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은 신라 문무왕 18년(서기 678년) 의상(義湘)대사에 의해서다.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을 화엄사상(華嚴思想)으로 교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화엄십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문무왕 18년에 창건된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한 창건의 연기(緣起)는 이러하다: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이와 같이 신인의 현몽(現夢)에 의하여 창건된 신라 당시의 범어사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서, 미륵전(彌勒殿),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왕신전(天王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鐘樓), 식당(食堂), 강전(講殿), 목욕원(沐浴院),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지고 요사(寮舍) 360방이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로서 명실상부한 국가의 대 명찰이 되었다.

사적기(事蹟記)에서는 당시의 규모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아래에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그곳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와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으니 그것이 곧 미륵전이다. 또 미륵전 서쪽에 3간의 비로전을 세우고 그 곳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간의 대장전을 세우고 팔만대장경 3본(三本)의 화엄경3장(三丈)의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도량의 상층과 중간층에 별처럼 늘어섰으니 그 밖의 전각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관(地官)은 의상스님이고, 공사를 총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은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였고,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은 담순귀(曇順鬼)등이었다.

상층의 길이는 220척이고 높이는 10척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층계는 19층이었다. 미륵전(彌勒殿)은 석휘(釋暉) 화상과 정오(正悟) 화상이 화주가 되어 세운 바이고 천왕신전(天王神殿)과 주불전(主佛殿)은 지연(智衍) 화상과 연철(然鐵) 화상이 화주가 되어 창건하였다. 불상에 금을 입히고 대장전(大藏殿)을 조성하였으며 대목의 일을 관장한 사람은 광숭(廣崇) 화상이었다. 그리고 혜등(蕙燈) 화상은 대장전의 시주자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강전(講殿) 3간을 세우고 주불 석상에 금을 입힌 것은 동국(東國) 왜인(倭人)이었다. 남협당과 좌우의 향화방 5간과 시간을 알리는 계명방 5간을 동쪽 언덕에 세웠다. 절의 계단은 길이가 3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다리의 층계는 23층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층에 5간과 위층의 3간에다 40법체제신과 사천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는 모습의 소상을 만들어 세웠다.

좌우에 종루가 각각 2층이며 그 주위 좌우에 행랑이 세워졌는데 서쪽으로 9간, 북쪽으로 9간, 식당 9간 등은 범능(梵能)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삼당은 석존(釋存) 스님 혼자 힘으로 창건한 것이고, 불상과 대당(大堂), 이협당(二俠堂)의 그림은 참연(參連) 화상이 이룩한 것이다.

3간 계단의 돌을 다듬은 사람은 혜초(惠超) 화상이다. 삼당(三堂)의 유성(流星), 천성탑(天星塔) 등은 억생(億生) 화상이 주무를 맡았다. 목욕원 3간과 석조(石槽) 절 밖의 철당(鐵幢) 33층과 그 표면의 33천을 조성하고 절 이름을 범어사라고 하였다. 또 전답에 관한 문서는 김생(金生)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또한 문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사원의 전답은 총 360결이고 노비는 100호가 늘 360방에 거처했었다.
항상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또 화엄신중을 염송하여 왜인들을 진압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사적의 기록을 일일이 증거할 길이 없으나 아무튼 창건 당시의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 짐작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화엄신중을 염송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의 구도와 건물 배치 등은 반드시 화엄의 사상을 기저(基底)로 하여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지상에 실현해 본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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