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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연금술사'를 읽고 다시는 코엘료의 책에 손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상황은 가혹하게도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무료하게 보낼 수 밖에 없던, 주위에 아무것도 없던 그 두 시간. 내 앞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상, 하 두 권과 파울로 코엘료의 '11분'만이 놓여 있었다. 잠깐 고민했다. 둘 다 싫어하는 작가(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였으니. 결국 집어든 건 얇은 책이었다. 싫어하는 작가의 책을 상, 하 두 권 다 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11분. 읽으면서 자꾸 자꾸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지금 서점이라도 찾아 책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뭔가 다른 근사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그러나 한 번 펼치면 다 봐야 하는 이상한 습관상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어버렸다. 옆에 휴지통이 있었다면 당장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마리아. 어떤 책을 읽던,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여주 캐릭터다. 잔머리만 굴리고, 세상 모든 슬픔, 비탄, 근심 다 안고 있는 듯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허영심 가득한 여자.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멋지고 돈 많은 남자 만나 화려하게 사는 게 꿈인 여자. 진지하게 삶의 고민 따윈 절대 안 하는 여자. 그래 놓고선 운명이 자기를 어디까지 몰고 갔다는 둥 남 탓 하기 바쁜 여자. 정말 '재수없는' 캐릭터다. 이런 여자니 처음 보는 남자가 살짝 제안 했다고 돈 받고 몸을 팔지. 울긴 또 왜 우나. 차라리 사치를 부리고 싶어 돈 받고 몸을 판다고 하는 게 더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될 만큼,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이 말 그대로 '그냥' 창녀가 되었다.
창녀가 되더니 이제는 자신이 구원의 여신이라도 된 줄 아는지 경제학, 심리학 공부를 한다. 솔직한 말로 마리아는 정말 정말 운이 좋은거다. 실제 TV를 보거나 전해 듣는 이야기 속 창녀들은 공부 열심히 할 만한 여건이 안 된다. 하룻밤에 대 여섯 명의 손님 받고, 술을 마시고,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씻고, 집안일 좀 하고 밥 챙겨 먹으면 다시 일하러 가야 하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아처럼 창녀 일을 쉽게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어째서 마리아가 삶의 빛을 찾아주는 어머니나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질질 끌려다니다가 운 좋게 돈 모으고 (악덕업자를 안 만나서 떼이는 게 적은가?) 멋진 남자 만나고, 뭇 남자들의 정신적 위로가 되고...
성(性)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다. 종족 보존, 번식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고,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며, 쾌락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거나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쾌락만 강조해서, 성은 쾌락을 가져다 줄 때만 의미있고 구원이 되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차라리 마리아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보면서 책을 조금은 거친 손길로 옆으로 밀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