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Olivier Messel - Barba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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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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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란 무엇인가? 라는 커다란 화두 아래 이 강의의 마지막 디딤돌은 바로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전문서적을 독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배운 공부를 버팀목 삼아 애써 글을 읽다보니 이번 강의와 많이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일탈의 시학. 시나 산문을 읽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기호내용 즉 기의(signified)이다. 다시 말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오르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래서 시를 쓸 때 어떻게 하면 글이 더 생생하고 즐겁게 전달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유종호 님은 좋은 시는 기호내용보다도 기호표현의 에너지로 홀로 서면서 우리의 주의력을 당긴다고 말한다. 주어진 기호체계에서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나 최상급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면 그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교훈적인 시가 된다. 한가지 더 살펴보자. 문학에서 표현이 너무 친숙하거나 낯익은 것이라면 물리기 십상이다. 사람에게는 낯선 말에 대한 어느 정도 관심과 선호도가 있다. 낭만주의 시에서 멀고 생소한 것은 그 자체로서 미적 기능을 발휘한다. 생소한 낱말의 사용은 기의보다 기표가 순기능을 발휘하는 시 언어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가령 사투리를 넣은 시, 일상의 진부함을 벗어나고픈 출발충동의 시 등은 시행을 기표대로 기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또한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숨어있는 부호. 사람들의 말속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관습과 가치관이 베어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많은 것이 묻어있는 언어는 시인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모든 낱말에는 무수한 선인들이 발음하고 발언했다는 뜻에서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가 숨어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를 시인은 작품 속에 되살려서 자신의 언어에 더욱 풍부한 울림을 보탤 수 있다. 관습덩어리인 말을 덧붙임으로써 아무도 써보지 않은 진귀한 어휘로  변용된다. 즉 낯익음에서 낯섦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 대화이론으로 검토되고 있는 시가 시를 낳고, 말이 말을 낳는 현상은 시인들이 기대고 있던 전통적 소양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먼저 나온 시를 비판하기도 하고 인유를 사용해서 자신의 작품에 울림을 가하기도 한다. 경험을 중요시하거나 사실을 덮어버리는 수사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표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의 시속에 시인의 사상과 이념이 물씬 풍겨 나오는 게 아닐까.
    세 번째 시와 은유. 시의 비유적 표현에 대해 쉽게 알기 위해 시 한편을 살펴보자.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김춘수 님의 이 시는 비유적 표현이 아주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다.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는 은유는 딱 보기에도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이라 느껴진다. 이 행은 작품 전체와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며 그 효과에 기능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과 가을 나뭇가지의 어울림이 빚어내는 은유 효과는 절묘하다. 그러나 <구름이 졸고 있는>, <단풍잎이 발갛게 타며 있었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구름'과 '존다', '단풍잎'과 '탄다'는 유사성이 너무 밀접해서 시적 긴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비유인 것이다. 비단 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도 죽은 비유는 허다하다. <네가 다 말아먹었어>, <목에 힘주지 마>, <여자 치마폭에서 놀고 있네> 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비유는 언어의 장식이나 생각의 의상이 아니라 언어의 구성요소이다. 언어 자체가 은유적이요 말이 은유이다. 따라서 은유의 구조는 다양하고 다채롭다. 첫째 구상화의 은유이다. 문명의 횃불, 별리의 고통처럼 추상적인 것에 구체성을 부여하며 신체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은유다. 둘째 애니미즘 성향 은유이다. 즉 무생물에 대해서는 생명 있는 것의 특징을 부여한다. 성난 파도, 산허리, 노한 바다 등이 그것이다. 셋째 인간화 은유다. 인간 아닌 것에 인간의 특징을 부여하는 은유로 정다운 고향, 황소 웃음 따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감각적 은유는 청각적 의미를 시각적인 의미로 옮겨 쓰는 것처럼 감각영역의 의미 전이를 꾀하는 것이다. 요란한 색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등이 있다. 은유는 단순한 장식이나 충격어법이 아니라 취지와 수단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특유한 진실과 통찰을 전달하며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은유적 표현에서 상징하는 무엇은 독자들에게 신비감을 제공한다. 표현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독자의 몫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시적이라는 것. 산문시는 시일까? 즐거운 비명,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은 비유는 모순어법이다. 조화되지 않고 언뜻 모순되는 낱말이나 의미를 특정 효과를 위해 결합한 것이다. 이런 모순어법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나 상식을 파괴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진리표현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시와 산문은 흔히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대조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문시는 모순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시이지만 산문의 꼴인 시. 산문시는 내용의 깊이를 얻는 대신 시 고유의 음률성은 소홀히 된다. 그렇다고 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산문 쓰듯 하면서도 길이가 비교적 짧고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행갈이를 한다면 운문이라고 명명하기에 무난하다. 거기다 시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면 산문과는 다른 운문의 느낌이 명백할 것이다.

        아배는 타관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뒤로는 어늬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       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백석 님의 이 작품은 꼭 산문 쓰듯이 써내려 간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독특한 소재 처리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글이 운문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게 한다. <시적인 것>을 조성하는 산문시는 우리 시의 매력 중 하나지만 소리와 음률성을 지나치게 멀리한다면 불필요한 소음이 발생한다.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면 시의 자리가 우뚝 설 것만 같은 기대는 내 어리석음일까.
    여태까지 화두에 접근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다. 책의 일부이지만 강의내용과 맞물려 그나마 잘 이해된 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독특한 글 쓰기 방식인 시를 이해하고 내 나름의 시 세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시'라고 하면 보통 소재가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소하고 소박한 것에 정을 두는 경우가 많다. 사태나 이데올로기, 정치적 상황들조차도 이러한 작은 것에서부터 찾아 넓혀간다. 그런 눈을 가진 모든 이는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문장력과 감성의 소유자만이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잘 쓸 수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많은 시를 접하면서 점점 시를 보는 눈을 넓혀 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태 살펴본 것은 기본적인 이론 그러니까 시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제일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제 출발은 여기서부터다. 시가 과연 무엇인가를 알 때까지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끌어올릴 생각이다.
    끝으로 교수님께서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이야기하시던 별꽃이 그리도 궁금해 허리를 굽혀 그 앙증맞고 예쁜 꽃을 찾았다.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둘러 쌓인 나에겐 아주 값진 선물이 아닌가 싶다.

       일찍 찾아온 너를
       영접하지 못해서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꿈을 짓밟아서 미안해
       너를 아프게 해서 미안해
       꽃처럼 웃고 있는 너를
       별처럼 울고 있는 너를
       미안해
                               ―조달곤, 「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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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3-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꼬마요정님 이책을 읽으니 시가 오히려 더 어려워 지는것같아요 ^^ 우연히 리플보고 왔는데 다른 것 몰라도 별꽃이란 시 정말 잘 감상하고 갑니다 ㅋㅋ
본책에는 실려있지 않던 시인데 요정님이 직접 저자의 강의를 들었나 보네요~
한번 더 읽어보고 저도 시를 감상할 수 있는 교양(?) 좀 길러 볼랍니다
수고하세요~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퍼온글] Robles Muñoz <이런 서재도 좋은데... ^-^ >


Interior O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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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네 생각이 나

한 잎의 女子 1
ㅡ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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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反-영웅주의, 전복의 서사

나는 만화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일이 없다. 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만화방에 가서 꼭 챙겨 보는 만화가 셋 있다. 『창천항로』『무한의 주인』, 그리고 『』이다. 『불멸의 용병』이라는 해적판으로 이 만화를 접했던 게 십 년 전쯤이다. 현재는 정상 판권 계약에 따라 무삭제로 꾸준히 나오는 중이다. 더딘 만큼 고대하는 재미도 솔솔해서, 기다리는 맛이 싫증나진 않을 정도로, 아끼는 만화.

이 만화는 여타 영웅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여정>의 서사다. 길은 한자로 道. 정의의 사내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마지막에 귀환(가령, 누명을 벗고 정의를 찾는)한다는 둥의 (오디세이아 같은) 고색창연한 서사가 뇌리를 스치지 않는가? 그러나 작가는 신화와 기독교 바이블과 동화적 판타지를 작신작신 비틂으로써 신선함을 이끌어 낸다. 뿐아니라, 시간적 구성도 전복한다. 현재 - 회상 - 진행 순이다. 현재의 절정인 상태를 아무런 원인 없이 보여주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방식인데, 과거의 서사가 너무나 길어서, 초반부에 절정의 장면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복잡한 서사를 싫어하는 만화 독자(나의 편견?)들이 계속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에둘러서 초반부의 시점을 거친 이 만화는, 현재, 진행 중이다.

전복의 미학을 집중 연구한 서적, 어디 없나? 이 만화는 그리스/로마/북유럽/켈트족 신화를 채용하지만, 기독교 바이블을 전복시킨다. 작품 속, 예언서에 의해 흰 매로 상징되는 그리피스는 예수의 알레고리일 테고, 어둠의 매로 상징되지만 제대로 혐의가 씌워지지 않은 가츠는 아하르 페르츠(적그리스도)의 알레고리인 듯하다. 그리피스는 밑바닥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에 뛰어들어 세상을 자신의 정의(?)로 구원하려는 노모스적인 인물이지만, 가츠는 세계가 체계와 믿음에 의해 다루어지는 게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부딪어 가는 아노미적인 인물이다. 기독교 바이블이 박애로 구원을 이룬다면, 중세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인물들은 칼로써 구원을 하려 한다. 기독교 바이블이 말(진술)이라면, 이 작품은 스크린(묘사)이다. 가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여정을 지속하는 게 아니라, 그리피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간다. 공적(구원) 자아보다 사적(복수) 자아가 더 부각된 영웅이 있던가? 여정 서사에 대한 안티이면서, 기법은 여정이다(제대로 된 풍자!).   

이 만화는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시작된 동화적 판타지를 무시했다. 마법사, 드래곤, 전설의 무기, 여정을 위한 구성원, 공적을 세우는 모험, 멋진 친구와의 조우 등 동화적인 판타지의 일반 소재가 철저히 배제돼 있다. 대신에 듣도 보도 못한 괴물,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검, 외로운 여정, 살육, 강간, 오로지 적들만이 난무한다. 여정의 중심인물인 가츠는 그냥 전사가 아니라 미친(berserk) 전사이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그리피스)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강간 당하는 것을 목도 당했고, 그 순간에 괴물의 발톱에 의해 한쪽 눈이 실명했고, 외눈은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외곬 여정의 암시일 것이다. 또한 한쪽 팔이 잘려서 대포가 달린 철제 의수를 달고 다닌다. 괴물보다 더 괴물같다. 미소년 엘프 사내도 아니고, 애들이 좋아할 자그마한 호비트 주인공도 아니다. 거대한 칼을 차고, 괴물들ㅡ아마도 왜곡된 또 다른 가츠의 자아를 상징하는ㅡ을 살육하고 다니는 인물이다. 일반적인 동화 판타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0여권쯤에는 요정이 변이된 괴물이 나온다. 요정 괴물은, 옛적 소녀였고, 요정을 꿈꾸었고, 요정들에게 틈입했지만, 꿈과는 달리 모습만 아름다운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살육을 일삼다가, 가츠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대포 맞아 죽는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사티로스의 모습을 한 사탄과 마녀들의 디오니소스적인 향연을 일컫는다. 괴테의 『파우스트』1, 2부에 걸쳐 묘사되는 게 유명한데, 이 만화의 20권쯤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알레고리화 한 장면이 등장한다. 고야의 판화를 연상시킨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마녀 화형도 등장한다.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는 여자는 작품의 중심인물인 (가츠의 애인이자 그리피스의 추종자이며 강간 당해서 백치가 된) 캐스커인데, 가츠가 구해냈을 때, 화형식 장소인 탑이 무너진다. 그 탑은 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이며, 고문의 난장이던 곳이다. 가츠에 의해 대주교와 고문단들이 죽고 탑이 무너진 것은, 신이 어쩌구…… 따위의 관념을 상징적으로 파괴한 것일 테다.

동료들을 제물로 삼아 강림한 그리피스는 국가를 만들고, 마치 아더왕의 전설처럼 주변에 전사들과 민중들이 들끓는다. 그 반대편의 가츠는 그저 괴물들을 살육하며 복수를 위해, 민중들의 빛이며 전사들의 왕을 죽이러 여정을 진행한다. 너무 강한 동화 판타지(그리피스)에 맞서는 카니발리즘적 판타지(가츠)의 묘한 알레고리. 나는 그간, 이 꿋꿋한 냉소로 점철된 만화를 사랑해 왔다. 헌데,

초반부터 요정이 여정에 동참한 것은, 이야기의 전달자적인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라고 여기고 그러려니 했었지만, 20권을 넘어서면서부터, 꼬마 도둑이 여정에 합류하고, 24권인가부터는 소녀 마법사가 동료로 합류하고, 가츠를 영웅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여사제와 그 친위기사가 합류한다. 게다가 미친 전사인 가츠는 점점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어이없는 전개에 나는 이 만화가 미워질 지경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강한 동화 판타지에, 이 작가마저 굴복한 것인가? 대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조를 버린 것일까?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잘 해 봤자 잡종 판타지 밖에 안 된다. 작가가 어서 빨리 이성을 되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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