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시인 김삿갓
홍경래난이 있고부터 15 년 흐른 뒤인 1827 년(순조 27 년) 어느 날, 강원도 영월(寧越) 동헌(東軒)에서 백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걸린 시제는 홍경래난때 목숨을 바쳐 대항한 가산(嘉山)군수의 충절을 논하고 어이없이 항복한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한탄하라는 것이었다.
백일장의 장원은 삼옥리(三玉里)에 사는 약관 20 세의 젊은이에게로 돌아갔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명문장(名文章)의 주인공은 김병연(金炳淵),호는 난고(蘭皐). 뜬구름 같은 방랑길에 술 한잔,시 한수로 숱한 일화를 떨어뜨리고 다녔던 시선(詩仙)이자 주선(酒仙),바로 그가 김삿갓(1807 년∼1863 년)이었다.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 줄 아내와 어머니를 상상하며 삼옥리 집으로 향했을 김병연.천하를 얻은 듯 잠시 출세의 꿈에 부풀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번 죽음은 가볍고 만번 죽음이 마땅하다'며 비방했던 김익순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삿갓쓴 내력 담긴 두메산골 삼옥리 영월읍에서 빠져나와 완택산(莞澤山) 등허리를 타고 동강(東江)을 거슬러 오르면 건너편 봉래산(蓬萊山) 아래턱을 희미하게 그은 실낱같은 외길이 애잔하게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두메마을 삼옥리를 세상과 연결하는길이다.이 길을 따라 청년 김병연은 장원소식을 안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걸어 들어왔으리라.
강줄기를 어루만지며 휘돌아가니 길이 끝나는 곳에 둔덕이 열린다. 삼옥리다.
널조각 같은 황토밭 사이로 드문드문 집채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 싯푸른 강물이 산그늘을 드리우고 있다.소울음 너울대는 그저 평안해 뵈는 마을이지만 멸족(滅族)에서 폐족(廢族)으로 죄가가 가벼워지자 27세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어린 세아들을 이끌고 숨어든 곳이 아니던가.
장원의 기쁨도 잠시, 어머니 입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들은 그는 비통해진 심정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일념으로 글을 배웠던 것이 결국 조상을 죽여 상을 타게 되었다니.
삼옥리는 `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어렵고 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뻗기 힘들구나'(九萬長天擧頭難 三千地闊未足宣)하고 읊었던 김병연의 기구한 사연이 맺혀,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어 `삿갓'을 쓴 내력이 가슴아프게 전달되는 곳이다.
천형(天刑)으로도 씻지 못할 죄를 안고 아마도 김병연은 이 산골마을 삼옥리마저 등지고 와석리(臥石里)로 들어갔으리라.
향토사학자가 발견한 김삿갓 묘, 하동면 와석리는 김삿갓이 긴 방황을 끝내고 잠든 무덤과 그의 일가가 살았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영월읍으로 들어와 와석리행 버스를 타고 하동천을 따라 들어가는데, 이건 여지없이 [세상끝]으로 가는 길이다.
칼 같은 산이 불쑥불쑥 치솟아 오르고 마을이라고 해봐야 하천에 의지해 오롱조롱 모여 있을 뿐 물줄기는 `S'자를 그리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사람을 희롱한다. 영월화력발전소와 고씨동굴을 지나 300 m 고지의 꼬불꼬불한 고개를 힘겹게 넘어서야 비로소 시야가 트이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본 잠깐의 시원함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김삿갓은 술과 어우러진 `해학시인'으로 마냥 즐겁게 그려왔으나 불현듯 감정이 복받쳐 온다. 김삿갓과 홍경래(洪景來). 문학과 정치에서 다 같이 [혁명아]로 지칭되는 이 두사람의 운명은 어디서부터 얽힌 것일까.
이 운명에 대한 개인적 해석은 유보돼야 한다.그러나 안타까움과 다행스러움이 묘하게 뒤섞인다. 홍경래난이 없었다면 김병연은 [삿갓]을 쓰지 않았을테지만 아마도 시대를 마음껏 풍자하고 갔던 그의 걸출한 시 또한 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와석리 [김삿갓묘 7 km]라고 씌어진 이정표 앞에다 나그네를 떨구어 놓고 무정하게 가버렸다. 할 수 없다. 영락없이 김삿갓묘가 있는 와석리 노루목까지 걸어가야 한다. 간혹 길닦는 차만이 오르내리는 한적한 꼬부랑길을 걸으니 `나는 지금 청산 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만 오는가?'(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하고 읊었던 김삿갓의 시정(詩情)을 반푼 정도 느낄 듯하다.
김삿갓묘가 발견된 것은 불과 18 여년 전인 지난 82 년 영월의 향토사학자였던 박영국(朴泳國)옹에 의해서였다. 그는 김삿갓묘가 `양백지간'(兩白之間),곧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74 년부터 영월땅을 샅샅이 답사, 드디어 그의 묘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집터도 찾아냈다.
영월에 와서 나는 그분이 제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돌보는 이 없이 비바람에 패이고 깎여 결국 무명(無名)의 무덤이 되어 땅속으로 꺼질 뻔했던 김삿갓묘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추진해 오던 3 권의 [김삿갓문집]을 눈앞에 두고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삿갓묘와 마주한 땅에 잠들고 싶었던 한 향토사학자의 김삿갓사랑은 하염없이 눈물겨운데 한국문화재단으로 넘어간 `김삿갓문집'원고는 아직 빛을 못보고 있다고 한다.
심산유곡에 떠도는 김삿갓 시혼, 쉬엄쉬엄 드디어 와석리 노루목에 이르러 김삿갓묘 앞에 덜렁 주저앉았다. 규범을 파괴했던 위인이었으니, 설마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지하에서 흉보지는 않겠지. 여러 기록에 김삿갓묘가 영월군 의풍면(儀豊面)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의풍과 바로 인접한 지점이다. 무엇보다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이마을에선 김삿갓묘라는 사실이 구전돼 오고 있었다. 김삿갓묘는 크기가 과장돼 조금 거만해 보였다. 주위의 무덤들을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만들어 버린탓이다. 원래 묘 바로 앞에 집이 한채 있었지만 이것이 김삿갓묘로 알려지면서 집을 옮겨 터를 넓게 다지고 무덤을 크게 조성했다고 한다. 이 묏자리는 누구의 안목이었을까. 이 마을 신춘선(辛春善 63)할아버지는 남다른 `김삿갓론'을 갖고 있다.
"김삿갓이 글께나 배웠응께 시방 국회의원쯤은 됐어.벼슬은 내삐리고 저그 할아버지 욕했다고 빌어먹고 댕겼으니 큰 인물은 아이지. 그래도 이 묏자리 봐 놓은 거 보면 대인이야. 여기 노루목 넘어가는 고개가 버들고개라 하는데 `정감록'에 보면 태백산자락 끝에 버드나무가지에 꾀꼬리가 집을 지은 형상의 대지(大地)가 있다고 했거든. 그러니 천하 대지고 말고. 그 사람이 지리를 훤히 알고 여기 살 적에 잡아놓고 간 거야"
김삿갓이 과연 자신의 묏자리를 봐 두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두루 학문을 섭렵했던 그의 통찰력으로 짐작해 볼 때 충분히 수긍되는 면이 없지 않다.
여기서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집터에 가려면 충청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작은 실개천을 건너 2 km 가량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을 따라 [아러대이 [우더대이] 그 위에 [문둥골] 이 있었으며,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곳은 `우더대이' 였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왜 김삿갓은 이 궁벽한 산속까지 들어와서 다시 세상을 향해 방랑길을 걸었던 것일까. 20 세에 벌써 인생이 허무한 것을 알았지만 촌부로 남기에 그의 젊은 가슴은 너무 벅찼는지 모른다.
익명의 명유(名儒)를 꿈꾸지는 않았을까. 비록 속죄의 상징으로 삿갓을 눌러쓰고 고행의 길을 걸었지만 과거를 지향하며 정통 한시를 익혔던 그가 출세의 꿈을 완전히 떨쳐버렸으리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영월읍에서 수족관을 하는 박영국옹의 제자 박효상(朴孝祥 37)씨와 얘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관동지'(關東志)에 `金炳淵'이라는 이가 1855년에서 1856년까지 원주목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얻게 됐다. 물론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그의 생몰연대에 비추어 이 시기는 김삿갓의 말년에 해당된다.
비록 그가 무애(無碍)의 자유인으로 훈장이나 세도가들을 풍자하며 해학시를 뿌리고 다녔지만 이 기록은 얼굴을 가리려고 썼던 그 `삿갓'으로 오히려더 유명해진 김삿갓이 말년에 한번쯤 벼슬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김삿갓이 살았던 집터는 후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의 유명세와는 대조적으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화전이나 하고 살았을 척박한 땅에는 이제 허물어진 폐가만 위태하게 서 있을 뿐이다.냇가의 퇴락한 집은 행랑채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집뒤 공터에 김삿갓 일가가 살았다는 `8 칸집'이 있었다지만 아득히 사라졌다. 잡목만이 우거져 있다.`김삿갓' 소주가 나오고 김삿갓 운운하며 술자리는 요란하지만 그의 고뇌가 묻힌 이곳은 얼마나 쓸쓸하게 버려져 있는가. 하긴 방랑객이었던 김삿갓에게 집이 무슨 소용이랴. 문전축객 없는 `삿갓주점'의 인심 이곳까지 왔다면 모름지기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노루목골 들머리에 있는 `삿갓주점'이다. 비닐집에 불과한 초라한 주점이지만 김삿갓묘 바로 아래에 잡고 있어 그 운치는 `영월의 명물'이라고 이를 만하다.쓸쓸한 회포를 한잔 술에 풀며 시를 읊었던 한 시선의 이야기로 객(客)들의 잔이 떠들썩할 때 삿갓쓴 걸객(乞客)이 "주모!"하고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슬며시 빠지게 된다.
`삿갓주점'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그 이익은 공평하게 나누는 이상적인 주점이었다.
아주머니왈, 김삿갓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쉬어갈 곳이 없다 해서 허름하게 지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칡국수를 만들어 팔았고, 술이 있으면 금상첨화라 해서 동동주까지 담게 됐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마을총각한테 "죽장에 삿갓쓰고 말야, 거 김삿갓 노래 한번 불러봐라"고 한다. 꽤 멋드러지게 불러제칠 듯한데 총각은 수줍은 듯 "술이 한잔 들어가야지"하며 뒤로 뺀다.
10 가구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이다 보니 이곳은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되다시피 했고 어쩌다 방문객이 들이닥치면 자연스럽게 한데 어우러진다.
이렇게 정다운 인심이 문전축객(門前逐客)당하던 김삿갓의 서러움을 의식한 것은 아닐텐데도 주점아래 김삿갓시비(詩碑)에 새겨진 시는 은근히 웃음을 머금게 한다.
'二十樹下 三十客/四十門前 五十飯/人間豈有 七十事/不如歸家 三十食' (이씨발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망할 놈의 마을에 드니 쉰밥만 주는구나/ 인간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집에 돌아가 설은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
김삿갓에게 [욕] 은 무엇이었던가. 욕은 파괴하는 자의 것,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욕을 함으로써 그는 세상을 비웃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역시 당대 여느선비와 마찬가지로 정통 한시를 배웠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시의 정해진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 붕괴돼 가는 조선말의 시대적 혼란을 읽어냈다.
그는 시를 통해 욕을 해댔고 그의 시들은 서민들의 사랑을 차지하며 애송돼 왔다. 아마도 그것은 그 투박한 `욕'때문이 아니라 느낀 대로 시원하게 실어버렸던 시의 `솔직함'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방랑 끝내지 않은 시혼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고 간 김삿갓.
전라도 화순땅 동복(同福)에서 김삿갓이 한많은 생의 괄호를 닫은 것은 57 세 되던 1865 년 3 월 29 일. 이로부터 3 년 뒤 아들 익균은 소문을 듣고 영월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 살아서 붙잡지 못했던 아버지의 싸늘한 관을 메고 갔던 것이다.
그가 썼던 마지막 시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는 의미심장한 구절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돌아가기도 어렵고 또한 머물기도 어려워서 얼마나 길가에서 방황하였던고' 육신이야 양지바른 노루목에 편안히 정착하고 있지만 그의 시혼(詩魂)은 아직 방랑을 끝내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글 : 장성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