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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 옮김 / 부키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폴 크루그먼의 무기는 바로 교과서이다. 그의 이론이 논리정연하면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교과서를 인용하며, 교과서의 내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 학문의 기본이 되는 내용으로 무장한 그는 가장 강력한 그 무기를 사용하여 현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일부 학자들과 시류에 영합하여, 혹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기업인,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대표적인 부류가 공화당쪽 정치인과 프랑스 정치인들, 공급 중시론자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앞 뒤 안맞는 논리를 내세워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정책을 내놓거나 그 정책들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앞 뒤가 안맞는 것임을 뻔히 알게 되는 이론들을, 현란한 말과 화려한 자료들을 내보이며 대중들을 현혹시킨다. 크루그먼은 그런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는다.
이 책은 주로 1996년, 97년에 기고한 글이나 강연을 묶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 시점에서 보자면 이미 끝나버린 일들도 있고, 약간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글들도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과거, 현재, 미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글이든 현재의 글이든 다 쓸모가 있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의 말 그대로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니까.
경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들 알만한 내용이다.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자는 거나 환경보호비용을 부담하자는 거나 다운사이징의 폐해는 과장되었다거나 유럽 통합에 대한 불안한 미래를 이야기 하는거나...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가진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크루그먼 자신은 그 문화 속에 젖어 살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 경제의 모든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미국의 움직임이 세계를 변화시키며 여전히 미국은 세계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말이다.
다운사이징이나 초보적인 경제지식을 설명할 때는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가며 재미있게 글을 전개해 나가던 그가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프랑스의 이야기를 할 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보기에 어차피 정책이란 다 믿을 것이 못되건만. 경제란 실체없는 괴물은 신기하기 그지없어서 예상을 빗나갈 때가 많다. 우리는 늘 경제를 유형화 시켜보려 애쓰지만, 늘 과거 속에서 맴돌뿐이다.
세계화에 대한 그의 통찰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지만, 어딘가 가진 자들을 옹호하는 냄새가 난다. 그 예가 제 3세계의 난민들이 세계의 부를 더 나누어 가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주장을 따라 논거를 읽어가다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경제란 우리가 정확히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신비로워서 말이다.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그가 이 책 앞에서 주장한 바와도 모순된다. 세계의 20% 중에서도 20%만이 실질적인 부를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을 피력해놓고서 뒤에서는 제 3세계 난민들이 부를 더 많이 나누어 가진다는 건 모순이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이 책에 별 넷을 주었다. 마지막 장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 '과거를 돌아보며'는 특이한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다. 100년 뒤의 내가 과거를 돌아보며 경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재치있고 흥미를 돋우는지 나는 이 장이 제일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의 예측이 아마 대부분은 맞아떨어지지 않을까..조심스럽게 판단해 보기도 한다.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라. 한 번쯤 이런 얇은 경제 에세이 한 권 읽어보는 것도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