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그러니까 어언 30여 년 만에, 고요한 마음으로 책 두 권을 읽었다. 쉽게 말하면 백수의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는 얘기. 두 권의 책을 두 도서관에서 각각 빌리는 행위조차도 백수스러웠다.
대학 교수의 안식년 1년 중 6개월 간의 런던생활기. 이국 땅에서 홀로 밥 하고, 빨래하고, 음악 듣고, 책 읽으며 써내려간 일기 형식의 글.
작가 김보통.
2009년 입사
2013년 퇴사
2013년 만화가 전업
2015년 수필가 겸업
2017년 아직 불행하지 않음
'회사를 벗어나 맞이했던 막연함에 대한 이야기.'
위의 두 책을 오락가락하면서 읽으니 오전에는 교수가 되고, 오후에는 백수가 되는 묘한 기분에 젖었다. 책은 그냥 읽으면 되는데 왜 꼭 자신을 이입해서 읽게 되는 건지....이 또한 백수스럽다. 백수가 될 날이 머지 않아서일 거다. 이 두 책을 억지로 연관시켜 이야기하기는 좀 너무 아주 억지스럽다. 다만, 백수의 심정으로 읽힌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그러나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안락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 대한 유혹,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제를 회피하거나 적당히 넘어가고 싶은 유혹, 혹은 온건하고 균형 잡힌 사람 소리 들으면서 살고 싶은 유혹, 나의 지식과 인맥 등에 적당히 기대서 명성이나 쌓고 미시권력이나 누리며 살다 가고 싶은 유혹에 늘 시달리면서 산다.(중략)
썩지 않으면서 이대로 조금씩만 더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 <내면 산책자의 시간>에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막바로 취업한 나는 사실 백수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퇴사하고 사회에 방치되었을 때의 느낌이란,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자격 미달의 불량품이 된 것만 같았다.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고 신경쓰지 않았다. 알아서 어디론가 사라져줬으면 싶은 눈길로 바라볼 뿐.
마치 붕어똥이 된 기분이었다. 밀려나온 똥 주제에 쉽게 떨어지지 않고 달랑달랑 붙어 있다가, 결국 떨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꼴 보기 싫게 어항 속을 둥둥 떠다니는 붕어똥.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에서
쓰다보니 이제 정리가 된다. <내면 산책자의 시간>은 두뇌형 백수,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는 실존형 백수. 나는 물론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