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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쉽게 읽으려면, 신라 시대의 풍속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색공이란 단어와 대원신통, 진골정통 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지소태후와 사도황후, 미실 등이 벌이는 권력 싸움에 동참할 수 있다.
색공은 색으로 섬긴다는 의미이다. 색공의 의무를 지닌 집안은 왕에게 색에 대해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그 길로 인도해야만 한다. 미실 역시 그런 색공지신이었다. 사사로이는 남편인 세종전군과 화랑 사다함 등과 연을 맺었고, 신하된 자로써의 도리로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모셨다. 비록 남편이 있는 몸이라 하나 왕이 부르면 달려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상으로 볼 때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태후에게도 애인 여럿 있었고, 다른 여러 부인들에게도 애인들은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던 시대, '신국의 도'라 불리는 풍속의 잣대가 있었던 시대. 형사취수의 관례, 근친상간 등이 허용되던 시대. 그 시대가 바로 신라시대였고, 그것을 기록한 문헌이 『화랑세기』이다. 그리고 유교에 물든 세대가 이 책을 위서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성 풍습 때문이었다. 여기서『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가릴 마음은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김대문은 실로 귀한 기록을 남겼다고 본다. 이 책을 일본에게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논쟁은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모계로 이어진다. 쉽게 말하면 첩의 자식은 대원신통이고, 정실의 자식이면 진골정통이다. 그 둘의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가 바로 미실의 시대였다. 사도황후, 지소태후, 미실 이 세 사람이 벌이는 권력 쟁탈전은 남자들을 쥐고 흔드는 여걸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대원신통이니 진골정통이니 하는 모계의 신분을 따지는 풍습은 그 뒤로는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대충 시대를 알고 나면 이해하기는 쉬워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실은 이 색공지신의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사다함을 사랑하지만, 세종전군을 모시기 위해 사다함과 사별해야만 했다. 세종이 그토록 미실을 사랑했지만, 진흥제를 모시기 위해 미실은 궁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미실은 자유를 위해 권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세상을 지배한 여인들의 이야기인 서태후, 측천무후에 뒤이어 세 번째로 읽은 미실. 나는 이 세 이야기가 같은 양상을 보임에 현기증을 느꼈다. 결국 그들은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도구로 권력을 선택했고, 그 권력에 침잠해갔다. 셋 다 여걸이면서 포부가 컸고 배짱이 두둑했다. 다만 미실이 앞의 두 여인과 달랐던 점은 피와 고독의 부재였다. 서태후와 측천무후가 권력을 얻기 위해 여러 사람을 죽였다면, 미실은 화합을 중시했다. 자신이 가진 색을 이용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사로잡아 화합으로써 자신을 따르게 했다. 서태후와 측천무후가 권력에 다가가면 갈수록 지독한 고독을 느꼈던데 비해 미실은 언제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애인들이 곁에 있었다. 이러한 차이를 가져다 주는 이유는 바로 신라 사회였다. 이미 유교로 무장한 시대를 살았던 두 여인은 끝까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데 반해, 미실은 유교가 들어오기 전 시대, 자유로운 여성의 시대를 살았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왕을 좌지우지한 여성에게 떨어지는 건 팜므파탈이라는 악명 뿐인가 보다. 가장 자연스러운 여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둥, 여성 인권 신장에 한 켜를 보탠 혁신적인 성과물이라는 둥의 평론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이 느끼면서 감탄했던 점들을 나는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바라는 건 이상이었다. 서태후에게도 측천무후에게도 없던 원대한 이상. 진흥제가 품고 있던 삼국통일의 꿈, 이상. 세상을 지배하는 미실이 가슴에 품었던,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세계는 어떠한가. 어째서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을까. 오로지 색으로 권력을 잡아 그 권력을 유지하기에 바빴던 그녀. 그녀의 무엇이 자유로운 혼이며, 그녀의 어떤 행동이 여권 신장에 보탬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섹스의 굴레만 벗어나면 자유로워지고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순신, 장길산, 삼국지 등 남성을 다룬 역사 소설을 보면, 정말 다르다. 총명함과 용기, 이상이 그들을 평가하는 데 큰 위치를 차지한다. 서태후, 측천무후, 미실 등을 보면..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성이면서 권력을 잡았으니, 천하를 호령했으니 대단하다이다. 아, 또 하나 미모 역시 출중하다. 게다가 그녀들이 권력을 잡아야 했던 이유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녀들이 총명하든, 원대한 포부가 있든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과 권력 암투에서 승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잔인했나, 인륜을 저버렸나, 정치를 얼마나 못했나 이런 것들로 그녀들을 폄하한다.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지배했던 대부분의 왕들이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성군으로 칭송받지 못한다. 조선 시대의 세종대왕이 성군으로 칭송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덕 여왕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