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열린책들 세계문학 182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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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풍자와 해학은 대놓고 말하지 못할 이야기조차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도록, 가려운 데를 긁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있었던 광주 비엔날레 사건이나 우신예찬, 혹은 바보예찬 역시 그러한 풍자를 가득 담고 있다. 분명 신분 제도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싶은 요즘, 우리에게도 진정한 인문주의자이자 유쾌한 해학꾼인 에라스무스 같은 존재가 절실하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자신이 쓴 에라스무스 전기에서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평가한다.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은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 현자의 본질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과 최고를, 학문과 문학 영역에서 그리고 세상사와 정신의 영역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의미한다고.

 

에라스무스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에라스무스를 사랑하는 스위스는 그가 태어난 해를 1466년으로 지정해 1966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념했다. 반면에 그가 태어난 곳인 네덜란드는 1469년을 출생연도로 결정하여 1969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렸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나 사용한 언어는 자라면서 배운 라틴어였고, 스위스 바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종교의 광기로 가득하던 시절, 고독하게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던 그는 자신과 교류했던 많은 이들이 잔혹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이 죽어나가는 것처럼 신음한다.

 

토마스 뮌처가 잔인하게 고문 당해 죽고, 우신예찬을 쓸 수 있게 영감을 준 토마스 모어가 도끼날 아래에 죽고, 서신을 교환하던 츠빙글리는 맞아 죽고, 제자였던 베르캥은 불에 타 죽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살아남아 자연적인 죽음을 맞는다. 아마도 극단을 선택하지 않고 평화와 자유를 추구한 그의 정신과 태도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무시무시한 시대에, 저 우신예찬이라는 책을 쓴 그는 여러 차례 협박 편지를 받았고,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며 이 책은 금서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대립하여 싸우는 방식보다 상대방을 구슬리고 공감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비난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첫 번째 성서를 교회의 지배자인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하였고, 교황으로부터 기쁘다는 말과 칭송을 받는다. 그의 유화적인 천성 덕분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실 몇 번이나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화형대에 올랐을 일들을 잘 헤쳐 나간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그 시대 권력자나 성직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절친한 지인이었던 토머스 모어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한다. 먼저 영감을 준 모어에게 감사를 표하고, 모이라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뭔가 비장한 어투로 어리석은 여신 모이라가 말한다. 일종의 예식 연설로 화자인 모이라가 자신을 예찬하는 형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이라는 나팔수가 되어 자신의 위대함과 어리석음이 가져온 평화에 대해서 열렬하게 칭찬한다. 이 자체부터가 웃음이 나는 바,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어찌나 우쭐거리면서 자신을 칭찬하는지, 모이라가 언급하는 인물들만 해도 쟁쟁하기 그지없다. 호메로스는 기본이고, 페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 철학자들, 키케로…….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인물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이라는 가차 없이 그들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나라를 세우거나 구한 것은 세이레네 가운데 가장 달콤한 명예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여자를 어리석다고 비하하는 어리석은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을 꼬드겨 자신의 뜻대로 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을 이야기하고, 어린아이들, 노인들, 아부를 사랑하는 군주들, 장황한 말들을 좋아하는 궤변론자들, 스콜라 철학자들, 교회 학자들, 수사들, 장사꾼들을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 어리석은 여신 모이라를 따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하지만 더 우습기도 하지만 섬뜩하기도 한 것은 교황들을 이야기할 때이다. 그는 대놓고 교황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왜곡하고, 역병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지금 교회의 적이라고 콕 집어놓고 말이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웃으면 왠지 기분 나쁘고, 화를 내자니 마치 자신이 진짜 나쁘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우리야 그저 즐기면 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는 당사자들은 아마 얼굴이 붉어지고 심기가 불편했을 터.

 

에라스무스가 이야기하는 것인지, 어리석은 신 모이라가 이야기하는 지 아리송하게 하여 누군가가 딴죽을 걸면, 에라스무스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아니라 어리석은 신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결코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그는 기지를 발휘할 줄 아는, 진정 자유로운 세계주의자였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그가 어리석음에 바치는 이 유쾌한 찬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문주의자들, 종교 개혁가들, 이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 후련함과 웃음을 선사했다.

 

이 책이 나온 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풍자와 해학이 유효한 것을 보면 에라스무스는 진정한 천재이자 인간을 통찰한 인물이 아닌가. 이 연설은 마지막까지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엄청난 언어의 잡동사니를 늘어놓았으니 여태까지 한 말을 나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내가 이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옛말에 <같이 마시고 다 기억하는 놈을 증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새롭게 고쳐 <다 기억하는 청중을 나는 증오한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안녕히! 박수 치라! 행복 하라! 부으라, 마시라! 나 우신의 교리에 탁월한 여러분이여.(p.197)

 

이 얼마나 유쾌한 언사인가. 우신의 교리에 탁월한 여러분이여라니. 이제 우리는 이 연설을 읽고 나를 욕한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민하는 순간, 어리석은 여신조차도 다 잊어버린 일인 것을 생각하다가 괜히 어리석음의 극치에 있는 인간이 될 테니 말이다. 누군가 그랬다. “쥐”는 쥐일 뿐이라고. 그 말에 버럭 한다면 자신이 쥐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렇듯 유쾌함이 존재하는 데 위안을 얻는다.

 

 

 

 

 

*.(스테판 츠바이크, 정민영 옮김, 『에라스무스 평전』, 아롬미디어(2006),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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