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계자가 (勿稽子歌)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때 물계자가 지은 노래.

서정적인 내용의 거문고곡으로, 나라의 노래가 아닌 개인의 노래로는 첫 작품이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지만, 가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계자가'라고 한 듯하다. 가사는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노래에 얽힌 이야기가 나와 있다.

  

[배경설화]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한 지 17년 임진에 보라국, 고자국(지금의 고성), 사물국(지금의 사천)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물계자가 포상, 갈화 싸움에 전공이 컸으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포상이 되지 않았다. 누가 물계자에게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 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태자가 당신을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시오."
하고 물으니, 물계자는 대답하여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하였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지 않겠소."하니 그는 말하길,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리는 것은 지사(志士)의 할 바가 아니요.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요."하였다.

20년 골포국(지금의 합포) 등 세 나라의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지금의 울주)를 쳤다.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그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사생을 돌보지 않음을 충(忠)이라 하였소. 보라(지금의 나주)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러나 나는 일찍이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요.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누(累)가 아버님께 미쳤으니, 가히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를 잃었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설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서 산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벽을 슬퍼하고,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짓고 하였다. 그곳에 숨어 살며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 <삼국유사> 피은(避隱) 제8 '물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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