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셔야만' 힘을 얻는 존재가 있다.
여기, 인간과 같은 듯 다른 '하나뿐'인 종족으로 '신부'를 간곡히 원하는 존재가 있다.
여기, 다른 사람의 생기를 '빨아들여' '늙지 않는' 존재가 있다.
여기, 한 사람의 몸에 '선'과 '악'이 분리되어 들어있는 '위선적인' 존재가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드라큘라를 읽으면서 떠올린 책들이다.
먼저, 드라큘라.
끔찍한 존재이지만 매력적이다. 그냥 매력이 넘치는 게 아니다. 숨이 멎을만큼 매력적이다. 그가 앞에 있는 순간, 그 눈 안의 붉은 기둥을 보는 순간, 생각은 사라진다. 꿈을 꾸는 듯, 안개에 휩싸인 듯 이성은 날아가고 아무 생각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인간의 삶이 끝나면 강하고 아름다워진다.
기독교가 토속 신앙을 지배했다든지, 영국이 겪기 시작한 경제 문제나 새로운 강국들의 등장이 두려워 이민족이나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든지, 남성이 가진 섹스의 공포라든지, 이 모든 것이든 어쨌든 이 책을 둘러싼 해석들이 참 많긴 하다. 책을 읽은 사람들 수만큼의 해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결국 드라큘라의 피는 남았으나 그들은 보지 않는다. 정말 드라큘라는 사라진 것일까.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없애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교든 과학이든 무엇이든 동원한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내내, 경건한 듯 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아름다운 듯하지만 추악하고, 뭔가 확실한 듯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드라큘라는 어떤 존재인가. 왜 드라큘라는 '미나'를 선택했을까. 단순히 '복수'와 '번식'이 아닌 다른 끌림이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는 자가 선택한 존재.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알았던 것일까.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다니.. 그래서 난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랐다.
창조주마저 미워하는 존재.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존재.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
불행히도 이름조차 없다. 인간의 명예욕과 호기심 때문에 만들어진 그 존재는 그저 괴물이다. 이름이 없으니 불러줄 이도 없고, 누군가에게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의미를 만들었다. 복수. 자신이 외로운만큼 자신을 만든 이도 외롭고 고통스럽게.
추위와 굶주림은 오히려 나았다.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웠다.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이 없고, 내민 손은 처참하게 뿌리쳐졌다. 창조주가 왜 남자였을까. 그 시대가 추구하던 합리와 이성을 대변하는 존재가 남자여서이겠지. 그리고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프랑켄슈타인 때문에 고통받은 건 그의 약혼녀 엘리자베스. 그렇다면 여자가 그 괴물을 창조했다면 어땠을까. 하긴, 여자, 소수자, 약자가 투영된 게 괴물인데,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일까.
드라큘라 백작이 피를 마셔야만 한다면, 도리안은 다른 사람의 생기를 빨아야 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젊지만, 그림 속 사람은 늙어간다. 늙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 같지만 저주다. 도리안 그레이는 분명 아름다운 젊은이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외모 속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아름다움은 미끼가 되어 희생양을 찾는다.
관계도 없다. 여기 저기서 그에 관한 추잡한 소문이 돈다. 그가 농락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의 적도 늘어난다. 가장 아름다운 그 때를 유지하려는 그 강렬한 욕망은 어디서 오는걸까. 곁에서 도리안을 부추기는 헨리 경이 더 위선적이고 사악해보이는 건 나만일까. 그저 아름다움 그 자체인 도리안을 추하게 물들이는 건 현실적인 헨리 경일지도.
위선자하면 떠오르는 건 지킬 박사다.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다. 선과 악이 함께 한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자기합리화는 인간이 발명한 자기 자신에게 주는 면죄부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또한 살아남는데 강하다.
지킬 박사가 자신의 악을 분리한 이유는 소름끼친다. 자신은 완전무결하면서도 욕망은 모두 충족시키겠다는 욕심이다. 그러나 그 분리된 하이드마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 그가 실패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