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택<바닥-길버트 그레이프> 2004, 종이에 수묵채색, 190x180cm,
작가 소장
 
늘 어지럽히는 아이들로 인해 짜증이 날 때

‘꾸러기’란 잠이나 심술 같은 명사 뒤에 붙어 ‘그 사물이나 그런 버릇이 많은 사람’이란 뜻을 지닌 접미사입니다. 잠꾸러기, 심술꾸러기, 장난꾸러기, 욕심꾸러기, 말썽꾸러기 같은 말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이렇게 꾸러기로 지칭되는 사람은 대체로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고려해 그렇게 드러내놓고 심술이나 욕심을 부리지 못하지요. 아이들은 심술을 부리면 끝까지 심술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면 끝까지 말썽을 피웁니다. 그래서 꾸러기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들이 집안을 어지럽힐 때는 끝까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끝없이 집안을 어지럽힙니다. 아무리 열심히 뒤치다꺼리해도 소용이 없지요. 가뜩이나 다른 집안 일도 많은데 이렇게 어지럽히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아직 철모르는 아이에게 그런 습관을 들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어른도 제대로 치울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아이들의 환경이 너무 깔끔한 것보다는 다소 어지러운 편이 정서 발달에 좋다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고 보면 무작정 깔끔한 아이로 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말로만 “정돈 좀 하고 살아라” 하고 넘어가다 보면 방금 치운 집안도 금세 다시 어지러워지는 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됩니다. 작은 허드렛일이라도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면 무기력증 속에 삶이 소진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한국화가 유근택이 그린 <바닥-길버트 그레이프>는 자잘한 사물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마루바닥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잔뜩 어지럽혀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난장판이 된 집안을 치우려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입니다.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널브러진 물건들이 아이들 장난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크기만 작지 소파나 서랍장 같은 것도 보이고 심지어 불타는 집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장난감과 더불어 장난감만큼 작아진 현실의 사물들이 바닥에 함께 내던져진 초현실적인 풍경인 것입니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요?


제목에 ‘길버트 그레이프’란 말이 들어 있는 걸 보면 이 작품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 같은 내 인생’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라세 할스트룀 감독의 성장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무기력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희망도 기쁨도 없이 살아가는 한 청년의 삶을 조망한 영화입니다. 아버지가 자살한 뒤 폭식증에 걸려 비대해진 어머니, 정신지체인 남동생 아니, 노처녀 누나와 반항아 여동생 등 길버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동시에 그의 삶을 갉아먹는 존재들입니다.

그 울타리 속에서 별 변화 없이 체념하며 살아가던 길버트에게 어느 날 베키라는 캠핑족 소녀가 나타납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길버트는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다가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만, 결국 가족의 연에 이끌려 되돌아오고 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거구의 어머니를 장의사에게 맡겨 이웃의 놀림거리가 되기 싫었던 가족들은 집째 불태워 어머니를 화장합니다. 그리고는 길버트와 베키는 아니와 함께, 누나는 여동생과 함께 각각 새로운 삶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림 왼편 상단의 불타는 집은 영화에서 어머니를 화장하기 위해 태운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른쪽 하단의 세 사람은 길버트와 베키, 아니를 연상시키고요. 그 사이에 수많은 물건들이 지난 세월에 대한 상념인양 널브러져 있습니다.


가족은 희망이고 기쁨이면서 또 짐이고 업보입니다. 자식을 기르는 일은 무한한 행복감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과 피로감을 동시에 가져다주지요. 아이들이 천사같이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것은 분명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사실 아이들이 물건을 어지럽히면 아이가 그걸 치우게 하거나 부모가 직접 치우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가정의 불화나 기타 아이가 지기엔 버거운 짐으로 아이의 영혼이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다면 그것은 다시 정돈하기가 쉽지 않지요.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더더구나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영혼이 맑고 밝기만 하다면 까짓 것 좀 어지럽히며 놀면 어떻습니까? 집안이 어지럽지 않은가보다 아이의 영혼이 어지럽지 않은가를 먼저 살피는 현명한 부모가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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