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여인은 머리를 올리고 두 손을 목 뒤로 한 채 목걸이를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몇 번 애쓰다 결국 실패하고, 그들의 사랑은 끝났다.

 

아,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제롬과 알리사를 보는 건 잘못된 일일 것이다. 당시 시대상과 분위기를 보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다. 제롬은 알리사가 거울을 통해 그를 발견하기 전에 그녀의 목걸이를 대신 채워주는 것으로서 그의 존재를 알렸어야 했다.

 

그런 식의 머뭇거림은 결국 그들의 사랑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급기야는 서로가 결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사는 상사병으로 죽어버린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어린 제롬은 뷔콜랭 숙모의 그 야릇한 손짓에 강한 성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뷔콜랭 숙모를 똑같이 닮은 알리사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를 뷔콜랭 숙모와는 다르게 완벽한 성녀로 생각하는 건지도. 그가 사랑하는 건 환상 속의 알리사, 그가 가진 왜곡된 욕망을 감춰줄 수 있는 이미지의 소녀.

 

알리사는 정숙하지 못한 어머니, 뷔콜랭처럼 될까봐 두려워한다. 엄마가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고 남겨진 아버지는 무능력하게도 딸들을 유기한다. 엄마의 빈자리를 딸로서 메우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완벽하게 메우려 하는 알리사의 강박증은 그 집에 닻을 내려버린다. 그럼으로써 어느샌가 피해자 증후군을 앓게 됐는지도 모른다. 행복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자신을 비탄 속에 빠트리면서 자학하는. 언제나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떠난 뒤 남겨진 그 상처를 되풀이하면서.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이 곳곳에 묻어나는 유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소설이라지만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속된 말로 '밀땅'하는 수준이었다면 넘어갈 수 있었을거다. 약혼의 약자만 나와도 눈물을 흘리며 약혼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라고 손사래를 치며 도망가는 알리사.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하게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회피해 버리는 제롬. 처음에는 가정 상황 때문에, 다음에는 쥘리에타 때문에, 그리고는 제롬의 학업 문제 때문에, 그러다가 급기야는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놈의 약혼은 밀리고 밀려서 흔적조차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 묘사되고 있는 어떤 감성적인 언어보다도 더 지독하게 슬픈 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죽을만큼 고통스럽게 억지로 헤어짐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제롬은 생각한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완벽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녀가 약혼을 거절할 때마다 자신을 갈고 닦기에 여념이 없다. 단 한 번도 강하게 손 내밀어 잡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대신 걸어주지 않은 것만 봐도 사실 제롬은 이런 상황이 이상적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약혼이나 결혼이라는 현실보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보기를 원하는 부분만 보고, 상상하여 이상적인 상대방을 만들어내는.

 

거기에 비해 알리사의 기도는 거의 자학 수준이었다.

 

"하느님, 무기력한 제 마음은 제 사랑을 억누를 길이 없사오니,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그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힘을 제게 허락해 주옵소서..."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기도란 말인가.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은 말라죽어 가면서, 제롬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런 기도라니. 서로 사랑하면서, 그 사랑에 장애물이라고는 없는데, 사랑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힘을 달라니... 그러고 싶지 않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있는 꼴이지 않은가.

 

이런 그녀가 과연 신을 더 사랑했을까... 의문이다.

 

쥘리에타의 삶 역시 평범하지는 않았다. 알리사가 자신의 엄마를 닮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쥘리에타는 그 삶을 따랐다. 사랑하는 제롬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알리사와 제롬의 행복을 위해 거짓 행복을 꾸몄던 그녀야말로 오히려 알리사가 추구하던 희생을 연기한 셈이다. 그 결과 그녀는 세상사에 지쳤을 때 숨어드는 방을 만들었고, 그 방은 알리사의 방과 똑같다. 자신의 부정한 엄마와 똑같이 생긴 알리사의 방과. 그리고 제롬은 그 방으로 인도된다.

 

그래... 이것이 너희 둘이 원하는 결론이었던 거니? 이게 둘이 함께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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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6-0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무척 반가워요!
제가 사춘기 무렵에 [좁은 문]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었거든요.
그땐 아직 어렸기 때문에(혹은 순진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이 정말 감동적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시간이 좀 더 지나서 그 생각은 바뀌었지만,
이 책이 당시에 저에게 주었던 감동만큼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꼬마요정 2017-02-07 15:41   좋아요 0 | URL
앙~ 감은빛님 무척 반가워요~^^
저도 그런 책 있어요. 헤세의 지와 사랑은 정말 감동적이었거든요. 지금은.. 그런 감동이 전혀 없지만요ㅠㅠ 그래서 너무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