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비고사 세대다. 커트라인이라는 게 있어서 지역별 합격, 불합격 점수가 분명했었다. 보통 340점 만점에 200점은 넘어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커트라인이라 부르는 점수였다. 당연 지방의 커트라인은 20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학하고자 하는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고사를 치르고서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예비고사를 치르고나서 2년 후, 학력고사라고 불리우는 시험이 예비고사를 대체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수능이 생겨났다. 대학입시와는 관계없는 시절을 보낼 때라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교직에 들어온 이후 몇 번인가 대학입학관련 시험에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2010년 수능감독으로, 그러니까 어제도 그 몇 번째의 시험감독으로 차출되었는데 모처럼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감히)수험생 못지않은 긴장감을 풀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시험 감독관이라고 말할 수있다. 감독을 해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감독 잘 못하면 일년치 재수 비용까지 물 수도 있다는 사전 교육까지 받고나면 이건 스릴만점의 초특급 영화 한 편 보는 것 이상이라고나 할까. 흠,온몸으로 보는 영화가 있다면 모를까....과장이 좀 심했다. 

하여튼 초긴장 무료함(이 말 뜻을 아실런지)의 감독을 모두 마치고나니 이미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학교 교문밖 도로엔 학부모의 차량들로  빈 틈이 없었고, 학부모들이 초조하게 서성이며 자녀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시험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며 세계다. 그것도 교묘하게 진화하는 세계다.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로, 다시 수능으로 진화하면서 확실하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세계다. 인간이 만든 제도에 옴짝달싹 못하고 매어있는 꼴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한심한 세계임에 틀림없는데 감히 이 세계를 이탈할 꿈을 꾸지 못한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예비고사 시절의 영어 문제와 지금의 영어 문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원시성에 가까운 예비고사를 치렀던 세대에겐 지금의 문제 수준이 가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학습과 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고도로 진화되고 발달된 학습 덕택에 시험 수준이 상당히 높은 단계에 진입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몇 년에 한번씩 수능 감독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수준이 한없이 높아진 문제에 잠시 넋이 빠져버린다. 이래도 되는가?하고. 시험이라는 이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이고 몰인간적인 거대한 권력 앞에 그저 눈치나 보며 하나라도 더 정답을 맞추기위해 온갖 굴레와 비굴함을 언제까지나 참고 견뎌내야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그것도 자자손손 대대로. 언제까지나. 

참으로 재미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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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치 공중정원 이야기- 최선생님의 장례를 끝내고

1. 리가 법수치를 알게 된 것은 이미 그곳에 둥지를 튼 최영철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십여 년 전 최선생님과 남편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며 서로 친하게 지내던 중 법수치를 놀러가게 되었고, 우연히 땅 매물이 나와서 한 귀퉁이씩을 맡을 때 남편을 불러준 덕분으로 드디어는 법수치 주민이 되었다. 그때가 2003년도였고 법수치 상류에 자리 잡은 대지의 주인은 우리까지 네 집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작은 오두막집을 한 채씩 지었다. 와중에 하천가에 나있던 진입로는 태풍으로 인한 유실로 우리 단지는 졸지에 공중정원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아름다운 공중공원은 그래서 최선생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이 되었다. 비록 공중정원까지 이르는 길이 험하고 고달프지만(사실은 걸어서 5분 거리에 불과하다) 이따금 하루나 이틀씩 묵고 오면 우리 가족은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곳엔 늘 우리를 반겨주는 최선생님과 부인인 영미씨가 있다. 애초 이곳 법수치는 최선생님 내외가, 당뇨병을 앓고 있던 최선생님의 투병을 위해 요양 차 왔다가 아예 자리 잡은 곳이다.  


   올 추석에도 우리 가족은 법수치로 향했다. 대부도에 있는 단골-일 년에 한두 번 다니는 것도 단골이라면- 농장에 가서 이미 끝물이 되어버린 포도를 겨우 구입하고, 소래포구에서 꽃게를 좀 사는 둥 모처럼 준비다운 준비를 마치고 추석 연휴 첫날인 10월 2일 강원도를 향해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는 대신 양평, 퇴촌, 홍천을 지나는 국도를 택해 긴 여정에 들어갔다. 홍천에서는 오랜만에 시장에 들러 메밀전병(정확한 이름은 모름)을 사먹기도 했다. 홍천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만들고 있는 메밀전병은 대부분 이미 예약을 받고 만드는 중이라서 우리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나마 인기 없어 보이는 좌판에서 삼천 원을 주고 세 개를 간신히 살 수 있었다. 먹는 것에 남달리 관심이 없는 편이라 이 메밀전병의 내력이나 요리법이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하여튼 맛은 별미였다. 예약 판매를 하는 다른 좌판의 메밀전병의 맛이 못내 궁금했다.

   드디어 설악산. 남편 학교의 원어민 교사인 리처드도 함께 갈 계획이었는데 친구들과 어딜 간다나 어쩐다나. 덕분에 리처드를 배려한 설악산 구경을 우리끼리 오붓하게 즐기게 되었다. 언제 와봤던가 싶은 비선대에 오르니 옛 생각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웬 수학여행을 이곳으로만 왔는지....때론 이런 추억 따위가 거추장스러워 차라리 미지의 곳에 더 끌리곤 한다. 늘 젊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행여 기다릴까봐 간다는 전화 한 통 없이 천천히 느지막하게 가다보니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무엽이네(최선생님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엽이네는 늘 한결같고 변함없는 우정 같은 게 깔려있어서 언제 어느 때에 가도 과하지 않는 반가움과 살가움이 있었다.

 

2. 저녁밥을 해주려고 압력솥을 닦는 영미씨(무엽엄마)를 말렸다.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선선히 밥 준비를 해주는 게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규칙이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윗동네에 있는 우리 오두막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의 즐거움이기도하고 법수치에 내려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늘 안색부터 살피게 되는 최선생님도 기력이나 표정이 지난 번 보다 더 좋아보였다. 그간 다녀간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에도 평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묻어났다. 비록 30분이 채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지난여름 이후 2개월만의 회포는 풀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두워지기 시작한 산길을 나서려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최선생님은 우리에게 자고 가라고 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 있으면 저녁밥을 해결하고 길 없는 산길을 걷는 수고도 아낄 수 있을 텐데, 하고. 최선생님 내외의 친절을 물리치고 꾸역꾸역 산길을 오르면서도 마음만은 즐거웠다.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3. 10월 3일. 추석날이다. 때가 이른지 -다른 지역은 이미 밤 수확이 끝났건만- 바닥에 떨어진 밤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새벽의 달콤한 잠을 떨쳐내고, 찬 개울물을 건너는 수고를 무릅쓰고, 수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밤을 찾아 열심히 밤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토실토실한 알밤이 우수수 떨어지려면 한 열흘은 더 있어야 하나봐, 하며 터덜터덜 오두막으로 돌아오니 받지 못한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영미씨였다.

   새벽 4시 넘어 최선생님이 쓰러져서 지금은 강릉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젯밤, “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라던 말씀이 불과 몇 시간 전이건만 이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오전 10시 30분부터 11시, 오후 7시 30분부터 8시까지. 하루 두 차례의 중환자실 면회시간. 오전엔 우리 가족끼리, 오후엔 펜션<산골여행> 주인내외와 함께 중환자실을 드나들었다.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들이 암담하고 잔인했다. 보호자 대기실의 불편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울 영미씨를 남겨놓고 돌아오는 발길이 한없이 무거웠다. 눈물과 절망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한 영미씨를 지켜보는 일이 무엇보다 눈물겹고 힘들었다. 처절하고 가슴이 아팠다. 옆에 남아서 위로를 해주고 눈물이라도 함께 흘려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4. 10월 4일. 오전 면회시간에 맞춰 오두막을 나서서 간신히 10시 30분에 병원에 도착했다. 우리 공중정원 단지의 한 집인 큰 집-연배가 제일 높다- 내외와 막내인 용진씨, 그리고 지인 한 분이 와 계셨다. 이미 어제부터 가족을 부르라는 병원 측의 말이 있어서 다들 각오는 하고 있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몇 차례의 심각한 고비가 있어 왔기에 이런 상황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만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들 있었다.

   면회를 끝내고는, 새벽부터 인천에서 달려온 분들과 함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주문진으로 갔다. 곰치국이라는 것을 먹었다. 이곳이 곰치국으로 유명한지 어떤지, 곰치국에 들어간 곰치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치국에 곰치가 들어간 국이다, 그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별식을 먹는 기분이 묘했다.

   해변 도로 끝머리에 있는 아들바위에서 잠시 대책회의를 가진 후 다시 큰 집 일행은 일행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인천을 향해 출발했다. 평소에 영미씨와 형님 아우하며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큰 집 형님이 혹시라도 남아서 영미씨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내외의 희망사항이었다.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경. 최선생님이 7시에 운명했다는 전화가 왔다. 시신은 인천으로 모시기로 했단다. 마침 막내인 용진씨가 병원에 근무하는 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정 무렵, 남편은 시신을 모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갔고 다음날 새벽 5시가 좀 안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5. 10월 5일. 며칠 전 마트에서 검정색 블라우스를 한 벌 샀었다. 며칠 후 출근하려고 입어보니 행색이 우울하고 초라해보였다. 문제가 있는 옷차림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천상 초상집이나 입고 갈 옷이네.” 중얼거렸는데 그 옷을 입게 될 줄이야.

   오후 내내 장례식장에서 일을 거들었다. <산골여행>주인 내외는 자청하여 이번 장례의 상주 역할을 도맡아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남편과 막내 용진씨도 유가족이 되어 상주 역할을 적극 거들었다. 평소 왕래가 없던 고인의 친족들은 그들을 배제한 장례에 잠시 화를 내기도 했으나, 고마움을 표할 줄 모르는 그네들의 무신경만 드러낼 뿐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큰 집에서는 보름을 남긴 아들 결혼식 때문에 처음부터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완고해도, <산골여행>주인 내외가 오지 말라고 말렸어도 끝내 얼굴 한번 내밀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후 5시에 입관식이 있었다. 염하는 전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켜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본 화장터의 풍경을 떠올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은 그냥 물질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다른 감정을 잠재웠다. 

 

   남편은 학교에 연락하여 연가를 내고는 계속 남아서 다음 날 발인에 참석했고 나는 이날 밤 집으로 돌아왔다.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6. 최선생님이 불러 모아 만들어진 우리 네 집의 공중정원이 최선생님의 부재로 인해 말 그대로 공중정원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땅이 어디 가랴. 머지않아 진입로가 들어설 테고, 그때를 위해 부지런히 나무부터 심어나가야겠다. 먼저 법수치 계곡 한 모퉁이에 최선생님을 위해 작은 돌탑을 쌓으리라.

   최영철. 1956년생. 향년 53세. 15년간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뇌출혈로 운명함. 감성이 풍부한 아름다운 분이었으며 사람을 좋아하여 많은 친구를 남김.




                                                                 (2009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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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여행 2011-12-2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나네요
최근 너무 많은 눈이 내려서 지금도 법수치는 많은 눈이 쌓여
설국땅입니다 얼음이 계곡의 돌사이로 번져가고 산골짜기의 골사이로
흐르던 물줄기는 얼어 있지만 얼음 바닥 밑으로 살살 흐르는 물살은
소낙비마냥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내년 봄의 화사함을 예시 하고있는 듯합니다
전 선생님 어느 한 순간의 선택에서 마주치면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뤄졌으며
무엽이네 가족으로 인하여 우리라는 가족같은 동아리가 결속되어 저희는 지금도 고맙고
고마운 분으로 가슴속에 아련히 자리메김 되어있습니다
전 선생님 제가 몇년을 먼저 세상에 인사하게 되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진리는 꽉 막힌 우둔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진솔한 글을 읽으면서 제가 느끼지 못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세삼스럽게 일께워 주신점 고맙습니다 그런데
소심한 저의 생각으로 우리가 허심탄하게 이야기 해야 할 문제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인천 큰집의 행동이 조금은 섭섭 하였음은 충분이 이해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봤으면 합니다 우리 서로 이해하고 함께 참석
하지못한 큰집은 얼마나 애석하고 애통해 했는지도 이해 해봐야 할것같습니다
미신을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 이름을 막연하게 부르기 쉽고 예쁜이름으로 지으려 하지만
손주녀석들은 작명소에 부탁하여 좀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하물며 자식 결혼식을 앞두고는 상가집 가는것을 금하여 액운을 막는다면 저 또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자그마한 생각의 방향으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면 너무 큰 불행이 아닐까요
저의 짧고 미숙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마음을 다치지나 않으련지 걱정되네요
환하게 웃는 모습 방실거리는 유진이의 해맑은 얼굴 엄하면서도 항상 진지하고
품격이 갖춰진 전선생님의 모습 항상 존경합니다
부디 우리 함께 화합하고 단결된 멋진 가족의 동아리로서 먼 훗날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nama 2011-12-21 11: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는지요. 반갑습니다.
서운한 감정...그래서 남인가 봅니다.
이름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희 4남매의 이름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작명소에 가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팔자가 이름에 좌우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이름값만도 못한 인생들이라 그런지 그런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큰 집 얘기도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지금 그분들은 미국에서 잘 지내시는 지 좀 궁금하긴합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게, 아무래도 법수치에서 마음의 수양을 더 쌓아야겠습니다.
겨울 한 철을 법수치에서 보낼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늘 아침 8시 20분 부터 시작된 중학교 3학년 시학력평가는 오후 4시 30분에 5교시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시험과목은 국, 수, 영, 사, 과. 예종이 울리면 교사들은10분간 답안지와 시험지를 배부하고, 학생들이 치르는 실제 시험 시간은 70분씩이다. 가히 수능에 버금가는 중학생용 버전이라고나 할까. 워낙 이런 시험은 돌발적이고 연중행사용이라 한번 심하게 눈 흘기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긴하다.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오늘 시험은 너무나도 돌발적이라서 시험을 끝내고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방학을 앞두고 방학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그때는 말 한마디 없었다.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학이 되어 학교에 출근하고 교직원 조회에 들어가보니 바로 다음 날이 시험날이었다. 그것도 진짜 성취도 평가가 아니라 진짜 전국실시 성취도 평가를 대비한 모의 학력평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험의 실제 수준은 어떤가. 이런 시험을 대비하여 시험 때만 되면 아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영어 시험에서는 늘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고 생각해라. 너희들이 그 많은 단어를 다 알겠느냐. 때에 따라 이 말은 교내 시험을 치를 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단어가 들어간 문제를 출제할 경우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과 같은 시험에서는 평소에 내가 하는 이런 말들 가지고서는 약발이 서지 않는다. 차라리 솔직해지는 편이 낫다. 교과서는 별로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너희가 알아서 사교육으로 실력을 끌어 올려라, 라고.  

전교 1~2등을 다투는 녀석에게 물어본다. 시험 볼 만하니? 네, 그저...괜히 물어봤다. 뻔한 대답인데.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대답은 커녕 반응도 없기에 한번 예의상 물어봤을 뿐이다. 선두 그룹에 있는 몇 명에게는 실력을 테스트해 볼 기회가 되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별 의미도 없는 그저 시키는대로 치러야 하는 귀찮고 성가신 시험일 뿐이다. 교육도 1%만을 위한 교육이 되어 가는가.  

마지막 5교시, 교실을 나서려는데  비몽사몽을 오가며 시험을 치르던 앞자리의 한 남학생이 옆 자리의 친구에게 한 마디 툭 던진다. " 시간과의 싸움이다, 오늘 시험은."

몸서리 친 하루였다.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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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2009.7.25일자 한겨레 신문기사이다. 제목은 <'미래형 교육과정' 벼락치기식 개편> 

현재 10년(초1~고1)으로 돼 있는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은 9년(초1~중3)으로, 1년 단축된다. 이와 함께 현재 10개(국어, 도덕, 사회, 수학, 과학, 실과, 외국어, 체육, 음악, 미술)인 국민공통 기본 교과군이 7개(국어, 사회·도덕, 수학, 과학·실과, 외국어, 체육, 예술)로 줄어든다. 또 주당 수업시간이 1~2시간인 도덕·실과·음악·미술 등의 과목은 한 학기에 몰아서 수업하는 ‘집중 이수제’도 도입된다. 이에 따라 현재 최대 10개인 초등학교 학기당 이수 과목 수가 7개로, 최대 13개인 중·고교는 8개로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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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졸속이다. 학교 현장에 얼마간이라도 몸 담아봤다면 이런 식으로는 절대 밀어부치지 못할 것이다. 이러니 정책 따로 현장 따로라고 말할 수 밖에. 상식이 통할 여지는 없는가. 

소위 말하는 기타 과목이 살아 남아야하는 이유를 말해야겠다. (참고로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필수 중의 필수 과목이다.) 

1.아이들은 몸을 제대로 부릴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칠판 분필가루 제거시 손걸레질 한 번 시키면 속 터져 죽는다. 도대체 걸레를 다를 줄 모른다. 걸레를 꼭 짜서 닦아내야하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로 대강 닦아낸다. 그래서 전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이를 창턱으로 데리고가 시범을 보여준다. 구정물이 쭈르륵.....계속 나온다. 시범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아이들도 배우라는 뜻인데 다음 날 다른 아이를 시켜보면 똑같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 아이들은 교복에서 단추가 떨어져도 제 손으로 다는 아이가 별로 없다. 손은 모셔두었다가 어디에 쓰는지 도무지 제 손 사용법도 모른다. 단추 하나 못달고, 형광등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고, 변기 막힌 것 뚫어볼 엄두도 못내는 인간 길러서 뭐하나. 언제까지나 남에게 기대서 살게 만드는 머리만 큰 바보 만드는 게 이 나라의 교육과정인가?  

가정과 기술 과목에서 손을 사용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2.우리의 교육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교육이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하위 30% 범위의 학생들은 예외를 빼고는 대부분 온순하고 성실하다. 수업 시간에도 열심히 듣는다. 그런데도 교사의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척 어려워한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부분은 기가 죽어있고 의기소침해서 감히 손을 들어 물어본다거나 하는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져왔다. 나름의 생존전략을 터득했다고나할까, 불쌍하고 안타깝게도. 

이런 아이들에게는 음악, 미술, 체육이 숨통 과목이다. 체육시간이라고 눈을 빛내며 기대에 차있는 아이들을 본다면 절대로 체육 시간 없앤다는 말 못한다. 다른 과목에서는 기가 죽어도 체육시간에는 팔팔 날아다니는 아이들을 본다면 그들의 숨통을 더 옥죄지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공부는 되지만 체육이 힘든 아이들에게는 체육 시간에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살아가는 데 머리보다 몸이 우선임을 조금이나마 깨칠 수 있는 시간이 체육 시간이다. 

3. 음악이나 미술을 제대로 가르쳐야한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지방의 소도시에 있는 신설 사립학교였다. 한 학년에 2학급씩, 전체 6학급이 전부인 작은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음악과 미술과목을 음악을 전공한 한 선생님이 모두 가르쳤다. 그런대로 배우긴 배웠다. 색종이 모자이크로 무엇인가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미술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검정색으로 표현했다. "눈은 흰색이잖아?"라는 선생님 말씀이 들려왔다. 내가 이때 "눈은 흰색인데 왜 검정색으로 표현했니?"라고 묻고 내 말에 귀기울여주는 선생님 모습을 봤더라면 적어도 그 선생님을 마음에서 지워나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미술대학 입학을 꿈꾸고 그림 공부를 할 때 알게 되었다. 중학교라는 기간이 그림의 단절기였다는 것을. 물론 별 볼일 없는 재주였기에 그림에서 손을 떼었지만 중학교에서 배워야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원망은 길게 남았다. 음악이나 미술은 자신에게 있을지 모르는 작은 재주 하나쯤 발견해서 삶을 다양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소양을 쌓게 해주는 과목이다.  

 

필수 과목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기타 과목에서마저 소외된다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나? 배움은 곧 지겨움이 될테고 더욱 더 진한 패배감과 열등 의식으로 지루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할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제 몸을 제대로 부릴 줄 모르고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하고 즐길 줄 모르는, 그저 머리만 멀뚱하고 크게 남아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반편이로 만드는게 이 나라의 교육이라는 것인가? 물론 반편이로 만들면 통치하기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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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5년 만에 돌아가신 시아버지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는 독한 년이었다. 당신의 무능과 비겁함, 무엇보다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모습 앞에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난다.

울컥 울컥 눈물이 나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보이지 않는 눈물이 고인다.

2002년 대선 때, 나는 투표도 하지 않았다. 투표 종사 요원으로 차출되어 새벽부터 투표장에서 유권자들에게 표를 나눠주는 일을 거들며 사전에 하는 부재자 투표도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분을 위해서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누군가가 비난의 말을 던질 때 나도 슬쩍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난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이 비겁하고 뻔뻔한 나라에서 살아가야 할 일에 눈물이 고인다.

19년 전, 우리 아버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1~2년 뇌졸중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가족 고생시킨다며 홀연 선택한 죽음이었다. 자살한 사람은 큰 죄를 지은 것이라며 미사조차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종교라는 게 인간이 만든 작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렬히 깨달았다. 그때 나는 깊게 깨달았다. 나의 한 시절이 끝났다는 것을.

아버지 생각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해에 32살 나이로 직장다운 직장에 들어갔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나는 처치 곤란한 백수의 모습만 보여드렸다. 아프다.

"대통령이 말을 저렇게 밖에 못하나"라고 누군가 비난을 할 때 "그러게" 밖에 맞장구 친 일 밖에 없는데도 가슴이 아프다. 이승만 시절 끝 무렵에 태어난 나는 그분을 통해서 비로소 바른 세상을 만나고 정치라는 것이 그래도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통렬히 깨닫는다. 이제 한 시대가 가는가?

눈물이 마른자리에 분노가 고인다.

세계 어느 나라에, 소위 민주국가라는 한 나라의 수도에 국민의 집회가 두려워 멀쩡한 광장에 전경버스로 바리케이드 치고 겹겹이 전투경찰로 에워싸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시원하게 잘 다듬어진 그 광장의 잔디밭 한 번 밟으며 마지막 가시는 분 분향 한 번 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이 옹졸함이 판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눈물겹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 비겁하고 뻔뻔한 나라에서 새삼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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