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피게니에·스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주연 외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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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단편 소설인 <정직한 법관>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본능을 억누르는 젊은 부인이 나온다. 그녀는 열 여섯에 오십대의 부자 상인과 결혼을 한다. 그녀는 교육도 잘 받았고 -물론 그 시대 미덕은 순종과 정숙이지만- 무엇보다 예뻤다. 그래서 상인이 갖고 있는 보석들을 더 빛나게 해줬고, 옷감들의 색을 더 환하게 해줬다. 이런 부인을 두고 상인은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는데, 떠나기 전 부인에게 애인을 둬도 상관없지만 명예를 아는 사람을 사귀라고 신신당부한다. 젊은 남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만큼 나이 든 남자에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인은 우연히 젊지만 믿을 수 있는 정직한 법관을 만나게 된다. 정직한 법관은 부인의 남편인 상인과 아는 사이였고, 부인을 금욕적인 생활로 이끌어 끝내 정염을 끄게 만들었다. 부인은 고행을 통해 자신이 강하고 선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법관에게 마음 속의 올곧은 미덕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라고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부인은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통해 젊은이가 갖는 정상적인 욕구를 억누르면서 지도자라면 사람들을 그렇게 이끌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법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괴테는 부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괴테는 로베스피에르가 억압적 금욕주의로 숙청을 자행하는 행태를 보았던 사람이니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다. 그것도 한 편의 장대한 시 같은 희곡이다. 운율에 맞춰 읽다 보면 아름답고 강단 있는 이피게니에가 저절로 떠오른다. 저주 받은 운명 때문에 타우리스로 끌려 와 자유를 잃고 그저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고 희망을 주는 여사제 말이다.

 

이피게니에는 그 유명한 탄탈로스 가문의 후손이다. 제우스의 아들인 탄탈로스는 신들의 총애를 믿고 오만방자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요리하여 신들을 대접한다. 화가 난 신들은 -아들을 죽여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자신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시험한 것에 화가 났다- 자신들을 기만한 탄탈로스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린다. 하데스 깊은 곳에, 엉덩이가 잠길만큼의 물과 나뭇가지에 과일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곳에서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이면 물이 사라지고, 배가 고파 나뭇가지의 열매를 따려 하면 나뭇가지가 더 높이 올라가버려 끝없는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형벌 말이다.

 

탄탈로스가 죽여 요리한 아들은 펠롭스인데, 신들은 펠롭스를 불쌍히 여겨 되살려낸다. 자신을 살려 준 신들에게 고마워하며 잘 살면 될 것을, 펠롭스는 오이노마노스 왕의 딸 히포다메이아를 탐내 오이노마노스를 죽인 뒤 왕이 되고, 자신을 도와 준 마부까지 죽이고 만다. 헤르메스의 아들이었던 마부는 죽으면서 펠롭스에게 아들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서로를 증오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데, 덕분에 펠롭스의 후손들은 탄탈로스에게 내려진 저주 외에 마부인 미르틸로스의 저주까지 떠안게 된다.

 

펠롭스의 아들인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했다. 그래서 펠롭스는 둘을 격리 시켰지만, 그가 죽고 나자 둘은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사랑과 전쟁 한 편을 찍고 난 뒤 왕이 된 이는 아트레우스였다. 비록 왕이 되었지만, 아트레우스는 저주 때문에 티에스테스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 친 동생 티에스테스를 찾아 화해 하고 싶다고 불러들였고, 고기를 대접했다. 티에스테스의 아들들로 만든 고기를 말이다.

 

티에스테스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딸인 펠로피아를 겁탈하여 아들을 낳게 했다. 그 아들이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바로 아이기스토스이다. 낯익은 이름이지 않은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공모하여 아가멤논을 죽이는 그 아이기스토스 말이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바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였다. 트로이를 치러가는 그리스 군대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가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자 탄탈로스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아가멤논의 자식이 이피게니에, 엘렉트라, 오레스테스이다.

 

저주는 실로 무서웠다. 아가멤논은 티에스테스의 아들인 탄탈로스(아들을 죽인 탄탈로스와 이름이 같을 뿐이다)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욕정을 느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아이와 남편을 무참히 죽이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훗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동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가멤논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러놓고 트로이 전쟁에 나서려는데,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바람에 여신의 분노를 사 딸인 이피게니에를 제물로 바친다. 아르테미스는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니에를 연기로 감싸 타우리스로 보냈고, 이피게니에는 타우리스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사제가 되어 그저 삶을 이어나간다. 괴테는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신화가 전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이피게니에는 신에게 감사하며 여사제로 살아가며, 타우리스에서 행해지던 이방인을 죽이는 풍습을 없앤다. 타우리스의 왕은 그런 그녀를 사랑하여 왕비로 삼고 싶어하지만, 이피게니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신의 사제로 남고 싶어한다. 그러던 중 이방인 둘이 타우리스로 떠내려왔고, 왕은 이피게니에를 굴복시키려 이방인을 처형하는 관습을 되살리려 한다. 제물로 바쳐질 이방인을 만난 이피게니에는 그 이방인 중 한 명이 자신의 동생인 오레스테스임을 알게 되고 타우리스를 빠져나갈 방도를 찾는다.

 

여기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신화에서는 이피게니에가 꾀를 내어 오레스테스와 친구인 필라데스를 구해내는데, 괴테는 필라데스가 꾀를 낸 것으로 그린다. 그리고 거짓을 말할 수 없었던 이피게니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타우리스 왕을 설득한다.

 

그저 조금 뛰어날 뿐이었던 이피게니에는 스스로가 가진 도덕과 신념을 바탕으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고귀해진다.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테스에서 저주가 끊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거짓과 기만, 탐욕과 무절제로 빚어진 참혹한 사건들은 갖가지 저주를 불러왔고, 그 저주를 끊을만큼의 덕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저주가 시키는대로 만행을 저질렀다. 오레스테스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신탁을 거역하지 못했고 결국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니에스에게 쫓긴다.

 

삶을 놓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웠던 오레스테스는 저주를 풀려면 타우리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가져오라는 신탁을 받는다. 여신상을 훔치러 갔던 그는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누나 이피게니아를 만났고, 그녀야말로 저주를 풀 열쇠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피게니에의 순수함과 고귀함은 왕 뿐만 아니라 필라데스, 오레스테스 등 모든 이들이 그녀를 우러러보게 하고, 그녀의 말대로 하도록 설득한다. 이치에 맞는 말로 왕을 설득하고, 자신과 동생의 목숨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학살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은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자, <정직한 법관>에서 괴테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지도자는 정상적이지 않은 고행을 강요하거나 지나친 이성을 강조하는 이가 아니다.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줄 알지만, 때로는 감성에도 호소할 줄 아는 이다. 또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자신이 희생할 줄도 아는 이다. 괴테가 생각하는 지도자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지도자란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요즘 상황과 딱 맞는 주제가 아닌가 말이다.

PP.267-268 거짓을 말하다니! 거짓은 다른 진실된 말처럼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니,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지 못하고, 몰래 거짓을 꾸며내는 자를 불안하게 하고, 그 튕겨져 나간 화살은 신의 손으로 방향이 바뀌어 되돌아오고, 쏜 자의 가슴을 맞춥니다.

PP.286-287 다만 남자의 거친 언어, 비정한 말에 순종하는 것만은 거기서도 여기서도 배운 바 없습니다.
......
여인의 연약함을 즐기는 그 폭력성을 변명하지 마십시오. 저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태어났습니다.

P.293 선을 행하는 데는 주저가 필요없지요.
선을 악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의심입니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느끼는 대로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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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테의 작품이 너무 고전적인 색채가 강해서 전 이 책을 읽는 게 힘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재미없었어요. 억지로 읽긴 읽었는데 리뷰로 뭐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피장파장>이었어요. ^^

꼬마요정 2017-03-09 10:37   좋아요 0 | URL
전 <스텔라>가 그닥 재미있지 않았어요.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와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두 여자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별로 와 닿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에피메데스>는 내용보다 문장들이 너무 좋았구요. <피장파장>도 재밌게 봤습니다. 저 시대도 보니 굳이 결혼을 왜 해야했나.. 이런 생각도 들구요. 희곡이라는 게 묘하게 매력적이더라구요. 압축된 문장들도 좋고, 내용 따라가기도 신나고.. 참 재미나게 봤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리스 신화를 좋아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