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웃지마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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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에 대해서 >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가 경제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담 스미스 이래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 가치론을 주장했지만,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 마르크스가 노동의 양을 통해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주장했고, 이 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자본가들은 당황했다. 산업 혁명 이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운영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는데,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경제학이 필요했다. 이 때 경제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공리주의 이론이었다.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벤담과 밀의 쾌락과 고통의 개념을 효용이라는 말로 바꾸었고, 효용을 측정하면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한계 효용 이론을 발전시킨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현대에 와서 철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바로 근대 철학 사상 중 하나인 공리주의였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마지막 고전학파의 학자임과 동시에 공리주의자였던 그의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당연한 귀결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직이 보편적으로 실천되기를 의욕할 수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상의 정책'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론 방식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관점을 취했다고 주장할 수가 없지 않는가? 칸트는 그러한 의지가 도덕적 관점의 일부라고 생각한 점에서 옳기는 하나 도덕적 관점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공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8세기말과 19세기는 놀랄만한 변혁의 시대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근대 민족 국가가 출현하고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다. 미국의 유혈적 시민전쟁은 급기야 서구 문명 사회에서 노예제도의 종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산업혁명이 전반적인 사회의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리주의 도덕 실천가들은 이전의 낡은 가치들에 진부함을 느끼고 도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쾌락 그 자체를 유일한 선으로 여기고, 행위의 유쾌한 결과를 도덕률의 기준으로 여기면서 결정론에 도덕 이론의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흄은 영국의 사상사에서 도덕 의식의 이론으로부터 기본적인 공리주의적 전제에로의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그를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보통 공리주의 철학과 관련되는 두 인물은 벤담과 밀이다. 처음 벤담에 의해 공리주의가 널리 알려져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벤담에 의하면 도덕은 신을 기쁘게 하는 문제가 아니며, 추상적인 규칙들에 매달리는 문제도 아니다. 도덕은 이 세계에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벤담은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 원리, 즉 "유용성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용성의 원리란,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경향성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행동을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남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는 상황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자가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익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편애(self-preference)는 자신의 이익이 어떤 사람 혹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롭지 못할 때조차도 언제나 작용한다. 이것은 늘 인간을 형성시켰고 앞으로도 항상 인간을 형성시켜 줄 것이며, 도덕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벤담은 영국의 법률과 제도를 공리주의 노선에 따라 개혁하려는 목표를 가진 일단의 철학적 급진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추종자 중 한사람인 제임스 밀은 탁월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요,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였다.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설의 지도적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그것에 관하여, 그것에 의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바람직한 것이 되는(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간에) 그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고통이 면제되고, 즐거운 일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근본 법칙은 아주 간단하게 가능한 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 등 일곱 가지 기준을 가지고 쾌락과 고통에 대한 쾌락 계산법을 제시하고자 한 벤담에 비해 밀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쾌락의 평가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도입하고자 했다. 즉 쾌락, 즐거움, 건강, 만족 등의 많고 적음이 행위 결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 쾌락의 고상함과 저열함 또는 탁월함과 비열함까지도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밀은 좋은 인생에 대한 공리주의적 견해에서 인간의 고귀한 능력들이 가져오는 만족들에 최우선적인 역할을 할당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본능의 만족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밀은 이타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일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밀의 최대 행복의 원칙에서 행복이란 많은 일상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 미세한 고통과 불합리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데서 오는 전면적인 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질적으로 최상의 것이어야 하며, 최상의 것으로 생각되는 행복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행위가 창출해 내는 행복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원칙의 진술에서 사용되는 행위의 의미와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의무의 근거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밀은 비난받을 만한 행위가 칭찬 받을 만한 성질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데서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이 호감이 가고 용감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또 잘 이행되었을 때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덕망 있는 성격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유익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공헌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며 숭고한 동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윤리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행위자의 성격이나 동기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결과이다. 밀은 의무가 윤리상의 제재에서 나오며 어떤 다른 도덕률의 체계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도덕률을 당연히 지키도록 하는 중요한 궁극적인 제재, 양심의 제재를 밀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에게 있어서 양심은 동정심이나 상호 이해심, 동료와 함께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특징지어지는 감정 또는 '집단 감정'이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이 이기주의적인 감정보다 약하지만, 사회 조직과 교육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발달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게끔 만들어 준다. 일단 이런 감정이 형성되면,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양심의 가책을 낳게된다. 밀은 양심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인 제재가 되고 의무를 최종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발달된 동정심으로부터 나오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양심적인 감정인 것이다.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던 이론인 공리주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행위들은 오직 그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야 한다. 옳은 행위란 단지 최선의 결과들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둘째, 결과들을 평가하는 데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행위들에 의해 생겨나게 될 행복과 불행의 양이다. 옳은 행위들이란 불행에 대한 행복의 최대 잉여를 낳게 하는 행위들이다. 셋째, 초래되어질 행복 또는 불행을 계산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져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반공리주의 논증을 발생시켰는데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 철학의 몇 가지 근본 문제들을 추가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인가? 공리주의는 옳은 행위란 최대의 선을 낳게 하는 행위들이라고 말한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이란 오직 하나, 행복이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공리주의 이론은, 행복은 바랄 만한 것이고 더욱이 목적으로서 바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바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 하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쾌락주의 이론을 조금만 검토해 보면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심각한 결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래가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교통사고로 손에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피아니스트에게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쾌락주의자들은 그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가 자신이 마땅히 어떠했어야 되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좌절과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반대로 현재 불행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 대응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수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쾌락주의는 행복의 본질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란, 다른 것들은 오직 행복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만 여겨지지만 그 자체로서 선하고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란 우리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권리에 의해 선한 것들로서 인정하는 사물들을 얻었을 때 그것에 수반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대응물이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인가? 공리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다른 문제 역시 행위의 옳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판명된다면, 공리주의는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한 공리주의자가 어떤 지역을 방문하던 중, 한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결과로 인종간의 폭동이 일어나 백인 폭도들이 경찰의 묵인 하에 흑인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그때 공리주의자가 그 범죄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이 특정한 흑인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신속한 범인 체포가 그 참상과 린치를 그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공리주의자로서 그 사람은 틀림없이 무죄한 사람에게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거짓말은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죄한 사람의 처형을 초래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함축을 지닌 공리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과 교육이 내적인 힘과 더불어 힘과 더불어 밀이 생각하는 바처럼 우리의 행위를 결정한다면(밀은 어떠한 선택의 자유나 자기 결정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말하는 의미를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에도 불구하고 밀의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학자들 중에서 밀이야말로, 경제적 생산이 정체되는 '침체' 상태를 적어도 산업화 된 국가들에서는 위기 신호와 사회적 파국의 전조로 해석하지 않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태연하고 더욱 개화된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후진국들에서나 생산의 증가는 의미있는 일이 된다. 최고의 선진국들의 경우 경제적 관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개선된 분배이다. 그 분배를 이루기 위한 불가결의 수단은 인구 증가의 더욱 강력한 제한이다. 부와 인구가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경우 지구에서 사라질 어떤 그런 것들에 힘입고 있는 지구의 쾌적함이라는 저 위대한 환경을 지구가 잃는다면, 그것도 더욱 개선되고 행복해진 주민들이 아닌, 그저 숫자상 엄청나게 증가된 주민들을 부양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잃는다면, 이러한 세태가 불가항력적으로 닥치기 훨씬 이전 에 사람들이 침체 상태에 만족하고 살기를 바람이다.'

<참고자료>

1.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D. Hume.

2. 도덕철학. 제임스 레이첼즈 지음. 서광사.

3.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벤담. 1789.

4. 현대윤리사상. J.V. 맥글린, J.J 토너 지음. 서광사.

5. 공리주의. J.S. 밀. 1861.

6. 윤리학. 윌리엄 K. 프랑케나 지음.

7. 철학의 거장들 중 J.S. 밀. 디터 비른바허 지음.

8. 탐구. H.J. 맥클로스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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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8, 갑자기 다가온 IMF 여파로 직장을 잃으신 부모님으로부터 요즘 들어 부쩍 살기 어려워졌다는 말을 듣는 횟수가 증가하였다. 50, 노후 대책은 커녕 현재의 생활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 일은 하지만 들어오는 돈 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현실은 암울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늘 잊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에 머무르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다고. 얌전히 직장생활을 하시던 지난 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중산층 이상의 삶을 물려주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우리는 뉴스에서 계층간의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IMF 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부유층의 자제들은 지금이 더 좋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고도 하던데,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머지 않아 그들만을 위한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한 뉴스 기사에서는 강북에 살기 때문에 미팅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어떤 대학생의 철없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었다. 참 어이없는 세상이구나 라며 그냥 넘기긴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겪는 소외감은 아마 앞으로 더욱 커질 듯 싶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닌가 보다. 미국의 한 모녀가 저술한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이라는 부제 앞에서 나는 이유 모르게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여권의 신장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직장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무게에 짓눌렸을 남성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직장 생활의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물론 과거 전업 주부보다 오늘날 일하는 여성들이 가계의 수입을 증대시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체 가계 소득의 증대와 동시에 매달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고정비용 역시도 증가했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여유자금은 더욱 감소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저자들은 과거 전업 주부로서의 여성은 남편의 실직 등으로 인한 소득 상실시 언제라도 노동할 수 있는 예비 근로자로서, 가족 구성원 중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면 무료로 그를 간호할 수 있는 예비 간호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거 전업주부에 의해 무료로 제공되던 이러한 서비스들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을 버리고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한 가정은 고정비용 조차 감당하지 못해 경제고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맞벌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그 많고 많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파산하는 이들이 그리도 많단 말인가? 저자는 교육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오늘날 교육은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길 바라고, 이를 위해 부모는 좋은 학교가 존재하는 좋은 학군으로,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감행한다. 매달 감당해야 되는 집세와 자신의 직장생활을 위한 차량 유지비 등으로 인해 오늘날의 중산층들은 굳이 과소비를 하지 않아도 파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한가지 더, 대출조건의 완화 등 보다 시장 질서에 부합하는 정책이라며 정부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중산층의 파산을 독촉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거에는 집값의 30%에 해당하는 돈을 갖고 있어야 모기지 대출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3% 정도의 돈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NCBC 가 내세운 소비자 파산신청 권리 제한이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파산의 늪으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당장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에게 카드 융자를 통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만, 그 유혹은 실로 달콤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금융회사들이 이러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많은 이윤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회복지제도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끌고 다닌다. 한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 사람의 나태, 과소비 등으로부터 비롯되며 복지에의 집착은 개인으로 하여금 노동에 대한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많은 이들은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는 정말 빈곤한, 그냥 놔두면 우리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될 정도의 빈곤층에 대한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노라고 말한다. 과거와 같았으면 이는 문제될 리가 없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현실이 지속되는 속에서 이는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기존의 중산층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체 신 빈곤층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층을 형성할 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저자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논조로 이야기한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통한 이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전제되어야만 지금의 파산 경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또한, 직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는 속에서만이 지금의 맞벌이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단지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자가 책의 말미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찬찬히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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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슈렉 2의 반데라스 고양이 눈 총총 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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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영화속 그녀들과 그들의 차이

예전에 리허설이라는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터프가이 최민수(정말이지 진부해 죽겠다.) 와 모델 박영선 (앙드레 김의 패션쇼 단골 모델로 한복 8겹 입고 차례로 벗어던지기 쇼의 1인자였으나 지금은 뭘 하는지 통 보이질 않는다.) 이 나오는 영화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말보로를 피우며 잭다니엘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마초 최민수는 연극 무대에서 박영선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영선은 오르가즘을 소재로 한 연극의 주인공인데 신음소리가 일품인 여자이다. 최민수는 마초답게 박영선에게 사귀기를 제안하는 구차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그녀를 바로 덮친다. 일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당한 박영선은 처음에는 반항을 좀 했으나 이내 최민수와 하는게 너무 좋음을 알게 되고 둘은 그때부터 서로를 탐닉하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그야말로 눈만 마주치면 삐리리 해서는 서로를 안고 자빠진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백번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게 있다면 바로 강간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 하더라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남자한테 당하고 싶은 여자는 없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사랑씩이나 하게 된다. 이건 자칫하면 강간을 하던 뭘 하던 화려한 테크닉과 넘치는 힘으로 소위 홍콩만 보내주면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너무 멀쩡하다. 얼머전 칸에까지 갔다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성현아 역시 강간을 당했으나 자기 남자친구에게 마치 ‘나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 왔다’ 정도의 심드렁한 말투로 고백을 한 다음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나 정말 깨끗해 지는거지?’ 하고 반문한다.(그 이전에 남자친구가 나와 섹스를 하면 강간을 당한 니 몸이 깨끗해진다고 말한다.) 비록 미친년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꽃잎에서의 이정현도 자신을 강간을 남자를 따라가서 지내며 나쁜남자에서는 아예 강간을 가능토록 한 남자를 위해(자기가 강간한 것은 아니지만 멀쩡하던 여대생을 하루아침에 사창가에 묶어놓고 처음인 그녀가 손님에게 강재로 당하도록 한다.)기꺼이 창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강간은 최소한 아무일 없이 넘어가거나 아니면 강간을 당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게 혹은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이러니 강간에 대한 판타지가 안생기고 베기겠는가.


이래서인지 강간으로 고소를 당한 남자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이 ‘그녀도 좋아했었다.’(더욱 역겹게는 젖어 있었다 어쩌고 한다.) 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겨운 주장처럼 설사 몸의 반응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강간은 엄연한 강간이다.


그런데 남자들을 강간한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 영화 슬리퍼즈를 보면 강간을 당한 남자 아이들은 결국에는 복수를 하며 신부님도 강간한 자를 살해한 것을 눈감아 줄 정도이다. 이렇게 복수를 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또 희대의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악마가 되기도 한다.(더셀, 미스틱 리버, 양들의 침묵, 프라이멀 피어 등의 영화를 보면 굳이 강간이 아닌 성적 학대만 받아도 남자는 충분히 살인마와 괴물이 된다.) 즉 남자는 영화에서 강간을 당하면 절대로 멀쩡하지 않다.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좀 극단적으로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와 남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여자는 강간을 당해도 괜찮지만 남자가 강간을 당하면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강간을 당하고 난 다음 선택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삶. 아니면 창녀이다. 


남자들은 가끔 강압적으로 하는 섹스가 자신을 남성답게 보이게 하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남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싫다고 하는 여자를 덮치고 또 덮친다.(배우자 사이에도 엄연히 강간이 존재하지만 내 여자 내가 데리고 하는데 왜 라는 오랜 악습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과거 아동학대라는 개념이 희박했을때 자기 자식을 개패듯 패면서도 내새끼 내가 잡겠다는데 왜 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리허설처럼 쓰레기 같은 영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은근히 남자가 강간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다.


나는 영화에서 무조건 남녀가 평등하게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조디 포스터가 나왔던 피고인 같은 영화가 강간당한 여자들이 강간한 남자를 사랑하거나 심지어 그를 위해 창녀가 되는 영화보다는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만 강간을 당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걸 가지고 항문과 질의 차이라고 헛소리를 해댄다면 대체 질보다 항문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직도 여자를 강간할 때 등짝에 돌을 끼운다음 여자가 돌을 빼고 하자고 하면 강간이 아니고 바닥에서 강간할 때 신문지라도 깔자고 하면 강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 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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