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일이다. 아니 진즉 눈치챘어야 했다. 시행착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겠는가,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법. 모든 것을 알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무슨 말이냐 하면, 옆지기가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를 들고 갔다는 말이다. <가부장제의 창조>라니, 그 어려운 책을?(나만 어렵나 ㅠㅠ) 페미니즘 책이 대체로 처음인 지금?


처음 책상에 책들을 쌓아놓았던 작년 봄을 기억한다. 책을 오랫동안 사지 못했던 터라 그 책들이 무엇이든 한꺼번에 사서, 돈과 시간을 들여 받아서, 책상에 쌓아놓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쌓은 채로 두고 즐겼다. 읽기도 전에 뿌듯한 마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나는 그랬지만 옆지기는 책탑을 보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목이 모두 후덜덜한 페미니즘 책이었다.(사실 지금 보면 그리 '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같은 책 제목들. 여기서 괴물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남편'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쉽게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ㅎㅎ 아무튼 책들을 본 옆지기는 페미니즘이다! 와 함께 겁나는데! 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나중에 내가 이혼하자고 하는 거 아닐까 했다고 털어놓았다. (아니 그러면 뭔가 켕기는 게 있기는 한가 보지?!)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불확실한 생각과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아나가면서 괴로워졌다. 이미 괴로웠는데 더 괴로워! 나만 괴로울 수 없어!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불만이 쌓이고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갉아먹는 짓이니까. 내가 깨어나는 만큼 그도 깨어나야 했다. 공동체를 유지하든 하지 않든 지금 중요한 건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너도 알아야 겠어. 그래야 그동안의 삶이 너에게도 보일 테니까. 세상이 보일 테니까. 각성. 만약 그게 되지 않는다면, 그 땐 어쩔 수 없겠지.


사모으는 책들 중 쉬워 보이는 혹은 부담스럽지 않은 책들을 골라 건넸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책도 공감이 비교적 쉽지 않을까 했다. 의외. 내가 건네는 족족 책들은 다시 돌아왔다. 평소 매사에 비판적이며 어느 정도 냉소를 장착하고 있는 옆지기에게 책들은 거부당했다. 거부. 그는 '남성'이라는 존재를 거부당한다고 느낀 것이다. 너희는 큰 잘못을 저질렀어, 오래전부터 너희는 사악하게 여자들을 짓밟았지, 그런 적 없다고? 그럴 리가, 너의 존재 자체가 이미 특권인 거야, 이미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깊이 가담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듯한 책들을 견디지 못했다. 오케이. 접수.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을 주문해달라길래 얼씨구나 하고 샀다. 그 두 권 중 한 권 역시 거부를 당했고 한 권은 아직 읽기 전이다. 스스로 읽어보겠다고 그 나름 노력해 고른 책이었는데 아쉬웠다. 한동안 책을 권하지 않았다. 초기에 <악어 프로젝트> 같은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에 느꼈던 '가까운 거리'는 평소의 거리로 혹은 더 멀리 벌어졌다. 나는 계속 읽었고 어찌됐든 앞으로 나아갔으나 그는 제자리에서 고민만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사이 그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옹호 발언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 가끔 처절하게 밑으로 가라앉았고 싸움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토론을 나와 격하게 했으며 그 나름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잘' 유지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만 철저히 '혼자서' 고민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과정에서 말하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껏 그것을 외면하고 살았던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꼭 말로 해야 알아? 응, 꼭 말로 해야 알아.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 한 문장이 다양한 사람들의 상황에 전부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겠으나 가족 공동체 안에서만 생각해 볼 때는 확실히 그렇다. 말이 없어지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습관을 부수고 싶었다.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 구성원의 기분을 살피는 오래된 나의 습성은 아무리 의식적으로 떨쳐내려고 해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말이 필요하다. 대화, 일방적이지 않은. 그러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책이었으면 했다. 함께 보는 미디어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것들도 물론 매개체가 된다. 이 매개체를 통한 대화가 실전이라면 책을 매개체로 한 대화는 이론에 대한 것이다.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토론을 통해 생활로 나아갈 수 있다. 옆지기에게 필요한 책은 그런 이론서가 아니었을까. 이유를 찾아가는, 역사를 되짚어보는, 혼란 속에서 잣대를 세워줄 탄탄한 이론서. 솔직히 뭔가 증거와 숫자를 엄청나게 들이대야만 그제야 믿을까 말까 하는 남자들의 속성 때문이라고 후려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얼마간 사실이기도 하고. 어쨌든지간에 <제2의 성> 부분을 읽을 때도 그랬고 <가부장제의 창조> 앞부분을 읽고 읽을 의지가 생긴다는 것도 그렇고, 그의 취향(?) 혹은 선호도(?)를 존중하기로 한다.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을 동지가 한 명 더 생겼다. 나는 지금 <제2의 성> 2권을 들어갈 참인데, 같이 읽는 건 어떠냐고 제안할 참이다. '현대 여성의 삶'이야. 기혼여성에서부터 매춘부와 첩을 거쳐 노년기 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흥미롭지 않겠니? 그 다음에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어 역사를 다진 후에 우에노 지즈코나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으면 좋겠구나. 마리아 미즈 책 아직 없는데. 책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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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03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저는 부딪치는걸 싫어해서 혼자 읽는 편이예요
이 책 왜 읽어?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그냥‘이라고 대답하고 노코멘트,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서로 교집합이 없는 부분은 토론 안해요^^
공감하는 얘기 하는것도 시간이 없는데,,, 그렇다고 그런 책을 읽는 제 생각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
둘다 감정소모를 싫어하는 편 ^^

난티나무 2021-10-04 05:03   좋아요 2 | URL
그러시군요. 저는 교집합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생각해보면 대화같은 대화, 솔직한 대화를 못(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좀 피곤하다는 의식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내뱉고 행동했던 것들, 툭 하면 살 뺴야지 다이어트해야지 말하던 주위의 여자들 이 떠오른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나도 죽을 때까지 어이구 이 똥배 좀 봐,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오늘부턴 저녁을 좀 줄여야 겠어,를 입에 달고 살았을 수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내 몸을 미워하고 부정하고 낙인찍었을 수도 있었다. 70이 넘은 나의 엄마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렇다. 어쩌면 엄마는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알면 무척 억울할 테니까. 


<욕구들>을 함께 읽으며 옆지기와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일상, 끝도 없이 머릿속을 울려대는 세상의 잣대들을 자신에게 들이대며 사는 일상에 대해. '자기 비난의 목소리'. 여자들의 머리 속에서 매일을 지배하는 목소리. 일상이 되어버린 목소리.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결정을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설명과 표현에 애를 먹는다. 모르기 때문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에 나의 말은 너무 성기다. 여자들의 말하기는 아직 멀었다. 훨씬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구석구석 핵심과 맥락을 콕콕 짚어내야 한다. 


거식증 환자였던 캐롤라인 냅의 글에서 옆지기는 거식증을 염두에 두고 읽는 듯했지만 나는 거식증이라는 행위보다 딸과 엄마(부모)의 관계,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인정과 사랑에의 욕구, 여자들을 '조종'하는 세상의 모든 것 들에 더 무게를 두고 생각한다. 거식증은 결과로 나타난 행동 혹은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행동일 뿐이다. 누군가는 손목을 긋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매일 남자를 찾아나서기도 한다고 냅이 말했듯이 이런 행동들은 분명 스스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용기와 타인의 시선을 거리낌없이 받아칠 수 있는 배짱이 생겨야 없어지지 않을까.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옆에 있다면 사정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여정이 너무 길고도 힘들다. <배움의 발견>의 타라가 떠오른다. 현실을 부정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라가 선택했던 행동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직시하기 위해 그 역시 긴 세월이 필요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다른 사람도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가 어째서 지독한 괴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욕구들>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책이었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읽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다. 한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역시 종이책으로 사야 할. 그래 첫번째 읽기라 생각하고 좀은 설렁설렁 읽은 감도 있다. 옆지기는 행간 사이 의미의 간극이 크다며,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때의 기분. 그 기분 이해한다. (나는 냅의 그런 글쓰기 방식이 좋았다. 문장 하나에 멈춰서 오래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잦았는데 옆지기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간극이라고 말한 듯하다.) 

나중에 알라딘 어느 책 리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공부의 주제로 삼을 만한 것이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납득이 가지 않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세미나책> 리뷰 중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724109) 딱 들어맞는 말인 듯해 톡으로 보내주었다. 


다음으로 옆지기와 함께 읽은 책은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이다. <욕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여성의 외모, 꾸밈, 다이어트 등의 이야기가 함께 나온 터라. 평소에도 조금씩 의견을 나누던 소재니 이참에 이런 책도 읽어보자 싶었다. 


* 가벼운 혹은 얇은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씩 읽자고 옆지기가 말했다. 나야 물론 콜. 둘이 읽는 이 모임의 이름을 생각해본다.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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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3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간을 같이 나누는 이와 책까지 나눌 수 있다면, <욕구들> 읽으신 시간이 더욱 오래 기억나실 것 같네요. 계속 진행형이 될 거라고 하시니 부러운 맘 살짝 감추고 응원 합니다^^

난티나무 2021-10-01 00:27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북사랑님 감사합니다~^^
토론이 막 불붙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은 <욕구들>로 그럴 만하지 못했나 봐요, 둘 다. 함께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다음에 더 불붙는 토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봅니다.ㅎㅎㅎ 그래도 같이 읽고 책으로 이야기나누니 그건 정말 좋아요. 헤헷.
 

며칠 전 그림책을 잠깐 찾아보았다. 이웃님(친구님? 서재에서는 이웃인가 친구인가...) 페이퍼에서 처음 보고 블로그 이웃님 글에서 다시 보면서 사고 싶어진 그림책. 그림 그린 작가의 책을 대체로 다 사고 싶어 프랑스어판도 찾아두었더랬다. 한글판 살까 사서 선물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또 이런 이벤트를 한다. 무슨 에코백 귀신이 붙었나 에코백만 보면 사고 싶어 해. 집에 몇 개 있는지 알기나 하냐? 그거 한번씩 다 써보지도 않고 걸어둔 거 알고는 있제? 








에코백 아니면 피크닉 매트 준다는데 이것도 이뻐.@@ 나 전에 굿즈로 하나 받은 거 있는데 크기가 작더라고. (그 땐 파우치도 없었어.) 이것도 작은데 사면 두 개 세뚜세뚜? 에코백이랑 매트랑 다 가질려면 음.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24877&partner=newsletter&MMID=16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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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7 0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굿즈로 영업당합니다 ㅜㅜ

난티나무 2021-09-27 14:20   좋아요 0 | URL
이쁘죠? 아놔 저도 이런 데 영업당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ㅠㅠ

그레이스 2021-09-27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예뻐요
굿즈뿐 아니라 책도 예뻐서 영업당할만 합니다^^

난티나무 2021-09-27 14:21   좋아요 0 | URL
책 실물로 보고 싶어요. 얼른 한 권 사봐야 겠다는…^^;;;;;

책읽는나무 2021-09-27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돗자리 넘나 예쁜데요??
가을에 가을 그림 매트 깔고 가을 만끽할 수 있겠어요^^
에코백도 이쁘고~~^^
저도 책 좀 찾아 봤는데 옛날 그림책 중 몇 권 읽었던 것이 있더라구요.
아...했네요.그동안 그림풍이 많이 바뀌었네요~
색감은 더 따스하게 바뀐 것 같아요.
저도 영업 당해야 하나?고민스럽게 만드는 굿즈들이긴 합니다ㅋㅋㅋ

난티나무 2021-09-27 14:25   좋아요 1 | URL
아아 그림풍이 바뀐 거로군요. 그림도 좋아보이지만 이야기가 더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거 같아서 그저 바람일 뿐…ㅎㅎㅎ 어쨌거나 얼른 한두 권 사봐야 겠다는 마음이 불쑥! 굿즈에 욕심내지 말자는 다짐은 언제나 이렇게 쉽게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걸까요? ㅎㅎㅎ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인원은 2명.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는다. 책 추천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지만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모임 멤버가 나보다 더 페미니즘 초짜이기 때문이다. 책 선정이 고민된다. 작년 말부터 권했던 책들 중 벨 훅스도, 박정훈 기자도, <맨박스>도, 리베카 솔닛도 튕겨내는 (그러니까 얼추 이 책들을 들여다보기는 했다) 그 멤버의 성향으로 미루어보건대, 어떤 책을 고를 것이냐는 모임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짐작했겠지만 그 멤버는 나의 옆지기다. 


시작은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이었다. 내 책상 위에는 이달의 독서모임 도서들이 쌓여있다. <페미니즘의 투쟁> <학교의 슬픔> <제 2의 성> 1권과 2권, 그리고 프랑스어 원서들까지. 아마 제목이 눈길을 끌었을 터, 거기에 더해 며칠 전 나와의 '설전'도 촉매제 역할을 했을 듯 한데, 책을 집어들고 살펴보길래 읽어볼래? 했다. 마침 2부 첫부분에 '성 입문' 챕터가 있다. 여기만 읽어 봐. 그렇게 옆지기는 부분이긴 하지만 <제2의성>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보부아르는 성 입문 맨 앞에 여자의 첫 성적 경험이 일생 동안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똭 기술하고 있다. 옆지기는 첫 페이지를 읽으며 지금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여자들의 입장을 얕게 헤아려보는 경험을 했다. 아마 페미니즘 책들을 읽으면서 지금껏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될 때 내 머릿속에 내리쳤던 번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슷한 무언가를 느낀 듯하다. 그 덕분에 한 챕터를 집중해서 읽었고 몇몇 문장들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나와 독서 성향/습관이 아주 다른 옆지기는 문장이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를 못한다. 눈으로 술술 읽고 이해가 안 되어도 그냥 넘어가는 나와는 정반대. 함께 문장을 짚고 뜻을 유추해보니 좀더 의미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같은 문장이라도 다른 생각으로 읽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옆지기는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말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언제 읽게 될 지는 아직 모르지만. 


다음날 옆지기가 뭐 읽을까 묻는다. 아, 책 선정은 고민이다. <제2의 성>이 옆지기에게 '읽힐' 수 있었던 건 그 부분이 마침 남자들의 주요관심사인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여자들의 욕구가 어떻게 억압되고 지워지는지, 여자들을 지배하는 사회/문화적 기제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에 대해 먼저 아는 게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을 대출해서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어떨까. 나는 읽으면서 너무 당연하게 나의 행동 동생과 친구의 행동 엄마의 행동과 말 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완전히 공감은 못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옆지기는 지금 <욕구들>을 함께 읽고 있다. 

(며칠 전 써두었던 글이다. <욕구들> 다 읽고! 다른 책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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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9-25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난티나무님!!!! 옆지기님 대단한걸요? 일부라도 무려 제2의성을! 첫 책 잘 선정하셔서 이 느낌 쭉 가셨음 좋겠어요~♡♡ 입문용으로 쉽고 술술읽히는<보이지 않는 여자들>살짝 추천드려요. 제 주변 초보자들 3명 중 2명이 읽고 만족. 한 명은 느리지만 아직 읽는 중이예요. 읽어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사례들이 많은게 장점인듯해요😆

난티나무 2021-09-25 17:21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독서모임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ㅎㅎㅎ 책 동반자 꿈꾸었는데 과연 이루어질까요? ㅋ
<보이지 않는 여자들> 안 그래도 읽을 수 있겠는지 한번 훑어보라고 건네줬는데 지금은 안 되겠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뭔가 끌어당기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아직은 아닌 걸로.
책 추천 종종 해주세요 미미님!!!!!^^ 🙏🙏🙏

미미 2021-09-25 17:27   좋아요 1 | URL
초입문자만요ㅋ 제가 늘 난티나무님 읽으신 책들 사 모으는데 어찌 추천을하나요ㅎㅎ😳😆

난티나무 2021-09-25 18:00   좋아요 1 | URL
옴마 미미님~~^^
아 저도 <페미니즘의 투쟁>을 마저 읽어야 겠습니다.^^;;;; 미미님 글 보고 탄력!!! 근데 페이퍼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ㅠㅠ

책읽는나무 2021-09-25 1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아~~멋지십니다.
부부 독서 모임!!!
제가 바라던 이상적인 독서 모임이네요^^
저의 남편은 아예 책 읽는 것을 즐기지 않는지라.....
책 읽고 같이 얘기 나누고...부럽습니다^^
난티나무님도 옆지기님도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09-25 17:58   좋아요 2 | URL
책읽는나무님~^^
제 남편도 그래요. 책 안 읽고요. 아주 가끔 정말 자기가 꽂히는 뭔가가 있는 분야의 책 아니면 안 읽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읽고 책 내용 이야기하는데 새롭고 좋았어요. 지금은 서로의 소통을 위해 페미니즘 책을 읽지만 점점 더 확장되면 좋겠다는 생각 해봅니다. 노년의 2인 공동체를 위해서요.^^
응원 감사히 받아요~!!!
 

키스신, 그래 나도 그거 예전에는 좋아했다. 말랑말랑했고 그런 말랑함을 꿈꾸기도. 실제로 해보니 뭐 별로 좋은 것도 없더만, 왤케 좋다고 막 극성인지 하고 생각하다가, 실제가 엉망(?)이니 환상을 갖는 거지 라고도 생각했다. 쟨 키스를 잘 하더라, 쟨 좀 엉망이던데, 이런 말을 하려면 걔랑 진짜로 해봐야 아는 거잖아. 그리고 잘 하는 건 누가 정하는 기준이냐, 개인마다 다르고  감정 따라 가는 거지. 라고 적다가 아니 그게 스킬도 조금은 중요한 거 아니냐 싶기도 해서 약간 혼란스럽네? 아무튼.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보여주는 키스의 장면들을 보며 혹 하고 은근히 그것(환상)을 즐기며 평까지 하곤 하지. 

지난 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나를 정말 딥하게 빡치게 만들었다. 익준아, 왜 그랬니. 사귈래 라는 말이 뽀뽀할래 라는 말은 아니잖아. 그거 멋있는 거 아니거든. 그동안 니가 지킨 선들은 다 어디 갔니. 예의는 어디 갔니. 결국 멋짐 뿜뿜하던 너의 캐릭터는 그 행동 하나로 이렇게 다 무너져버리는 거니. 그러고도 너는 너의 무너짐을 몰랐겠지. 바보 같은 채송화여. 아무 말도 못하는 채송화여. 채송화의 멋짐도 연애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단 한 명의 '여성' 의사였는데.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슬기로운 연애 생활(그것이 슬기로운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로 나갈 때부터 정이 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시즌 1의 안정원과 장겨울 장면들은 뭐 말 안 해도 가관) 이젠 아주 대놓고 가관이다. 이번 주 마지막 회에서도 역시 빡침은 계속되었다. 정말 몇십 년을 변하지 않는 클리셰의 찬란함이냐. 온갖 세상의 망설임은 다 제가 가진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캐릭터인 양석형은 어째서 키스신 장면에서만 망설임도 없이 동의도 없이 그냥 직진인 것이냐. 그걸 또 좋다고 받아주는 너 추민하, 너는 뭐냐. 하. 이제 정말 드라마 키스신 못 봐주겠다. 환타지 그만 좀 심어. 여자들아, 제발 그냥 다 받아주지 마. 

이쯤에서 예전에 본 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 웬일로 그 장면에서는 그동안의 클리셰를 한방에 깨버리는 남주의 대사가 나왔다. "뽀뽀해도 돼?"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며 이제 우리 나라 드라마 키스신의 클리셰는 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만세! 드디어! 그.런.데.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는 여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음 말은. "다음부터는 안 물어봐도 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 나는 너무 성급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또다른 드라마의 장면 하나. 여주가 먼저 남주에게 달려(?)들어 무지막지하게 키스를 퍼붓는다. 분위기상 분명 여자가 '먼저', '자발적으로' 행동했고 (아 물론 예의바르게 남주를 동의시켰지) 키스신도 그렇게 흘러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남주가 거기 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 것 같다. 왠지 '남자라면' 여자보다 더 박력있어야 해,라는 강박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짐작. 

가져오자면 한없이 줄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은 드라마 영화의 장면들, 이제 그만 좀 하자. 여자 남자들아 연애해라, 연애 그거 좋은 거야, 결혼도 해라, 여자는 이렇게 남자는 저렇게 행동해라, 이런 거 이런 식으로 같잖게 머리에 심어대지 마라. 안 보면 그만이라고? 안 본다고 주입당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텔레비전만 있던 시대가 아니다. 아이들은 영상 세대다.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영상의 홍수 속에 사는 세대다. 제발,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저거 아니야, 저러면 안 되는 거야, 나쁜 노므 셰키, 키스든 섹스든 둘이 하는 거지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저렇게 다 받아주면 안 돼, 저건 사랑이 아니야, 버럭버럭 부글부글 욕쟁이 엄마가 되는 일 좀 없어지면 좋겠다. 

그러려면 다르게 써야 하고 다르게 연출해야 한다. 여성 작가 여성 감독이라고 해서 모두가 "깨인"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작가 더 많은 감독이 여성이어야 한다.(요즘 많아져서 즐겁지만 많이 소비되는가,에 있어서는...) 연애가 목적인 드라마 영화 말고 연애가 소재이더라도 환상을 심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영화가 필요하다. 좀더 나아가서 어떻게 키스하는 것이 좋은지, 어떻게 섹스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면 좋겠다. 이런 교육은 왜 없는지 통탄할 노릇이다. 전부 미디어로 보고 배워! 말도 못 꺼내게 해! 언제까지 이럴 건가. 욕이라도 많이 해야 한다. 내가 좋은 극본을 쓸 능력은 안 되니까, 이렇게라도 욕을 하고 지적질을 한다. 문제는 지적질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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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9-2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다 보진 않았지만ㅋㅋ(슬의 집안일할 때 켜둬요)ㅋㅋ스포당했네요.. ㅋㅋㅋ 익준아... 그리고 뭔말인지 알겄어여ㅋㅋㅋㅋ 저도 이 연출자들 드라마는 응답하라 때부터 (그게 컨셉인듯 하지만) 진짜 짝 못지어줘서 환장했나 이러면서 보긴해요. 보긴본다ㅋㅋ

난티나무 2021-09-29 15:13   좋아요 0 | URL
악 스포!! 근데 뭐 시작부터 이미 예견된 결말 아니었겠습니까.ㅠㅠ
맞아요 응답 시리즈도 그랬죠. 제가 버럭버럭하니까 옆지기가 그러더라고요. 응답 첫시작이 이미 결혼한 두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원래 짝짓기였다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