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남편의 아름다움이라고? 이 부분에서 나와 같은 느낌을,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으리라 본다. 남편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 어떤 아름다움을 말하는 건가? 얼마나 어떻게 아름다운지 한번 볼까? 진정 남편의 아름다움이란 말이냐? 반어법이겠지?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남편은 아름답지 않다! 유수의 학자와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했건간에 나는 그렇게 읽었다. ㄱㄴㅁㅅㅋ 라고 할 수 있겠다. 앤 카슨은 어쩌면 의미를 꼬고 또 비꼬아 겉으로는 마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고 이 사람들아 뭐가 아름다운 건지 알기나 하고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이야? 이러면서 남자들을 대차게 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존 키츠라는 옛 시인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어마어마한 양의 송가, 사랑시를 썼다고 한다. 앤 카슨은 존 키츠의 시 등에서 문장들을 가져와 서두에 놓고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 이성애의 결과인 결혼과 별거, 이혼, 이후에 이어지는 전남편과의 관계. 남자는 줄기차게 너를 사랑해, 너만을 사랑해, 지금 내 곁에는 비록 아기와 여자가 있지만 그래도 내 사랑은 너 뿐이야, 이 ㅈㄹ을 한다. 아주 가지가지 골고루도 하지. 앤 카슨이 존 키츠를 가져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허구의 에세이라고 부제가 붙은 글은 에세이의 형식으로도 시의 형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게 규정(?)을 벗어난다. 남자는 규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남자들의 규정, 남자들의 시각, 여자를 대하는 태도. 그러면 여자는 어떤가 하면, 답답하게도 역시 규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별거와 이혼을 거치고 전남편의 ㅈㄹ편지를 받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글쎄올시다. 그 아름다움, 나는 반댈세. 그래서 책 뒤의 옮긴이의 말에도, 책소개글에도, 공감하지 못하겠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라니. 나는 그냥 내 맘대로 읽을란다. 삐딱하게. 


앤 카슨은 "캐나다 출신의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고전학자"라고 한다. 책날개 저자 소개글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글이 그토록 난해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고.전.문.학. 고대 그리스어 전공.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쓴 앤 카슨의 글이 이해가 잘 될 리 만무. 하지만 그래도 읽기는 다 읽었다. 끝까지 읽은 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 암. 자고로 독후감은 일단이 아니라 이단이 백미 아니던가. 어쨌거나 <남편의 아름다움>은 읽었으니 이제 다른 한 권, <빨강의 자서전>이 기다린다. 좀더 오래 기다리라고 해야겠다. <빨강의 자서전>에는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이 등장한다.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젠장. 



+ 존 키츠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 에서 시작한 글이라고. 그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난다.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대가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이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책날개 글에서 발췌. 검색해 찾은 한글판 책에서 조금 가져오면 "늙음이 지금 세대를 쇠약하게 만들 때 / 너는 우리의 고통과 다른 괴로움 속에 남아 / 인간의 친구로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라고 - 이것이 /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전부요, 알아야 할 전부이다.") 

존 키츠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앤 카슨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정녕 같은 것일까? 그.럴.리.가. 나는 끝까지 의심한다. 아니죠, 앤 카슨님?????? 



++ 오늘 아침 북플에서 독서괭님의 글을 읽다가 '존 키츠'의 이름을 보았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인용하셨는데 거기에 키츠의 이름이! 아, 나는 일년 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는데... 그러니까 존 키츠가 책에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 못하는 거 당연한 거죠?ㅠㅠ 심지어 책 뒤의 찾아보기에는 존 키츠가 언급된 곳이 이렇게나 많아...@@ 


너무 신기하다. 어제 이 페이퍼 쓰면서 존 키츠 누구냐, 이러면서 궁시렁대고 오늘 똭 우연하게도(아니 필연인가 @@) 키츠의 이름을 보게 되다니. 얼른 벽돌책을 꺼내와서 해당페이지를 펼치고 괭님이 인용해주신 부분 포함 몇 페이지를 읽었다. 오 놀라워라. 이렇게 재밌을 수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그렇지, 키츠가 얼마나 위대한 천재시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역시 그는 남자였어. 나만 재밌을 수가 없어서 그 부분 몽땅 가져온다. 좀 길지만 읽어보셔유. (며칠 전 은오님 올려주신 아이퐁 기술을 사용했음을 밝힌다. 그런데 오타 작렬이야. 고친다고 눈 좀 아팠다. 그래도 오타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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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것에, (로세티와 그녀의 오빠들이 매우 칭송했던) 존 키츠가 열아홉 살 때 이미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예술가의 길에 뛰어들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키츠가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사실상 그는 자기 발전을 위해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오, 10년 동안 나는 시로 나 자신을 압도하리라. / 그리하여 나 자신의 영혼이 명령했던 / 행위를 할 것이다.' 의미 심장하게도 압도하다는 단어가 암시하는 자기희생 이미지는 여기에서 ‘행위‘로서의 시 쓰기나 ‘영혼 만들기‘와 같이 강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남성의' 개념에 의해 상쇄된다. 물론 키츠는 적절한 겸손과 심지어 굴욕의 필요성도 이해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독학법이 있을까? 동시에 키츠는 자신의 무지조차 모호한 ‘비범함'으로 보며 자신이 사후에 ‘ 영국 시인들‘ 사이에 자리할 것이라는 직관을 주저 없이 선언했다. 이런 자기평가가 ‘허영‘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추호도 없었다. 모드처럼 키츠도 (1816년 리 헌트와 함께) 시 백일장에 참여했으며, 모드처럼 주어진 주제에 대해 빠르고 즐겁게 소네트를 썼고, 소네트에 자신의 깊은 근심을 투사했다. 소네트의 첫 문장은 (모드의 ‘어떤 수녀는 빛나는 하얀 모슬린 옷을 입고'와 대조적이게도) ‘지상의 시는 결코 죽지 않는다'였다. 키츠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시가 모든 곳, 즉 자연의 모든 것에 있듯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건강함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있던 까닭은 적어도 자신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남성적 확신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드 로세티는 자신을 연약하고 허영심만 가득한 여자로 보았고,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고통받은 하인으로 여겼다.
 로세티의 여자 주인공처럼 키츠 또한 터무니없이 이른 나이에 죽었다. 모드는 불안해하는 저자에 의해 불가해하게 ‘전복당했지만, 키츠는 (바이런의 농담이나 셸리의 의심에도 아랑곳없이) 다른 힘이 아니라 유전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적대적인 힘에 쓰러져 죽었다. 모드는 기꺼이 죽었지만 키츠는 소멸과 힘겹게 싸웠고, 한편으로는 ‘편안한 죽음‘을 원하는 고통스러운 소망과도 싸웠다. 키츠가 죽었을 때 친구들은 그의 약혼녀 패니 브론이 보낸 상당수의 편지를 그와 함께 묻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키츠가 썼던 단 한 구절도 없애지 않았다. 로세티는 모드의 일기장을 죽은 저자와 함께 묻는다는 발상을 키츠에게서 얻었을 수도 있다. 동시에 이는 여성 시인이 남성의 은유를 ‘불안과 죄의식‘이라는 여성 이미지로, 얼마나 마조히즘적으로 변형시켰는지 보여준다.
 끝으로, 모드의 마지막 시는 허영심 때문에 ‘그대가 약해질 때를 감지해 그대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덮어줄 어둠의 힘'과 어쩌면 허영심을 잡아줄 가부장적 신이 부여한 십자가의 속박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여기 물 위에 자신의 이름을 쓴 자가 누워 있다‘는 키츠의 신랄한 묘비명은 시인이 자신과 예술, 즉 자신의 이름이 영원하리라는 믿음에 열정적으로 헌신했음을 반어적으로 강조한다. 사실 초기 소네트 「키츠에 대하여」에서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이 묘비명을 정확하게 인용했는데, ‘이 강한 남자'에게 ‘멋진 운명이 / 비옥한 땅에 떨어졌다. 땅에는 가시가 없고, / 그 자신의 데이지만 피어 있으며, 그의 이름은 노래하는 모든 소박한 가슴에 / 참으로 사랑이 흘러나오는 샘이 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묘비에 새겨진 글귀를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키츠도 자신의 정직하지 못한 묘비명을 부정했다. 이 시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넘어서까지 맹렬하고 노련한 열정으로 시를 쓰고자 했던 키츠의 마지막 상태를 기록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살아 있는 손, 지금은 따뜻하고 마음을 다해 
붙잡을 수 있지만, 만일 무덤의 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차가워진다면, 이 손은 그대의 낮을 괴롭힐 것이며 
그대의 꿈꾸는 밤을 얼어붙게 하리니.
그대가 그대 자신의 가슴속 피가 마르기를 원할 정도로 
그리하여 나의 핏줄에 붉은 생명이 다시 흐르기를 
그리고 그대 양심이 평온해지기를 - 보아라, 여기 있다 - 
나는 그것을 그대에게 내민다.
 
모드는 죽어서 수동적으로 천사처럼 예의 바르게 누워 있는 반면(그리고 살아 있는 크리스티나 로세티가 ‘우리 모두를 위해 아멘‘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치기 위해 펜을 집어든 반면, 죽은 존 키츠는 죽기를 거부하고 그를 잊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살아 있는 세계를 향해 분노의 주먹을 휘두른다. 키츠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문장에서 자신이 공손하지 못했다고 상냥하지만 조롱기 섞어 고백했다. ‘나는 항상 어색하게 인사했기‘ 때문에 인생의 따뜻한 방에서 떠나기를 주저한다고 말이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15장 체념의 미학 938~9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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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은 다른 어떤 형태의 담론보다 섹스를 더 잘 말해준다.
현대의 전문가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지배력을 갖게 되는가?는 대수적()질문이다.

당신은 말하곤 했다. "욕망이 두 배면 사랑이고 사랑이 두 배면 광기야."
광기가 두 배면 결혼이지
내가 덧붙였다
그 독설이 황금률을 만들 의도가 없는
무심한 것이었을 때. - P53

그는 거의 슬픔을 몰랐다. 한 신이 그를 이끌었기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하곤 했던 삶과 비슷해 보였던.
나는 세상과 세상 사이에 나 자신을 쓴다.
그가 무엇을 쓰는지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 P155

...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신처는 없다. ...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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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3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하고 들어왔습니다^^
아아!
하고 읽었습니다.

난티나무 2023-02-01 16:4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목이 그렇죠??? ㅎㅎㅎ

잠자냥 2023-01-31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제목 때문에 영 손이 안 가던데! ㅋ 이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난티나무 2023-02-01 16:45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했어요. ㅋㅋㅋ

다락방 2023-02-01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출간 당시 남편의 아름다움이란 제목에 혹해서 읽었는데 도대체 뭔소린지 모르겠어서 읽자마자 팔아버렸더랬습니다. -.-

잠자냥 2023-02-01 08:52   좋아요 0 | URL
아하 참고 …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2-01 11:01   좋아요 0 | URL
잘 기억 안나지만 제가 안좋아하는 글의 형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ㅎㅎ

난티나무 2023-02-01 16:51   좋아요 0 | URL
똑똑한 사람들은 글을 그렇게 쓰고자 하는 것일까요? ^^;;;
저도 낯설고 어렵고 이해 안 가는 글이었지만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은 남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혹은 여성의 글을 써야 한다, 식수와 이리가레가 그렇듯이, 앤 카슨도 이런 명제를 세우고 글을 쓴 것은 아닌가 하고요. 그래,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지, 하고요. ㅎㅎㅎ
평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좀 의아해요. 엘리엇상을 받은 이유도 좀 의심이… 남자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고 생각한다면 남자들이 얼마든지 상을 줄 거 같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입죠.ㅋㅋㅋㅋㅋㅋ 물론 이건 내용 해석에 대한 생각이니 상과는 별 상관 없겠지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