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하에 자식이 여럿 있으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올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한다.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려서부터 그 점이 늘 궁금했다. 지금의 내게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뿐이어서 이 역시 알아볼 기회가 없다. 그러니 그저 생각을 할 뿐이다. 

해마다 담임을 맡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몇 년은 커녕 일 년만 지나도 아이들 이름이 가물가물해진다. 심하게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 되면 기억 속의 이름들을 불러내느라 명렬표를 보고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증세가 심해진다. 

그러나 첫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내게 영원한 아이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991년, (내게는 기구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교직이라는 직업을 내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처음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어제 학교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어제. 하루 중 유일하게 빈 시간인 3교시 때. 약간 망설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1991년 1학년 13반 학생, 박...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기억하느냐고 물어온다. 일종의 통성명이 필요했다. "얼굴이 좀 넙데데하고, 혹시 부친이 안기부에 근무하시지 않았나...?"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와서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간 키도 많이 자라서 183cm라고 한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전에 살던 동네에서 사신다고도 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얘기에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탠다. 누구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사춘기 소년 시절이라서 그랬을 거라며 뉘우치는 말을 하며 멋쩍어한다. 언제 그랬던가? 난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갈등이야 그건 그저그런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쑥스러워한다. 아, 어른이 되었구나!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라거나 식당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때 나는 당혹스럽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저 학교에서만 불리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제자들 때문에 나는 계속 선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게 난 정말 부담스럽고 황송하다. 

간혹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제자들 중에 나한테 꾸중을 많이 들었던 아이들을 만나게되면 나는 굉장히 부끄러워진다. 겉으로야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그땐 왜 그랬을까. 나이가 들면 제 몫을 잘 해내는 어른이 되는데... 

박...야, 미안한 마음 품지 말아라. 나도 너희들 보면 미안해진단다...는 말은 못했지만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는다. 너희가 내게 첫아이였듯 내가 너희들에게 첫 선생님으로 기억되어 이렇게 멀리서 전화 한 통 걸어주니, 너희들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훨씬 크단다. 고맙고 고맙다.  

어제는 정말 황홀한 하루였다. 첫사랑이 살아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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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급식 지도 차례가 돌아왔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반별로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지도하면 된다. 사실은 아이들이 훈련이 잘 돼 있어서 그냥 소란스럽지 않게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되는 일이라서 굳이 지도라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지도에 앞서 미리 먹는 점심밥이 그닥 잘 넘어가지는 않는다. 긴장할 일도 없는 간단한 요식 행위에 불과한 작은 임무지만 그래도 일인지라 입 안으로 넘어가는 점심밥이 약간 까칠거린다. 

  45명 가량의 학급 10개반을 차례차례 식당안으로 들여보내는데 맨 끝 반이 우리반이다. 그런데 우리반이라서 그런지 보이는 게 다르다. 점심밥을 먹으로 오지 않은 아이들이 보이는 거다. 국어 숙제 가지러 집에 갔던 녀석은 보이는데, 역시나 깜빡 잊어버린 걸 가지러 간 반장 민욱이 안보이고 눈빛이 착한 깡마른 명호 녀석이 또 안 보인다. 급식 도우미인 민지에게 물어보니 몇 명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한다. 이런!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날씨인지라 비도 오고 바람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어지럽게 휘몰아치는데도 운동장에는 녀석들이 한가득이다. 야구하는 녀석들 사이사이로 축구를 하고 있는 녀석들이 보인다. 작년 반장이었던 형식이도 눈에 띈다. 소리 질러 아이들을 부른다. "야, 점심 먹고 놀아!" 급식 지도하며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소리쳐 불러보기는 처음이다. 왠지 뿌듯하다. 

  언젠가 교사 신문에서 읽은 귀절이 생각난다. 자식 셋을 낳은 교사가 은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던가 그에 대한 스승의 답장이었던가. 하여튼 내용은 이랬다. 선생이란 자기 자식을 셋은 낳아봐야만 제대로 된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식이라고는 겨우 하나 밖에 낳지 못한 나로서는 두고두고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중간고사를 엉망으로 치르고는 "언제나 미안해, 엄마"라는 문자를 보낸 딸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보니 나 역시 변덕스러운 날씨 만큼이나 어지러웠다. 마음이 어지럽다 보니 평소 안보이던 아이들이 보이는 것이다. 공부 같지 않은 공부에 시달리고, 가차없이 순위가 매겨지는 저 아이들이 새삼 눈에 밟히는 것이다. 내 자식이 하나이기에 망정이지 셋쯤이었다면 나는 분명 단명을 면치 못할게다. 

  나는 분명 전교조 조합원이다. 그러나 조합원비만 내는 명목상 조합원에 불과하다. 돈만 내고 아무것도 안한다고, 언제였던가는 열혈 당원들한테 제명당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는 불량 조합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리고 불편하고 불쌍하다. 이나마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버리거나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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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7일 부터 "산책로 사수"에 나선 과정 및 결과다. 

먼저, 남동구청 온라인 민원신청에 올린 글이다. 

첫번째.....(2010.3.17)평소에 생태공원을 내 집의 정원처럼 매일 드나드는 사람으로 생태공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새로 단장한 주 산책로는 비가 와도 배수가 잘되어 걷는 데는 더 이상의 바램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창 2지구 공사로 인하여 일부 구간이 진흙 투성이가 되어 그 구간을 통과하는 데 여간 힘들고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정확한 위치는 서창2지구와 고가도로 구간 밑으로 끊임없이 작업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비나 눈이 오면 말 그대로 팥죽 상태로 변해버립니다. 물이 그대로 고여있을 때는 다른 길도 없어 신발이 그대로 흙탕물에 잠겨 버리기도 합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공사가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데 그 쪽을 늘 통과해서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비나 눈만 원망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니는 사람이 적을지라도 길은 길인데 최소한 사람이 제대로 다닐 수 있게 어떻게 방법 좀 취해주십시오.  

 다음은 위 민원에 대한 남동구청의 답변이다.  

1. 우리구 생활환경개선을 위한 귀하의 관심과 참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2. 귀하께서 제기하신 만수하수처리장 인근 서창택지개발사업지구 진입로 비산먼지민원에 관련하여 2010년 3월 19일 현장확인 하였으나 현장확인시 공사차량의 출입 등 특이사항은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원인의 불편을 감안하여 공사관계자에게 민원사항을 설명하고 공사차량의 출입통제 및 도로 물청소 등 비산먼지저감대책을 강구토록 지도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3. 아울러, 동 민원처리결과에 대한 자세한 문의사항이나 기타불편사항이 발생시 우리구 환경과 생활환경팀(032-453-2653)으로 연락주시면 불편사항이 조속히 해결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번째.....다시 다른 코너에 위의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2010.3.23)도림동 오봉산 낚시터에서 다리를 건너와서 생태공원으로 이어진 길은 산책로로 매우 아름답고 한적한 곳입니다. 널리 이용되는 길은 아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자주 이용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저도 만 4년 넘게 그 길로 다니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학생들을 이끌고 야외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창2지구 보금자리주택 공사로 늘 다니는 길이 진흙 투성이로 변해버려 도저히 제대로 걸어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공사로 인해 임시로 만든 곳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원래 있던 길을 공사장처럼 이용하면서 보행자나 산책자에 대한 배려없이 그렇게 방치할 수 있는 것인지요.

*사진 속의 날짜는 카메라 오류이며 지난 3월 20일에 찍은 사진입니다.

다음은 위 민원에 대한 남동구청의 답변이다.   


1. 구정발전에 협조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 귀하께서 우리구 새올전자민원창구에 민원상담하신 생태공원 산책로 이용 불편사항에 대하여는 상기 공사현장은 방산하중간 도로개설공사 하부공간으로써 사업시행자인 경기도 시흥시에 정비요청을 통보하였습니다.
3. 빠른 시일내 불편사항이사항이 없도록 조치하겟으며, 위사항에 대하여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남동구 건설과으로 문의하여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 

 위의 두번째 글과 답변을 다시 시흥시청에 올렸다(2010.4.6) 세번째가 되겠다. 

..........그러나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진흙탕속을 걸어가야합니다.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통행할 수 있는 발판 같은 거 설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지요. 남동구청에서 시흥시에 정비요청을 통보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음이 답변이다.


○ 우리시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신 귀하께 감사의 드리며, 문의하신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 귀하께서 통행불편 해소를 요청하신 대상지는 방산~하중간 도로개설공사 구간 내, 영동고속도로를 고가로 횡단하는 논현교 하부이며, 공사차량의 진,출입로 확보를 위해 인천시와 협의하여 임시공사용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대상지입니다.
○ 잦은 강우로 통행에 불편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나, 임시로 사용하는 공사용 도로임을 감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이용자의 통행불편이 조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답변드린 내용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도로과장 오희중, 도로시설계장 전종삼, 담당자 이진홍(☎310-2427)에게 연락주시면 자세히 답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솔길로 해서 생태공원까지 이어진 엄연한 도로를 임시 공사용 도로라고 한다. 오솔길을 넓혀서 임시도로를 만들었다고 해야 옳다.(고가도로 공사 훨씬 이전부터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어서 6~7년 전에도 학생들을 이끌고 봉사활동을 온 적이 있다.) 그리고 차라리 애초부터 솔직하게 밝혀야 했다, 그러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다. 그냥 참고 다녀라."라고. 여기저기에 알아봐주는 척하는 제스처는 뭔가. 제 풀에 지치기를 기다렸겠지. 흠, 그럴 줄 알았다. 나도 기대하지 않고 시작한 일이었다.  

원시 그대로의, 생긴 것 그대로의 생태공원을 새롭게 단장하고 정비한다고 수십 억 내지는 수백 억 들어갔다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기껏해야 푼돈 밖에 들어가지 않을 진흙길을 방치한 채 '예의 바르고 점잖은 체' 말을 돌려대며 제 풀에 지쳐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는 안이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 그저 씁쓸할 뿐이다.

50m 밖에 안 되는 통행로를 좀 편히 걸어볼까 했더니, 아니 정상대로 걸어볼까 했더니 '예의 바르게'무시만 당했다. 고가도로가 완공되고 아파트 단지가 완공될 때까지 이렇게 지내야 한단다.  

얼마 전엔 이곳 진흙길에 빠져서 냄새가 밴 트레킹화를 끝내 버려야만 했다. 하루의 깨어있는 시간 중 한 시간을 보내는 나의 길, 생태공원 산책로. 길 위에서 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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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29일. 10여분 전 11시. 예술의 전당 앞. 누가 아는 체를 하여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내 오랜 친구 J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는 거다. 얼마 전 여행도 함께 하였던 친구다. 11시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단다. 나 역시 11시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한 친구들은 연중행사처럼 일 년만에 만나는 대학 때의 친구들이다. 

우연의 해후에 마음이 붕 뜬다. 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역시 친구가 좋다. 

각자 친구들을 만나고서 함께 관람한 전시가 바로 이 루오전이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또 제각기 오디오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충분했던 것 같다. 

루오라는 화가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 보도자료만 보아도 될 것 같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8778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에 붙인 작품 제목이다.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다'처럼 시적인 울림이 있는 제목이 많은 데 루오가 직접 붙였다고 한다. 특히 <미제레레>라는 일련의 작품에 붙인 제목에 눈길이 가서 작품도록을 사볼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참기로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먼저 위 기사에 실린 글에서 조금 인용해보면,

다만 루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강박증이 있었다. 한 일화로 당시의 드가, 세잔, 마티스, 피카소의 수집가로 유명한 화상 볼라르(A. Vollard 1865~1939)가 있었는데 그는 루오를 높이 평가해 그 작업실을 통째로 산다. 그런데 그 화상이 1939년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 이후 루오와 볼라르집안 사이에 소유권문제로 재판이 열리고 1944년 루오가 승소해 그의 작업실작품을 돌려받으나 그 중 315점은 공증인이 보는 데서 태워버린다. 1958년 루오가 죽자 그의 미망인이 그림을 1963년 국가에 기증했고 퐁피두미술관에서 보관해왔다.


전시회 한 코너에서는 루오가 그 315점의 그림들을 불 속으로 던지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치열한 작가 정신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온통 불 속으로 던질 것 만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나름 충격적이었다.

다만 우연히 해후한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쁨처럼 그저 가끔은 삶의 여정이 아름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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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하면서 쪽팔리는 일 중의 하나가 이럴 때이다. 

툭하면 무단 결석하는 한 여학생이 있다. 일주일만에 등교하고서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감히 더 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한다. 눈치를 보는 입장에 서는 것은 선생인 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그러면 문자를 보내본다. 절대로 답신 한 번 하지 않는다. 딱 한 번 통화한 적은 있다. 아마도 실수로 얼떨결에 받았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이후로는 절대로 전화에 응하지 않는다. "전화주십시오"라고 눈치를 보며 살살 문자를 보내보는 것은 선생인 나다. 

나의 이런 무능에 보다못한 학년 부장이 한 번 거들고 나왔다. 이판사판 귀싸대기에 온갖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판 맞붙었다. 결국 녀석이 두 손 들었다. 그 후 얼마동안은 고분고분해졌다. 이런 기싸움, 나는 절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말싸움조차 싫어해서 절대로 싸워야하는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다. 기싸움으로 학생들을 다스려야하는 경우, 나는 정말 선생하기 싫어진다. 

어제. 이 녀석이 무단 조퇴를 해버렸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너무나 당차고 맹랑하다. 오늘 아침, 심호흡을 하고 녀석에게 묻는다. "한마디쯤 해야하지 않겠니?" 돌아오는 답변에 그냥 모든 걸 접기로 했다."어떤거요?"  

몇마디 말로도 충분히 지도가 가능한 대부분의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솟구치는 부아를 꾹꾹 눌러 담는다.

악다구니로 학생과 싸워야하는 일,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 고상하게 대화로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것도 낯 간지럽고 우스워서 그것도 못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전투(?)에도 절대로 적응하지 못해 매번 쩔쩔맨다.  

아, 당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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