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야사야(生也死也), 본래 한 물건이 없는데 무엇이 생(生)하고 또 무엇이 죽는단 말인가?
서산(西山)대사의 게송(偈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닭소리를 들으니 장부 하는 일을 모두 마쳤도다.”
이 장부의 일이란 바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이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生)이고 사(死)냐. 내 몸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분명 나는 아니다.

다만 나라고 생각할 뿐, 먼저 나를 밝히자. 무엇인가 나의 몸을 끌고 다니는 것, 그것이 어떻게 생긴 물건이냐.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종하처거(死從何處去)오.”

생(生)이 온 곳이 있다면 가는 곳도 있을 터, 생이란 허공에 뜬구름과 같다고 했다. 항상 뚜렷이 드러나는 한 물건, 그것은 허공에 뜬구름과는 다르다.

맑고 깨끗해서 생사에 따르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다만 없는 생사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원래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해와 달과 별도 인간이 그렇게 불러서 있는 것이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물건의 이름조차 없다. 무릇 삼라만상의 이름을 생각으로 지었으니까 그 생각이 끊어지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이 주장자 소리나 똑같은 것이다.

“이차문래(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하라.”

생각을 내지 말라. ‘나’라는 물건을 쥐꼬리만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자기인식의 확립이 선이요, 그 선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불교다.

데카르트의 명제와는 정반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 빈 것인가? 생각 않는 자체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본성이 여기에 있다.

티끌 하나 하나가 묘체(妙體)를 지니고 있으며, 마땅히 다 구족되어 있다고 한 조사의 말과 같이 삼라만상의 이름은 각각이 그 본성은 똑같은 것이다. 즉 생각이 비어 있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동일체(혹은 통일체·전일체·순일체라고도 한다)화된 것의 이름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끊으면 된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끊느냐. “이 뭣고?” 생각이 꽉 막히고 커다란 의심덩어리를 끌고 들어갈 때에는 벌써 하나의 원점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이다. 이 원점을 마음이니, 부처니, 진여·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대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따름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고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다. 영산회상에 앉아 1천2백 대중을 향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부처님에게 염화미소(捻花微笑)를 했다는 마하가섭존자처럼 말이다.

내가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것과 2천여 년 전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은 같은가, 다른가. 삼라만상은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했다.

그러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어느 제자가 조주스님에게 불었을 때, 조주스님은 무(無)! 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때의 ‘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서구 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이다. 이 속에서 모든 사상과 주의가 다 나왔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본령인 인본주의 사상은 공산주의라는 사회혁명과 자본주의라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커다란 사회 변천이 가져다 준 것은 인간의 기계화와 이로 인한 윤리도덕의 타락이다. 천륜이 끊어진 상태에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영리주의가 판치는 물질문명은 공해라는 새로운 대적을 만들어 냈으며 인간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은 입으로는 세계평화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신이 깊다. 대자연과 함께 살자는 명제 아래 탈취당한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고 나선 젊은이들 사이에 동양의 선사상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선은 불교의 전용물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다 반성하고 ‘생각을 쉰다’
는 소승선(小乘禪)의 경지까지는 들어간 셈이다.

“만법이유심조(萬法而唯心造)이다.”

시공(時空)조차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동서남북이 다를 뿐더러 백 사람이 무지개를 보고 느끼는 감각 또한 각각 다른 이유다.

“아유필유 아멸필멸(我有必有 我滅必滅)이다.”

내가 없어지면 우주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몸 속에 매달렸던 무거운 돌로 꽉 막힌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대법안(大法眼)의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며 ‘심즉불 불즉심(心卽佛 佛卽心)’을 금과옥조로 삼던 그 제자 현축도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 스승의 깨우침에 무릎을 꿇었다지 않던가.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곧 불교요, 선의 본지이다. 나를 내 마음속에 끌고 다니지 말고 환경에 집착하지 말라. 그래야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움질을 하게 되고 정상화가 안 되는 것이다.

견해를 버리면 즉 ‘나’라는 것을 없애면 대자연의 파괴도 아니하게 되고 세계평화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출처 : 참선도량화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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