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앙칼진 근대인의 불안, <트로이>-씨네21 458호-

아가씨VS건달 Lady VS Guy

앙칼진 근대인의 불안, <트로이>
 
●건달, 그리스와 신이 사라진 <트로이>를 보고 근대인의 히스테리를 읽다

 고대 그리스인은 왜 그리 많은 신들을 발명했을까? 그 속내를 알 순 없지만 민주주의를 발명한 사람들이니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하다. 유일신은 독과점의 안락함에 빠져 천상에 가부좌를 틀고 인간세계를 가만히 구경만 할 것이다. ‘주여 이제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간청해도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니가 와라 천상으로’라고 심드렁하게 한마디할 것이다. 그러나, 벤처기업 허가해주듯 되도록 많은 신을 만들면 인간 세상을 선점하려는 경쟁심 때문에 앞다투어 지상으로 내려올 것이다. 인간이 옆으로 밀어놓은 존재론적 문제의 해법을 저마다의 신상품으로 들고…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지상에서 열심히 판촉 하는 자유시장의 신을 느긋이 지켜보는 인간의 자리가.

 그리스인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슬쩍 신의 세계로 돌려놓는 외교술을 알았다. 천둥의 신 제우스? 천둥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니 그건 제우스의 변덕이다. 바다의 풍랑도 언제 돌발할지 모르니 포세이돈의 심술이다. 예쁜 여자를 보면 왜 인간이 정신이 나가는지 설명이 안 되니 미는 아프로디테의 소관이다. 어디 그뿐인가? 질투, 증오, 애착, 복수심 등등의 인간 감정은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신들의 장난질이다. 그러니, 인간은 신들이 장난에 권태를 느껴 인간 감정의 파노라마를 중단할 때까지 거기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책임은 신들의 몫이다.

 그리스인은 죽음, 육체, 감정, 아름다움 등 불가해한 삶의 조건에서 신의 그림자를 찾았지만 숭배하지는 않았다. 신은 인간세상의 불화를 책임지는 해결사이거나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일 뿐이었다. 그리스인은 신들에게 감정을 억압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기고도 그 결과에 대한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니체는 이 상태를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아폴론적 환각이 공존하는 세계로 찬미했다. 기독교를 아폴론적 환각의 편집증으로 봤던 니체에게 근대는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결핍된 불구였다. 그에게 근대의 치료제는 내 육체 안에 기거하는 변덕스런 디오니소스에게 있었다.

 <트로이>에는 그리스도 디오니소스도 없다. <트로이>는 만족을 모르는 앙칼진 근대인의 불안과 히스테리가 순진한 고대인의 자족을 질투한다. <트로이>에서 그리스의 신들은 다 거세되고 두명의 잘난 근대인만 도드라진다. 헥토르는 “아폴론이 활을 쏘느냐”며 무능한 그리스 신들을 부정하는 실용주의자다. 또, “사랑하는 여자와 자식을 위해 전장에 나가는 단순한 원칙”을 가졌으며, 제수인 천하절색 헬레네가 품에 안겨도 실수하지 않는 이성적인 가부장이다. 그는 근대를 지탱하는 이성주의, 과학주의, 가족주의, 국가주의 등등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구현한다. 아킬레스는 더 급진적으로 신을 부정해서 신전을 약탈하고 성상을 칼로 파괴한다. 그는 신에 대한 숭배 대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진정한 근대인이다. 역사를 위한 순교라는 미학적 이미지에 도착된 그는 살육을 통해 권력을 확인하지 않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근대의 파시스트 같다. 그런데, 그를 구원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여자다. 아킬레스는 ‘역사’를 포기하고 철수하려다 한 여자 때문에 트로이에 남게 된다. 사제인 그녀는 변덕스런 그리스의 신들 같지 않고 어쩐지 헌신적인 성모 마리아 같다. 아킬레스는 결국 마리아를 위해 순교한다. 기묘한 반전이다. 모든 근대성의 징후들을 강고한 헤브라이즘의 강보 속에 쓸어담으려는 이 엄청난 식욕. 이게 미국이란 나라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트로이>에는 그리스는 없고 미국만 있다. 정작 아킬레스의 신화가 들려주는 진짜 중요한 그리스적 은유는 빠져 있다. 아킬레스의 의미는 헥토르가 아니라 파리스와의 관계 속에 있다. 아킬레스의 아폴론적 환각의 급소가 연애밖에 모르는 파리스가 날린 단 한발의 에로스의 화살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고 아킬레스를 죽이는 건 파리스다. 어쩌면, 헥토르와 아킬레스라는 국가주의의 영웅들은 파리스의 연애담에 동원된 액션 엑스트라일지도 모른다. 파리스가 살아 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국가, 민족, 역사라고 소리치는 시간에 주변사람들과 연애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세계가 평화로울 텐데….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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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왈츠 출 줄 아세요?

르누아르 DANCE IN BOUGIVAL

 

 


르누아르 DANCE IN THE COUNTRY

 

짜잔- 이 그림을 하나를 위해.. ^^



보테로, DANCERS

진지한 표정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는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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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Dominique Davoust


 

 

 

 

 

 

 

 

 

 

 

 

Mother's Day for interflora, uk


 

 

 

 

 

 

 

 

 

 

 

 

Africa, for Donatello

 

 

 

 

 

 

 

 

 

 

 

 

Italy, for Donatello

 

 

 

 

 

 

 

 

 

 

 

 

Spain, for Donatello

 

 

 

 

 

 

 

 

 

 

 

 

Italy(2), for Donatello

 

 

 

 

 

 

 

 

 

 

 

 

Malta, for Donatello

출처 : klimt-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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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Classicism VS Romanticism

Classicism VS Romanticism

 

고전주의는 이전에 풍미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반한 미술 양식으로 지나친 장식적 성향을 띤 이전 사조와 달리 이상적인 미와 규범과 원칙을 다시 살려보자는 것이었다. 또한 문학적 성향이 강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가 작가의 감성이나 화법을 억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작가의 감성을 작품에 반영한 양식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한 낭만주의 작품은 역동적이며 정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고전의 미를 추구한 ‘고전주의’

복고풍은 거듭 유행한다. 유행이 극에 치닫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과거의 것에 대한 향수, 즉 복고적인 성향은 어김없이 찾아오곤 한다. 미니스커트가 극에 달하면 다시 긴치마가 유행하고 지나치게 전위적인 새로운 패션이 유행하면 결국 고전적인 복고풍 양식이 어김없이 찾아오듯….
그것은 진리다. 사랑도 그렇다. 한 사람과의 사랑이 알 만큼 알고 나면 결국 새로운 사랑에 탐닉하게 되고 그 사랑은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이성에 매료되곤 하니까. 결혼이라는 굴렁쇠가 없으면 그 사랑을 지켜나가기 힘들지 않다던가. 그처럼 사랑은 변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이전에 어떤 이성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다음 상대의 스타일이 결정된다. 미련이 남으면 비슷한 스타일에 집착하고, 질리면 정반대의 스타일을 원하듯. 어쨌든 이전의 경험은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미술이 중세의 암흑기를 거쳐 다시 이전의 그리스-로마 미술의 부활을 외치던 르네상스. 이후에 보다 활력과 자유로움을 강조하던 바로크. 그것이 극에 달해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치장적이기까지 하던 로코코 미술. 이미 장식성으로 극에 달한 미술 양상에 반격의 목소리가 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까지 하다.
르네상스가 고전의 부활을 외쳤듯이 로코코 이후 다시 그리스-로마의 정신, 고전의 미를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가면서 신고전주의 미술이 도래한다. 그래서 미술사에 있어서 고전주의란 주로 그리스-로마 시대에 형성된 양식상의 동질 성격을 추구하는 유파나 양상을 통칭하며, 현시점에서 주로 고전적이라는 의미는 그러한 고전주의 미술이 가지는 사실적인 묘사법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안정된 그림 스타일을 말한다.
그래서 흔히 현대 미술이 전위적이고 새롭고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선보이는 데 반해 그래도 붓과 물감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고전적이다” “아카데믹하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미술사에서 신고전주의는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럽 예술 양식으로 합리적 질서에 바탕한 통일성, 안정된 구축성, 조화가 이루어진 정밀한 표현, 부분과 전체와의 명확한 관계, 절대적-영원적인 특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창시자겸 지도자를 주저없이 ‘자크 루이 다비드’를 꼽는다. 지금 보는 이 그림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한눈에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로마 양식의 건물인 반원의 아치형 기둥은 화면에 안정감과 질서를 깔아준다. 중심에 주제를 담아내는 ‘아버지를 향해 맹세하는 세 아들’ 그리고 반대편엔 ‘실의에 빠진 자매들’ 의상 모두 로마 시대를 고증한 것들이다.
이 그림은 18세기 말 고전 미술의 복고적 성향뿐 아니라 엄격한 윤리적 미덕과 자기 희생을 통한 영웅주의로 이전의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그림과는 다른 성격을 보인다.
쿠라티어스 가의 세 아들과 대결하기로 한 호라티우스 삼형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다짐의 목소리가 쟁쟁히 들리는 듯한 이 한 폭의 그림은 애국심 고취와 정치적 역할까지 해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봄으로써 잠재적으로 자기 희생을 불사하게 하는 의식을 잠재적으로 고취당했던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는 확실히 사람들의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남자들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탐닉이 멈출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신과 영혼을 채워주는 여성 아닐까.

남자들이 대부분 엄마 같은 여성을 원한다는 것은 바로 과거 속에 자리잡은 정신적 기둥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는 어머니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같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이처럼 로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과거 대로마에서 살아 숨쉬던 그 정신과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그것은 단지 ‘로마’라는 틀을 벗어나 ‘고전주의’로 시대를 초월해 거듭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모성애’란 틀로 거듭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감성이 작품에 잘 반영돼 드러난 ‘낭만주의’

낭만주의 그림은 과연 낭만적일까?
낭만주의 그림은 매우 서정적이고 로맨틱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게 마련이지만 사실 낭만주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격정적이고 생생한 감정을 표출한 미술운동이다.
낭만주의라는 말은 18세기 말에 유행한 중세 모험담에서 유래했다. ‘아서왕’과 같은 중세의 모험담들이 라틴어가 아닌 로망스어로 쓰여진 것에서 ‘낭만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로맨스라는 어원에서 보듯 낭만주의는 문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낭만주의 회화는 실제로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 원정을 계기로 동방 세계에 대한 흥미와 동경으로 이국적 취향도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으로 꼽힌다. 신고전주의가 르네상스라는 고전주의 이후 로코코로 치달은 장식성에 대한 반발로 거듭 도래하였듯.
르네상스라는 고전주의의 엄격함에 자유를 외치며 탄생한 바로크처럼 신고전주의와 맞물려 신바로크라고도 불리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한다. 자유분방함과 유동적인 그림 양식으로. 그 대표적인 화가는 드라크루아.
명확한 형태, 안정되고 균형잡인 구성의 법칙을 요란하게 부르짖던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대담한 색채와 정열적인 표현을 하였던 그는 당시 상당히 격렬한 공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낭만주의의 대표주자였고 또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이 드라크루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할 만큼 미술사에선 현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이기까지 한 존재다.
‘그림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이라는 이 그림은 당시 이국적 성향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탄생한 작품이다.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의 왕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포섭되기 직전, 자신의 애첩들과 애마 모두를 죽이고 보물들을 한데 모아 불지르고 자신도 타죽었다는 비극적인 최후의 한 장면이다. 그 역사적 기록이 사진으로 남은 것도 아니고… 맘껏 자신의 상상력을 꽃피워낸 그림. 드라크루아는 최대한 격정적이고 격렬한 움직임을 포착해낼 수 있는 소재로서 그 이야기를 택했을 것이고, 더구나 모로코와 알제리 같은 나라의 여행을 통해 얻은 오리엔탈의 풍물과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종종 작품 속에 반영하곤 했는데... 이 그림 속에서도 그 이국적 분위기는 물씬 풍긴다. 확실히 이색적이고 격렬하고 자극적인 그림이다. 새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화가의 몫은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역사성과 이국적 분위기와 사랑과 죽음과 시각적 흥분과 심리적 자극으로 감상자들에게 극적 효과를 주는 이 그림. 영화가 없던 시기였지만 그야말로 영화 같은 그림 같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그 고통의 울부짖음, 격렬한 움직임과 사방에 번지는 피얼룩이 감상자의 상상의 날개를 타고 자유자재로 장면들을 전개하니까. 화가의 생생한 상상력을 통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 바로 이런 그림으로 가능한 것 아닐까?

글-한젬마(화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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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연인들 Ⅴ


 독수리로 변하여 가뉘메데스를 납치하는 제우스
제우스는 또 요정 '이피아나사(Iphianassa)'에게서 미남 '엔뒤미온(Endymion)'을 얻었다. 엔뒤미온은 후에 달의 신 셀레네의 애인이 된다.

레토를 겁탈하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손에 죽은 거인 니튀오스는 흔히 포세이돈과 요정 '엘라라(Elara)' 사이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아버지가 포세이돈이 아닌 제우스로 되어있다.

제우스는 여자들만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가뉘메데스(Ganymedes)'는 트로이 왕 '다르다노스(Dardanos)'의 아들이었다.
이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반한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하여 그를 납치하였다. 그리고 헤르메스를 가뉘메데스의 아버지에게 보내 그의 아들은 제우스 신 옆에서 잘 지내고 내고 있다고 전하게 했다.
제우스는 다르다노스에게 그 대가로 하늘을 나는 말을 선사했다. 가뉘메데스는 올림포스에서 불사의 몸이 되어 신들에게 술 따르는 시중을 든다.


그러나 천하의 난봉꾼인 제우스에게도 못 이룬 사랑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제우스는 운명 때문에 테티스와의 사랑을 못 이룬다. 테티스는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아들을 낳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우스가 경험한 첫번째 사랑의 실패였다.

제우스는 요정 '아스테리아(Asteria:별)'와의 사랑에서 두번째 사랑의 실패를 맛본다. 아스테리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레토와 마찬가지로 티탄 '코이오스'와 '포이베' 사이의 딸이다.
아스테리아는 헤라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우스의 끈질긴 추격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아스테리아는 유성(流星)처럼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그녀는 죽어서 '델로스(Delos)' 섬이 되었다. 자신의 사랑을 뿌리친 벌로 제우스는 이 섬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었다. 후에 헤라의 박해를 받아 아무 곳에서도 해산을 할 수 없었던 레토는 이 델로스 섬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고 몸을 풀게 된다. 혈연적으로 아스테리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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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추천. 펌.

꼬마요정 2004-07-0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