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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거의 40여 년 만에 이 책을 완독했다. 물론 끝까지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읽었다는 것이지 그 내용을 전부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차원의 완독이다.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김남조 시인이 읽어주신 한 문장이 가슴에 와닿아 인상 깊었는데 바로 이 문장이다. 책을 펼치면 바로 나오는 헌사.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감성에 젖어 읽어주신 이 한 문장 때문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손에 집어들었으나....두어 쪽 읽고는 어느 후배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지독히도 싫어했던 물리와 지구과학. 문이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과학과목과 사회과목의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 본고사 국영수에 집중하다보니 자신없는 과목은 과감히 손을 놓고 찍기로 작정했는데 그 과목이 물리였다.12~13문제 가량 출제되는 물리는 붙잡고 있어야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으로는 그때 치른 예비고사에서 내가 찍은 답은 정답을 교묘히 피해갔고 문제에 문제가 있어서 모두 정답 처리했던 한 문제만 맞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짱 한번 제대로 부려본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도 못한 알맹이 없는 시절이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 기운조차 없던 삭막한 시절이었다.
이런 나에 비해 딸아이는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 한다. 놀라웠다. 대학때도 못 읽었던 책을 고등학생이 읽다니... 그러니 더 이상 미뤄놓아선 안 되겠다 싶었다. 마침 친구가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끝까지 왔다. 별 하나를 발견한 심정이 되었다고나 할까.
목성, 화성, 금성...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는 행위는 주제넘는 짓이겠다. 읽기에도 벅찼으니까. 그나마 좀 이해가능하고 관심이 갔던 부분은 뇌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현재 뇌의 구조에서 우리는 진화의 단계들을 미루어 알아볼 수 있다.'(549쪽)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맥린에 의하면 뇌의 고차원적인 기능들이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진화했다고 한다.(550쪽)
1. R - 영역: 인간이 아직 파충류였던 시기에 발달, 인간의 공격적 행위, 정형화된 의식 행위, 자기 세력권의 방어, 계층적 위계 질서의 유지 등을 관장.
2. 변연계: 포유류 시기에 생긴 뇌. 인간의 기분, 감정, 걱정 등의 정서적 반응과 행동 그리고 자녀 보호의 본능을 지시하고 제어.
3. 대뇌 피질: 수백만 년 전 인간이 영장류였던 시기에 형성. 아이디어의 창출과 영감의 발현. 읽기와 쓰기, 수학적 추론과 작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적 삶을 가능케 하는 부위. 문명은 대뇌 피질의 산물.
재밌는 것은, 우리 각자의 두개골 내부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악어의 두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은 살상용 핵무기를 자체 조달하고 비축하는 데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구축해 놓고 있으며, 그 논리의 당위성을 만방에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항시 가상 적국의 문화적 하자를 지적하고 그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비이성적 행태를 상정하여 사람이 아직 갖고 있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데 유효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자국민을 파충류적 행동 기제로 몰고 가고는 한다. -650쪽
오로지 점수에만 매달리던 고등학교 시절은 말하자면 '파충류적 행동 기제'인 R - 영역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칼 세이건의 사유는 깊고도 넓다. 그중 한 부분.
사람은 대지의 자녀인 동시에 하늘의 자녀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 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없는 적개심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천성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자식도 아낀다.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노력하고 지적인 것을 향한 물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존과 번성을 확실히 약속할 도구요 방편이 될 것이다. 못된 습성과 좋은 천성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미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지구에 고착돼 있다거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마음이 지구의 어느 한 지역에만 묶여 있다면 결국 저 못된 습성이 사랑의 마음과 이성의 예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광막한 코스모스의 바다 속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외계 문명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다. 우리와 같은 문명의 운명은 결국 화해할 줄 모르는 증오심 때문에 자기 파괴의 몰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 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632쪽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모습을 우주적인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지구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과학에 무지한 내가 이 책에 대해 뭔가를 쓴다는 건, 결국 인용으로 시작해서 인용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급하게 읽은 거 하나라도 기억에 남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고. 그중 또 하나.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 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374쪽
여기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대신에 현대의 학자와 과학자나 정치가들로 바꾸고 과학을 학문이나 정치 따위로 바꾸면 어떨까. 노예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 같은 어휘로 바꾸고. 그들을 포함한 우리들 대부분은 비겁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죽기 바로 전에 썼다는 뉴턴의 글이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161쪽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어려워했던 과학자들의 이런 글을 읽으며 과학을 접했더라면 과학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을 터인데...하는 아쉬움.
완독했으니 책장에 떡하니 꽂아도 되겠다, 이제.
* 내가 읽은 책은 2020년 3월 15일에 출간된 특별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