 페드라! 페드라!'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운명을 향해 돌진하던 알렉시스, 대기 중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릴 것만 같았던 앤서니 퍼킨스의 모습만이 뇌리에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엔 눈가리개를 쓰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는 페드라의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 난파된 '페드라호' 선박에 타고 있었던 승무원들의 사망자 명단이 잔인하게 호명되던 병행 교차 편집 장면들이 그렇게 가슴을 휘저어 파고 드는 것이다. 바다 괴물에 의해 박살난 이륜마차는 벼랑으로 추락한 은색 에스턴마틴 자동차로,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의 영락은 그리스 선박왕 타노스의 파산으로, 그의 아들 히폴리투스는 유약하면서 치명적일 만치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알렉시스로, 페드라는 페드라로. 그렇게 영화는 인습과 금기를 뚫고 나간 자리에 남겨진 폐허, 그 몰락의 끝자락을 음울하고도 장중하게 봉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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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넌트 (하숙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 로만 폴란스키 외 출연 / 예중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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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프랑스 거주 기간 동안 연출하고 직접 주연까지 맡은 1976년작 [테넌트]는 한마디로 사람이 과대망상으로 분열되며 침몰하는 과정을 섬뜩하게 표현한 영화다. 1965년작 [혐오], 1968년작 [로즈마리의 아기]와 '아파트 3부작'으로 엮이곤 하는데 감독 자신이 트릴로지를 염두에 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 작품 모두 '대도시 아파트'라는 공간성을 활용, 일관되게 음침한 시선으로 폐소공포와 광장공포가 뒤섞인 악몽적인 기조를 자아내며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소외되어 허물어지는 인물의 심리 양상을 치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성싶다. [혐오]의 경우 런던 배경으로 미혼녀 캐롤(카트린느 드뇌브)의 광기와 그 원인으로 작용한 트라우마를, [로즈마리의 아기]는 뉴욕 중산층 임산부 로즈마리(미아 패로우)가 겪는 일련의 지옥도를 그렸다면 [테넌트]는 프랑스 시민으로 파리에 살고 있는 동구권 출신 변방인이자 제목 그대로 세입자인 중년 독신남 트렐코프스키(로만 폴란스키)의 불안을 쫓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주요 배경을 이룰 파리 시내 노후한 맨션 건물 면면을 왜곡된 비대칭 앵글로 몇 분이고 훑는다. 폴란드계 회사원 트렐코프스키가 관리소를 찾아 빈 방을 문의하고 집주인 무슈 지(멜빈 더글라스)와 지난한 흥정 및 협상 끝에 입주하게 된다.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이전 세입자였던 '슐르'라는 여성은 원인 모를 투신 자살을 시도,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이다. 모두 그녀가 곧 죽을 거라 입을 모으지만 혹시 회복돼 돌아오면 트렐코프스키 입장에선 불리한 조건으로 방을 빼줘야 한다. 생사 여부 확인차 찾은 병실에서 트렐코프스키는 슐르의 오랜 친구라는 스텔라(이자벨 아자니)를 만나게 되고 왠지 불길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의 그녀와 어정쩡한 상태로 브루스 리의 [용쟁호투] 관람 뒤 귀가한 트렐코프스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의 슐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허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정작 그때부터 괴이쩍은 사건·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민감하거나 괴팍한 이웃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렇잖아도 소심한 성격이던 트렐코프스키는 점점 위축되면서 신경쇠약 및 환각에 시달리다 입주민들은 물론 스텔라와 그외 인물들까지 도시 전체가 자신을 짓누르며 죽은 슐르를 대체할 희생양으로 낙점, 죽음으로 몰고가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여장까지 해가면서 불가항력으로 슐르의 페르소나에 몰입하는가 하면 괴물로만 비치는 타인들 틈에 살아남으려 필사적이던 트렐코프스키는 결국 정신줄을 놓고 연거푸 투신 자살을 감행한다. 슐르가 죽어간 병실 18번 침대에 그대로 누워 온통 붕대를 휘감은 트렐코프스키가 자신이 바로 다름 아닌 슐르였다고 믿으면서 카메라를 향해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편의상 '환각'이니 '과대망상', '미쳐간다' 등의 어휘를 썼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모든 현상과 사건 및 행적의 진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 여부를 쉽게 단정지을 수 없도록 불확실하게 연출된 점이야말로 [테넌트]의 미덕이고 로만 폴란스키의 거장다운 면모다. 시신경 자극만으로 축축한 악취까지 화면 밖으로 진동케 만드는 폴란스키의 카메라에 빠져들다 보면 신경증적인 강박과 불안에 삼켜진 트렐코프스키에 그대로 전이되면서 갖은 현실 균열의 징후와 그 인지에서 비롯한 고립감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여전히 내게 있어 로만 폴란스키 최고작은 [로즈마리의 아기]다. 허나 [로즈마리의 아기] 속 로즈마리는 자신을 지탱하는 끈을 놓지 않았고  [혐오]의 캐롤에게선 그 끈의 마디와 매듭이 제시된 데에 반해 [테넌트]의 끈은 밑없는 나락으로 빨려든다. 그에 매달린 트렐코프스키는 영화 진행과 함께 점점 분계선을 넘어 임계치에 달하고, 그 차이가 [테넌트]의 맨션을 도시 문명의 축소판으로, 트렐코프스키란 인물을 난파된 현대인 또는 박해받는 이방인의 표상으로 보이게 한다. 한편으론 폴란스키 본인이 직접 겪은 고충들 - [로즈마리의 아기] 개봉 뒤 사이비 종교 집단의 테러로 인한 아내 피살, 성추행 혐의로 유배되다시피 프랑스로 떠나온 일 - 과 맞물려 자전적 요인에 기인한 압박감과 죄의식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본작을 통해서 로만 폴란스키가 진정 포착하고자 한 건 무슨 거창한 메시지나 세계의 반영이라기보다 진짜 위협과 공포를 마주한 인간의 민낯이다. 원인과 대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오감에 각인되는 그 생생하도록 역겹고도 황홀하기까지 한 불측지연의 통각이 [테넌트]를 수작의 반열에 놓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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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제가 아파트 3부작을 좋아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시각적 공포보다는 정신병리학작 공포가 영화 전체를 사로잡는데 이 맛이 꽤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풀무 2016-03-14 06:10   좋아요 0 | URL
로만 폴란스키의 천재성을 새삼, 재차 확인했달까요. 아파트 삼부작은 정말이지 쫄깃쫄깃합니다.
 
[수입] Macbeth (맥베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Alpha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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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짧고 굵다 할 [맥베스]는 TV용까지 포함, 수십 차례 영화화된 소재다(IMDB 링크 참조). 그중 필견작을 꼽자면 세 버전을 들 수 있다. 나로선 가장 먼저 접한 맥베스 영화로, 원작에 충실하면서 표현주의 양식에 입각하여 욕망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맥베스의 불안 및 공포를 강렬하고도 묵직하게 눌러 담은 오손 웰즈 감독의 흑백 1948년작. 중세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으로 배경을 옮겨 대담하게 잔가지들을 쳐내고 굵고 큰 붓으로 일필휘지 그려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 1957년작 [거미숲의 성]. 가장 어둡고 잔혹한 셰익스피어극으로 악명 높은, 인간 비판을 넘어선 혐오를 드러내며 폭력의 전시로 고어물에 진배 없었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색채 1971년작. 아직 못 본 작품이지만 한 편 더 보태자면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라 할 헝가리 출신 벨라 타르 감독의 색채 1982년작까지. 그리고 개인적인 결론부터 적자면 이번 저스틴 커젤 감독의 색채 2015년작 [맥베스]의 경우 전술한 걸작들과 나란히 놓기가 망설여짐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눈여겨 볼 각색이란 생각이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에서 내게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요소라면 공들인 화면 구성과 색채 감각이다. 셰익스피어극을 영화화할 때 아무리 서사 골격과 내용에 충실하고 그 현란한 수사로 점철된 대사와 방백을 모두 옮긴다 하더라도 원전 이상으로 다층적인 뉘앙스를 품은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영화 작가라면 마땅히 극 해석을 가장 잘 드러내 전달할 표현 양식을 찾아야 하고, 전술한 세 거장 - 오손 웰즈, 구로사와 아키라, 로만 폴란스키 - 버전 모두 그에 성공한 경우다. 이에 저스틴 커젤 감독이 찾은 묘안은 스코틀랜드의 자연을 십분 활용하면서 핏빛과 잿빛을 번갈아 주조로 내세우는 모노톤 화면인 것으로 보인다. 광활하고도 다채로운 풍광과 대비되면서 왜소한 인간과 그 내면의 불안, 혼돈, 공허가 더욱 도드라진다. 화려함보다 강렬함에 방점을 찍은 단색 기조 색감은 광기와 죄책감을 오가며 갈등하는 맥베스의 심경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면서 극 중에 마치 한 편의 광시곡과도 같은 시정을 불어 넣는다. 다만, 절제된 정갈함이나 묵직함과는 동덜어져 보이는 시정의 과잉, 도취가 아쉽다. 온통 붉게 채색되는 유혈낭자 학살 현장과 황폐한 광야의 묘사가 기계적으로 나열되면서 때로 본연의 목표인 잔인한 욕망의 비주얼을 벗어나 이미지 때문에 서사 흐름 및 정서가 훼손되는가 하면, 의당 강조됐어야 할 대목들이 감지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흐트러지는 사단을 빚기도 한다.

 

 

관건은 이렇게 강렬한 영상으로 얼마나 탁월하고 차별화된 비전의 '맥베스'를 보여줬느냐일 것이다. 맹목적인 충심으로 반란을 제압한 스코틀랜드 글래미스의 영주 맥베스(마이클 패스벤더)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과 아내의 부추김으로 자기 암시라도 받은 양 왕권을 향한 망집에 홀려 덩컨 왕(데이빗 듈리스)을 시해한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뒤 폭주하는 야심과 제동을 거는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으면서 옥좌를 지키기 위한 살육을 이어간다. 즉, 2015년 [맥베스] 역시 초라한 개인의 덧없는 욕망과 중독에 관한 드라마, 야욕이 파행을 부르고 그에서 비롯된 가책과 불안, 긴장과 우울이 인간을 잠식하며 자멸로 이끄는 이야기다. 다만 원작 및 고전 각색작들과 비교할 때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맥베스 부부의 자기파괴적 야망, 왕위 찬탈 동기를 권력욕보다는 자식 잃은(후사가 없는) 아비와 어미의 고통, 트라우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원작과 기존 맥베스 영화들은 전투 장면으로 서두를 열었던데 반해 본작은 맥베스 부부가 전쟁 내지 병고나 자연재해로 잃었을 아이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그 작의(作意)를 드러낸다.

 

 

이후 앨론 전투에 임박, 맥베스는 마치 죽은 아이의 투사체라도 되는 양 어린 소년병의 팔에 아대를 감고 얼굴에 전사의 표식을 그려주며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허나 그 소년을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이때부터 맥베스의 무의식이 빚어낸 소년병의 혼령 내지 허상이 그 자신을 시종 따라 붙게 된다. 덩컨 왕 암살을 망설일 때 홀연히 나타난 소년의 환영이 단검을 들고 맥베스를 인도하는가 하면 마지막 맥더프(숀 해리스)와 결전을 벌일 때도 맥베스의 최후를 묵묵히 지켜본다. 즉, 본작은 맥베스가 전쟁통에 아이를 잃은, 상처받은 아버지라는 설정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 맥베스 부부의 야망이 권력에 대한 굶주림보다 상실감에서 비롯됐으며 삶의 의미가 퇴색된 허전함, 막막함을 채우려는 대리 충족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는 감독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허나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지만 대대손손 왕을 낳으리라'는 마녀들 예언이 바쳐진 뱅코우(패디 콘시딘)와 플리언스(로클란 해리스) 부자를 대하는 맥베스의 태도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젖을 먹여봐서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알지만 거사 앞이라면 젖꼭지를 빼고 머리통을 박살낼 것'이라든지 '내게서 여성을 거둬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수심으로 채워달라, 내 안에 들어와 여자의 젖을 담즙과 바꿔달라'는 맥베스 부인(마리옹 꼬띠아르)의 절규에 가까운 독백들이 예전과 다른 고통의 색을 띠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만들기도 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본작의 카메라가 맥베스의 내면 이상으로 그 외연에도 초점을 맞춤으로써 구조적인 권력 동학에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맥베스는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자객의 손을 벗어나 도주했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고 발작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며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범행을 토해낸다. 이후 실성하다시피한 맥베스에 의해 표출되는 온갖 징후는 한 인간을 통째로 집어 삼켜버린 권력의 위세와 자장, 그것이 훑고 지난 자리에 남겨지는 폐허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후 결말부에 이르면 '버넘 숲이 던시네인 성을 향해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 한 패하지 않으며 여자의 몸에서 난 자는 멕베스를 해하지 못한다'는 마녀들의 두 번째 예언이 숲을 타고 오는 화염과 '나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제왕절개로) 나왔다'는 맥더프의 칼날에 의해 실현되고 부질없는 욕망을 끝까지 불태우던 맥베스는 재만 남긴 채 회한에 싸여 스스로 목숨을 내려 놓는다. 암살당한 덩컨의 아들 멜컴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동안에 붉은 안개를 헤치고 등장, 맥베스의 진검을 집어들고 다시 핏빛 광야로 향하는 어린 플리언스의 결기 서린 모습이 아직 예언은 열려있으며 전쟁의 폭력과 고통, 권력 찬탈의 아귀다툼은 끊이지 않고 영겁으로 반복되리란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저스틴 커젤 감독은 새로운 [맥베스]의 비전으로 성찰적인 현대 반전(反戰)영화의 장르성을 내세운 셈이다. 어린 소녀를 더불어 갓난아기까지 안고서 붉은 안개 틈새로 출몰하는 마녀들은 마치 전쟁 사상자들의 혼백처럼 묘사되면서 한편으로 자손이 없는 맥베스 부부의 결핍을 강조하는 극적 장치로도 보여진다. 원전과 달리 공개 화형 당하는 맥더프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해 잔혹한 전쟁의 희생양은 정작 군인들(남성들)이기보다 무고한 여성과 아동들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맥베스의 욕망을 부추겨온 맥베스 부인조차 맥더프 가족을 화형식에 처하는 맥베스에게서 광기에 갇힌 괴물을 목도하고 허물어진다. 매 전투 씬마다 뚜렷한 액션 동선을 지워낸 혼전 양상으로 장르에 도사린 스펙터클의 함정을 지양(止揚)한다. 도입부에서 맥베스가 반역자 맥도널드를 처단하는 앨론 전투는 새벽녘 담청색 주조의 잿빛 안개가 서린 가운데 치러지는 반면 그가 전사하는 최후의 던시네인 결전은 핏빛 석양 속에 펼쳐지면서 색감 변화로 점점 더 진한 피를 흩뿌리는 전쟁의 참상, 그 생리를 형상화한다. 저스틴 커절 감독은 원전의 폭을 줄여가며 가장 명료하면서 동시대적인, 어찌 보면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맥베스'를 내놓았다. 여러 시도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선 그만큼 고전 본유의 매력이 반감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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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연재중이라는 요시다 아카미 원작 만화 1권을 각색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일본 가마쿠라 마을의 해안가와 낡은 집을 주 배경 삼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어머니마저 떠난 이복 자매들이 '가족'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심경'에 집중한 영화다. 사치, 요시노, 치카. 각기 다른 개성의 세 자매는 15년 전 집을 떠나 다른 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생면부지 이복동생 스즈를 처음 만난다. 스즈의 어머니와마저도 갈라선 아버지는 또 다른 세 번째 부인과 살고 있었기에 이제는 계모 슬하에 홀로 남겨진 스즈가 못내 안쓰러운 맏이 사치의 제안으로 네 사람 모두 가마쿠라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이후 카메라는 이들이 서로의 결핍과 허물까지 공유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는 시간, 그 일상의 자취를 지긋이 응시한다. 특히 책임감의 무게로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공통점을 지닌 맏이 사치와 막내 스즈, 두 사람 간의 파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 사이에 완성된 어른이 미숙한 아이에게 가르치고 물려주는 방식의 일방적인 성장은 없다. 서로간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명할 때 함께 변화한다는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주제 의식이 다른 패턴으로 반복, 변주된다.

 

 

 

코우다 가문의 네 자매. 맨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간호사인 맏이 사치(아야세 하루카), 중학생 막내 스즈(히로세 스즈), 은행원인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체육용품점에서 일하는 셋째 치카(카호). 

 

 

 

세 자매가 평생을 산 곳, 이복동생 스즈를 맞이하는 가마쿠라의 낡은 집은 아버지가 부재한 15년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간직한 공간이자 간극을 메워주는 공간이다. 이 집의 역사 역시 중요한 하나의 캐릭터로 작용한다.

 

 

 

아빠는 바보야! ... 엄마도 바보야! ... 함께 언덕에 오른 사치와 스즈가 각각 바다를 향해 외치던 순간 울컥했다. ​추억보다는 그 빈 틈, 결핍의 발견과 공유. 그 감정의 파장을 묵묵히 응시하는 카메라. '그렇게 가족이 된다'.

 

 

내게 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표작 [걸어도 걸어도]가 걸작이었던 이유는 필름 속 인물들 각자 감정선과 호흡에,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에 완급과 굴곡 그리고 음영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한다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평지에 양지 뿐인 탄탄대로에 가깝다. 완곡한 화법과 온화한 시선 와중에 여전히 삶과 죽음이 더불어 맴돌며 일상의 미세한 균열과 갈등에 대한 나름의 심사숙고가 배어 있음에도 그간 필모그래피에서 느껴지던, 사람들 관계망에 걸린 앙금을 섬찟하도록 매섭게 나꿔채는 힘이나 마모된 생의 이면을 불안하게 응시하며 조심스레 내쉬는 깊은 탄식이 없다(나는 그 이유가 감독 본인의 성향 내지 작가주의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원작 만화의 결을 최대한 존중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한다). 허나 얼핏 세상의 선의, 예쁜 겉포장을 집중 조망하듯 보이는 표면적인 서사 행간으로 성장을, 혈연과 가족을, 인생살이 덕목들을 사려깊게 성찰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만의 인장이 감지된다. 그의 작품 세계를 집약·대변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에도 불구, 가작 이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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