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는 말이라 하면서도 지겨우려 하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옳다고 믿었던 것 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현재 시점으로 사실)을 알아나가는 과정은 괴롭다. 항상 괴로운데 이게 '욕망'과 '쾌락'에 관한 것이면 더 괴롭다.
(2장 욕망에 대하여)
" 여성이 특히 낮은 욕망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는 인식은 자발적 욕망과 반응적 욕망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해서 나오는 듯하다. 이 장의 서두에 인용한 '애스크맨'에서 언급하기도 하는 이 반응적 욕망이 여성들에게는 좀 더 보편적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성의학 센터의 센터장이며 이 분야의 권위자인 로즈메리 바손은 환자들을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20년간 이러한 견해를 제시해왔다. 성적 경험을 자발적으로 갈망하고 기대하는 경험인 자발적 욕망은, 지금 "섹스하고 싶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도 섹스를 할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는 여성에게는 별로 적당하지 않다. 상황이 맞으면 욕망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먼저 흥분을 경험한 뒤에 욕망을 느낀다. 욕망이 먼저가 아니다. 이는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 과정이다. 그러나 상황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서로의 관계, 권력의 동학, 안전과 신뢰, 섹스가 벌어지는 이유, 즐길 수 있는 에로티시즘, 여성이 자신의 몸이나 쾌락과 맺고 있는 관계, 여성이 흥분된다고 생각하는 자극의 존재 여부 등 당시의 성적 맥락이 모두 흥분과 욕망의 선순환을 가동하거나 방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맥락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맥락에 따라 욕망이 보다 자발적으로 느껴지는지, 반응적으로 느껴지는지도 결정된다. ......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순전히 자율적인 성적 욕망은 없다. 욕망이 반응적이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맥락으로 생각하기를 잊을 뿐이다.
부정적인 맥락도 역시 맥락이며, 이것이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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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망이 항상 긴급하고 자발적인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우리가 반응적 욕망도 욕망으로 본다면, 대체로 남성과 관련되어 있는 지배적이고 자발적인 모델에 대한 여성의 '편차'를 비정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96~98)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순전히 자율적인 성적 욕망은 없다."
이 '맥락'에 대한 이야기는 케이트 밀렛도 벌써 했더라.
"성교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진다고 볼 수 없다. 성교는 그 자체로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행위가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 깊이 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교는 문화가 규정하는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응축된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개인적 혹은 인간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성 정치학의 모델로 기능한다." (69, <성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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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맥락을 모른다. 통탄할 노릇이다. 관계가 소통으로 친밀함과 단단함을 쌓아나가는 것이라면 맥락 파악이 꽝인 남자들이 소통을 잘 할 리가 만무하다는 건 뭐 뻔할 뻔자 아니겠는가. 그들이 단순히 멍청해서 맥락 파악이 꽝인가 하면, 이게 또 통탄할 노릇인 게,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떄문에 안 해 온 거라는 사실. 그야말로 유아독존, 되시겠다. 말로도 안 되고 몸으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무지'하다.
여성을 자기비하, 자기반성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 사람이면 (이성애적) 욕망을 느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욕망이 노력으로 되는 것일까? 사랑은? 오랜 시간 의문을 품어왔던 지점이다. 결국 여성이 성적인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건 남성의 '성적 욕망(그것을 욕망이라 치자)'을 충족시키기 위함임을, 어떻게든 섹스에 임하게 하려는 술책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단체로 가스라이팅을 당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래의 인용구들은 특히 많은 기혼여성에게 뼈아프게 들리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관계는 섹스를 통해 다져지게 마련이고 낮은 욕망은 반드시 노력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면(이 노력은 섹스에 수용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 즉 원하지 않더라도 섹스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위한 합당한 '노력'과 섹스에 대한 부당한 강압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성적 중립 상태를 강조하는 것, 즉 적절한 맥락 속에서는 흥분에서 출발하여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모델은 자신에게 성적 행동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을 약화시키지 않는가? 이 모델이 파트너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주지는 않는가?" (104)
"우리는 욕망의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고, 욕망을 활성화하거나 금지하는 맥락과 조건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욕망의 언어를 없애는 것이 도움이 될까? 이것이 그저 이미 문제적인 현상, 즉 여성에게 섹스는 주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늠하여 판단할 문제이지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근원적 필요로서 온전히 남아 있다는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지는 않는가?" (106)
"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슷한 방식으로 살펴보지 않은 채 맥락 및 타인에 대한 반응성을 여성 섹슈얼리티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하면, 남성은 섹스를 원하며 요구하는 존재이고 여성은 자신의 성적이지 않은 관심사를 계산한 후 요구에 응할 수도 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상당히 문제적인 클리셰를 소환하게 된다. 여성이 섹스를 거절하면 뻔뻔한 무시와 강압적인 회유를 너무나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여성이 섹스에 응하면 도덕적 비난을 받는 동시에 보다 고상하다고 여겨지는 목표를 위한 봉사라며 합리화되는 세상에서, 남성 섹슈얼리티는 충동으로서 그저 온전히 남겨둔 채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만을 섹스에 대한 수용적 특성이라는 결정적 측면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 남성은 원하고 밀어붙이며, 여성은 계산하고 결정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는 이미 자신의 욕망은 부속품으로 보는 남성에 의해 완전히 이용당하고 있으며 이용당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젠더권력의 역학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고 여성의 욕망을 반응적으로 보는 관점은 순식간에 악몽 같은 강압의 환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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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방어전'이라는 단어는 흔히 농담에 사용된다. 어느 여성은 남편과 대화를 하려면 섹스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단다. '대화를 하려면'이라는 구절에는 많은 다른 말이 대입될 수 있는데,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웬만하면 무슨 말인지 아실 듯. 섹스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 공기 중에 감도는 불편함의 정도가 여성의 스트레스 지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결혼제도가 섹스를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긴 하지만 제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서 여성이 갖게 되는 '의무감'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같다.
'반응적 욕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하, 했다가 이어지는 이런 구절들에서 번쩍! 여성의 욕망 무지 어렵고 복잡하고 모호하고 그렇지만, 그래서 힘들지만, 남성의 욕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드물다. 남성이면 말할 것도 없겠지. 남성의 욕망에 대해 또 더 찾아봐야겠다. 당신의 욕망은 욕망인가? 남성 또한 사회적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없어서 문제지.ㅠㅠ
북플에 2년전 올린 글이라고 떠서 보다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가져온다. (2년전에 읽었으니 기억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자꾸 읽을 때마다 새로우면 이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
"현재의 토론에서는 욕망 자체가 주축을 이룬다. 미투의 특징은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수동적 역할로만 인정한다는 데 있다. 결국 미투 운동은 남성의 욕망에 대처하고 남성의 욕망을 물리치며 남성의 욕망으로부터 여성을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는 전략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노력에서 여성적인 것 자체의 자리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우리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되었더라도 여성이 섹스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녀 관계의 중심에 전능한 남근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주장하는 고리타분한 욕망의 경제학을 뜯어고쳐야 한다. 남성의 욕망이 우월하므로 여성은 그저 반응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욕망의 경제학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Yes Means Yes' 규정의 해방적 효과가 근본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여기서도 성적 만족을 원하는 공격적이고 힘 있는 남성과 그에게 허락을 하거나 그를 거부하는 여성이라는 도식이 되풀이된다.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논의의 귀결점은 여성을 "훨씬 더 굴종적인 위치로 데려다 놓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정복하기를 원한다고 시인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남성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공개 설명의 등가물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생물학을 들먹이며 남성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여성은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라고 말하는 헛소리는 땅에 묻어버리자. 그 무엇도 그런 이분법이 옳다고 입증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약자의 지위로 추방해버렸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남성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오래된 공포다. 힘 있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두려움이다."
(<힘 있는 여성 -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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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맞다, 나는 너무 모른다, 나도 모르겠고 너도 모르겠어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를 반복한다. 정말 너무 모르지 않나, 나는? 단순히 욕망이 적은 것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으나 또 내가 얼마나,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를 탐구하기는 너무 귀찮단 말이다. 그거 꼭 해야 함?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몰라도 살 수 있고 안 해도 살 수 있다. 왜 노력해야 함? 안 하면 안 됨? 근데 또 슬쩍 궁금하기도 하단 말이지. 이것 참. 그런데... 내가 궁금해한다는 바로 그 사실도 사회적 가스라이팅의 결과에서 온 것이... 아닐까? 평생을 그 가스라이팅 때문에 이런 내가 되었는데? 쾌락은 모두에게 좋으니 무조건적인 탐구를 명한다! 얼씨구, 언제는 알려주지도 않아놓고 이제와서 이러기야??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좀 편안해졌다. 아무튼 지금의 내 생각은 이렇다. '(이성애)(삽입)섹스는 평등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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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써놓고 단발머리님이 쓰신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는데 아 이런! 동질감! 뿜뿜 하고 말았다. (단발머리님의 좋은 글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27166) 에이섹슈얼도 아니고 바이섹슈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성애 욕망의 전차 위에 탑승할 수도 없는 그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나 말고도 있쒀!(짐작은 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로 기혼여성들이 경험하고 그래서 알고 있고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말인데. 나는 처절(?)한 논쟁과 스트레스 속에서 이런 상황을 해결?개척?전환?해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잘 모르니(헷갈림) 해결은 묘연하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없고.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과연 이 상황을 바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또 고민하고. 며칠 전에 산책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끼는 좋겠구나. 그냥 그 자리에서 태어난 대로 살면서 다른 유기체도 품어주고 해가 비치면 해를 쬐고 그늘이 지면 그늘을 쬐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도 맞고 그러다 파헤쳐지면 파헤쳐진 자리에서 또 살아가고 밟혀도 그만 안 밟혀도 그만... 나는 이끼가 되고 싶네. 여러 가지 문제로 골머리 앓을 때마다 나는 이끼가 되고 싶네. 인간은 정말 머리아픈 존재다.
(제목만 거창한 갈팡질팡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뭐 그런 거지...)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성적이지 않은 이유로 섹스를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발기·사정·권력 간의 연관관계 때문에, 실패에 따르는 사회적 처벌 때문에 섹스를 추구한다. 여성에겐 섹스를 해야 할 이유와 이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성에겐 순수한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남성의 성적이지 않은 동기, 그들의 이유, 그들의 이득을 보이지 않게 은폐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채 방치했고, 남성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활성화되고 인정되고 강제된 행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취급한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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