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혼혈왕자 (2disc) - 한국어 더빙 수록
데이빗 예이츠 감독, 엠마 왓슨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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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까지는 아기자기 다채로운 잔재미에 보는 맛이 쏠쏠할 뿐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내가 사는 현실과는 괴리된, 그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아동용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원작소설도 읽지 않은 주제에, 당시 거의 동시에 개봉되던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장중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시리즈로 끝맺게 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런 해리 포터의 모험과 내밀한 성장담이 와닿기 시작한 건 [아즈카반의 죄수] 혹은 [불의 잔]부터였던 것 같다. 작품적인 완성도나 자체완결성 여부와는 별도로, 어둠의 흑마술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청소년기를 거치는 해리 포터의 내외적 갈등과 성장통이 제법 생생하게 묘사되면서 볼거리와 감정이입 측면에서 적어도 내겐 전작들을 능가했다. 해리와 볼드모트로 상징되는 선과 악이 충돌하며 혼재하는 상황을 잘 담아냈고, 더구나 내 시각에선 그들이 절대선, 절대악도 아니었기에 어느 식자의 '단순한 세계관' 운운하던 타박은 부당했다.

 

시리즈 본유의 풍미보다는 영국 교육 제도에 대한 경박스런 풍자에 너무 치우친 거 아닌가 싶어 다소 실망스럽던 [불사조 기사단] 이후 몇 년을 잊고 지낸 해리 포터. 극장에서 놓치고 지난 달 케이블로 접한 [혼혈 왕자] 편은 드넓은 습자지 위를 검푸른 잉크가 번져가며 덮는 느낌이었달까. 어둡고 무겁고 탁했다. 영화의 핵심은 해리와 볼드모트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난다는 죽음의 예언에 이어 제목으로도 쓰인 혼혈 왕자(스네이프 교수)라는 인물이 지닌 극중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 볼드모트가 자신의 불멸을 도모하며 영혼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봉인해 놓았다는 '호크룩스'의 정체와 그 파괴를 위한 덤블도어 교수의 희생이다. [불의 잔]부터 감지되던,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라는 선악의 대척점이 무언가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흡사 배트맨과 조커처럼 서로의 순환오류를 같이 얼싸안고 가는 듯한 그 기묘하고 불길한 기운에 대한 단서가 앞으로 펼쳐지게 될 나머지 '호크룩스'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제시될 듯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내겐, 편을 거듭할수록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악의 실체가 존재감을 더하며 점점 더 어둡고 비장하고 입체적이 되어가는 호그와트의 우주가 흥미와 감동을 더해간다. 볼드모트를 위시한 악의 세력은 마치 세상 도처에 드리운 야만과 폭력, 전체주의의 억압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리는 점점 스스로의 정체성과 태생적인 모순을 자각하고 극복해가면서 악을 상징하는 볼드모트와의 내적·외적 투쟁을 벌인다. 매 편마다 해리가 거쳐가는 통과의례, 그 치열한 과정 자체가 곧 한 인간의 성장이고 삶으로 여겨진다. 이제 내겐 [해리 포터] 시리즈의 대미이자 백미라고 입소문 자자한 [죽음의 성물] 두 편을 보는 일만 남았다. 십 년을 이어온 '역사'의 마지막 장이라니 왠지 아쉬워서 보지 않은 채로 덮어두고도 싶지만 언젠가 또 밤새워서라도 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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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딸아이는 영화도 꽤 많이 봤겠지만 책을 최소한 15번을 읽었어요. 어떤 책은 더 읽은 것도 있고요. 저는 한 권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영화에 대한 느낌은 서쪽섬님과 공감이에요~~~.

풀무 2014-12-30 17:58   좋아요 0 | URL
와우.. 따님이 대단하십니다. 전 몇 년 전 병원 장기 입원 때 읽겠다고 [반지의 제왕] 몇 권 들고 갔다가.. 못 읽겠더라구요. 그후 [해리 포터] 시리즈는 더 분량이 많은 것 같아 엄두를 못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