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재방송 하는가 싶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007 어나더데이가 떡 하니 방영중인 것을 봤다. 중간부터 봤는데, 한 번은 봐야할 것 같아서 채널 고정하고 자리 깔고 앉아 보기 시작했다. 그 영화 개봉되고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하던 나로서는 비디오로 보기도 돈 아까워 연휴 때 TV에서 해 주길 기다리다 놓치곤 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어쨌든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근데... 이 영화 보면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계속해서 제임스 본드가 죽어버렸으면... 본드걸인 징크스도 같이 죽어버리지... 엄청난 무기인 이카루스를 동원해 일본이고 미국이고 그냥 다 질러버리지... 이런 마음이 계속해서 드는 건 왜일까... 어설픈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엔 자막이 안 나오길래 뭔가 했더니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거였다. 뭐라더라? 문 대령이 "쫓아가서 죽여!" 이러니까 부하가 "알았어"하고 뛰쳐나간다. 오호~ 요즘은 상관한테 반말하고 그러나보지?? '알았어'라니..'예, 알겠습니다'도 아니고. 게다가 문 대령이 자기 아버지 보고 "아부님~" 하며 어설프게 이야기 하는데, 정말 웃겨 죽을뻔 했다. 아버님이 안 되니까 아부님이란다.. 그것도 이상한 억양으로.. 또 남의 나라에서 미국, 영국인들은 뭘 하는건지... 휴전선 근처엔 국군들이 배치되어 있는 거 아닌가? 코빼기도 못 봤네.. 제임스 본드랑 본드걸이 예비군 훈련 복장으로 숨어드는 장면도 웃겼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정말 화낼 정신도 없을만큼 놀랐다. 세상에... 사원에서 그 짓거리라니... 그네들은 교회나 성당에서 성적인 행동을 하는가보지? 어떻게 경건한 사원 안에서 불상이 앞에 있는데 다이아몬드를 쫘악 뿌려놓고 농짓거리를 할 수 있나...


그래... 그렇게 타 문화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오로지 내 편 아니면 모조리 악으로 규정하는 그들이 이 영화에서 이 이상 뭘 더 보여줄 수 있겠나... 백인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이 동양 문화를 존중해줄리 없겠지... 근데... 그들은 백인들이 만들어 낸 IQ 지수가 황인종들이 가장 뛰어난 걸 알고 있는지?? 그것도 한국인의 IQ 지수가 가장 높다는데... 그것도 알고 있을까? 한국인 여성의 유전형질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데... 그것도 알고 있는지??


괜히 본 걸까?? 기분만 망쳤다. 또 다시 욱~ 하는 마음이 치솟는다. 으... 나만 괴롭지, 그네들은 아무렇지도 않겠지...


좀 더 괜찮은 대응방식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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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12-05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그따위로 만들어놓고 한국에서 개봉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 더 놀랍더군요.

꼬마요정 2004-12-0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ㅡㅡ''
 
햇살 아래 입맞춤
줄리아 퀸 지음, 도향희 옮김 / 신영미디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따뜻한 햇살 아래 술에 취해 나무에서 떨어져버린 불쌍한 백작과 꽉 막힌 계모를 맞이해야 할 비운의 운명을 지닌 엘리의 만남을 단순히 햇살 아래 입맞춤이라고 하기엔 좀 서운한 맛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안성맞춤의 표현을 찾아내긴 힘드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작가는 내가 아니니까.


찰스는 보름 뒤에 찾아 올 자신의 생일 전까지 결혼을 해야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엘리는 자신의 언니인 빅토리아가 우여곡절 끝에 후작과 결혼하여 집을 떠난 후 죽도록 살림만 살다가 급기야 끔찍한 계모를 맞이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절묘하게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둘은 어이없게 만난다. 무슨 백작이 위스키를 진탕 마시고 나무에 올라갈 건 뭔 일인가. 게다가 엘리가 지나가는 그 시점에 딱 맞게 나무에서 철푸덕 떨어질 건 또 뭔가. 그렇게 만나서 찰스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어쩔 수 없이 엘리는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가난한 목사의 딸인 그녀가 잘생기고 유쾌한 백작의 청혼을 거절하려면 엄청난 각오가 있어야 할 터였다. 물론 엘리의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찰스는 아무리 자신이 궁지에 몰려 있었어도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쳇. 여기서 여성은 높은 지위에 있고 아무리 잘 생겨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들고, 남성은 그 지위와 외모에 기대어 지나치게 오만하여 여성을 발 아래로 본다. 그래. 그러다가 큰 코 다치지. 로맨스 소설의 또 하나의 공식이다. 결국 엘리의 재치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면서 잠깐 끼어들었던 죽음의 위협을 물리치고 둘은 행복한 삶을 꿈꾼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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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에 젖어 무심코 지나치던 일들을 다소 물러난 거리에서 바라보면 어색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종종 그런 경험을 하곤 하는데, 그런 경우 내 단점보다는 내 친구의 단점을 더 많이 보곤 한다. 아마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모순적인 태도 때문이겠지.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20여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쉽게 바꾸기는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자기의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어쨌든 한 걸음 물러서서 내 주위를 바라보면 이 책에서의 상황과 비슷한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상황을 즐길 가능성이 있다. 그러고보면 이 책이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하다거나 그저그렇다거나 식상하다거나 하는 평가를 내리기 망설여진다. 어차피 사람이란 잘난 체하고 싶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노통이 줄기차게 다루고 있는 적이 이제는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벌써 12번째 소설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주인공들을 괴롭혔던 적들은 늘 그대로이다. 주인공들 역시 그대로다. 강력한 적을 동반하고 있는 주인공들은 늘 소심하고 약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다. 노통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적은 분명 진화할 것이다. 그 적과 싸우기 위해 글을 쓴다는 노통 역시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 그런 성장의 모습이 더 반영되어 있길 바라는 내 마음은 어리석지만은 않을 것이다.


블랑슈와 크리스타, 그리고 앙테크리스타. 이 셋은 같다. 그야 당연히 자신의 모습들이니까 그렇겠지만, 그래서 보다 더 커버린 모습을 볼 수는 없는걸까. 언제나 결말은 주인공이 적과 닮아버린 곳에서 끝나버린다. 아직 그녀는 싸우는 중이고, 자신의 성장을 감춰야할 때일까? 하지만 적은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니까 나의 성장을 뛰어넘어 커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걸까.


별 셋의 가치는 오롯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나를 돌아봤다는 거. 그리고 다음번 그녀의 소설을 읽을때쯤이면 나의 내면이 보다 커져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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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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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향기마을


      - ♠ 행복은 마음속에서 자란다 ♠ -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 세상은 하나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행복도 하나의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학력을 가졌으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에 만족이나 행복은
      반드시 소유에 비례하지 않으며, 지성이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인 백낙천은 "인생을 부귀로서 낙(樂)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못한다"라고 하였다.
      만족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는 뜻일 것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느끼느냐 행복하게 느끼느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속에서도 만족함을 발견해 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속에서도 눈물 흘린다.

      행복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함에 감사하다.

      그래서 옛 성인은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
      그리고 때때로 진리를 듣는 것은
      최상의 행복이다"라고 하셨다.
      존경할 스승이 있고, 섬겨야할 어른이 있으며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일 것인가.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길지라도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갖는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따분한 인생을 산다.
      할 일이 없어 누워있는 사람보다는
      거리에 나가 남이 버린 휴지라도 줍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배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기쁨은 반드시 커다란 일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남의 평가에 신경쓰지 말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보람을 찾으면 된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거짓없이 진실로 대할 때
      행복한 것이지 아무리 큰 일이라도 위선과
      거짓이 들어 있으면 오히려 불안을 안겨주고
      불행을 불러오게 된다.

      그래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명성보다는 진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잠 못 이루지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성자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 그렇게도 밝게 살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 때 그 성자는 대답하셨다.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당장 일에만 전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 슬퍼한다."

      그렇다.
      공연한 일에 매달려 근심 걱정하지 않고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행복의 길이다.

      슬펐던 일을 자꾸 떠올려 우울한 마음에 사로 잡히지 말고,
      화나게 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을 회상하여 분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못된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이다.

      항상 사물을 긍적적으로 보고 환희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밝게 만들어 준다.

      다시 한번 행복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욱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좋은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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