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향기에 취하는 도시 짤즈부르크


 
즈부르크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대부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아니면 음악가 모차르트를 떠올릴 것이다. 이토록 낭만과 음악의 도시로서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도시는 과연 어떤 곳일까.
알프스의 맨 북쪽 끝자락, 오목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짤즈부르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선 만년설 산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자그마한 이 도시의 아름다운 도시미에 반하게 된다. 도심에서 개울처럼 자그마한 짤자흐 강을 건너 구 시가지의 남쪽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엔짤즈부르크성은 중세의 향기를 풍기고 있고, 성당을 끼고 있는 광장의 노천 카페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이중주가 생음악으로 연주되며 분수 옆에 앉아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의 가슴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여준다. 여행자들이 바쁘디 바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을 휴양지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 도시의 차분하고 고전적이며, 음악적인 향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 중부유럽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도하고 고집 세며 자존심 강한 도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짤즈부르크 사람' 하면 비엔나를 비롯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 유럽을 지배할 때도 이곳만은 마음대로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을 다스리던 대주교는 당시, 군주대주교라고도 불리였을 정도로 종교상의 권위자일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정치상의 군주이기도 했다. 대주교는 문자그대로 이곳의 수장으로서, 교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다스려왔다. 수도인 비엔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짤즈부르크. 오죽하면 한 때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려고 까지 했을까.


짤즈부르크는 직역하면 '소금의 성'이라는 뜻이다. 알프스는 수 천 만년 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형성된 산악지대. 솟구칠 때 바닷물이 같이 따라 올라와 고인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져 암염이 되었다. 짤즈부르크의 북쪽에는 거대한 암염이 존재하고 있었다. 짤즈부르크의 기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소금을 채취해서 짤자흐 강을 따라 오는 배들을 해적 질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룸으로서 형성되었다. 그 후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 이웃 지방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소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고 이곳의 영주이자 대주교는 소금을 채취하여 나가는 상인들에게 염세(鹽稅)를 부과해 많은 부가 축적됨으로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성을 만들고는 귀족들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며 이곳을 다스려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곳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도 바위소금을 먹는다. 맛은 바다 소금과 같지만 성분이 달라 몸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별도로 진짜소금을 따로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발 500미터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 도시라서 기압이 낮기 때문에 혈압이 높은 사람이 살기에는 좋다고 한다. 고도로 인해 자주 현기증이 발생하므로 이곳 사람들은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음식을 짜게 먹는다.
이 성은 호엔짤즈부르크라고 부르며 1070년경에 처음 건설되었고 그 후 1500년 초와 1700년대 후반의 두 번으로 나뉘어 개축, 확장되어,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큰 성으로서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당시에는 주교보다 높은 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내의 옛날 집들에는 아직까지도 오리지널 짤즈부르크인 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으며, 중세에 사용되었던 고문실과 고문도구, 그리고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성의 가운데의 조그만 광장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두 그루 있고 그 앞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후에 슈베르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비엔나로 돌아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작곡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이 성은 밑에서 보기보다 꽤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위에 올라가면 짤즈부르크의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 뒤로는 알프스의 지붕들이 가슴에 몽땅 안길 듯이 다가온다. 짤자흐 강 건너 신시가지의 뒤에는 숲으로 우거진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조그만 성당과 마을이 눈에 잡힌다. 이곳은 현재 성지로 보존되었는데, 중세 때 화재로 인해 마을의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으나, 마을 한 쪽에 세웠던 성모 마리아상만은 불에 그을리지도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성지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나중에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게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짤즈부르크는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의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로 대주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 1756년 1월 27일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사이에서 여섯 번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라고 자기 스스로 불리길 좋아했던 그의 두 번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아마데우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쪽이 리듬이 좋고 '볼프강'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입어'라는 뜻인데, 과연 신은 그에게 은총과 천직을 내려주셨다. 아버지 레오폴트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자질이 돋보여 수도원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그리고 파이프오르간을 배웠다.  
모차르트의 집은 요즈음 '간판의 거리'라는 별명을 지닌 가장 번화한 거리 '게트라이데' 가 9번지 건물의 4층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레오폴트는 이곳에서 날마다 대성당의 소년들에게 바이올린을 교습하였다. 이것 역시 궁정의 악단으로서 하루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들과 딸을 열심히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체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자질의 두 아이(아마데우스와 누나인 마리아 안나)를 데리고 나가면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서는 대단한 평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 마음은 레오폴트에게는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볼프강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녔고 1781년 비엔나에 정착하여 정신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까지 19년 가운데 9년이라는 기간을 여행에 소비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내몰리고, 기대와 환멸을 번갈아 가며 맛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넓은 세계의 예술을 익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와 접하게 되었다. 그 동안 볼프강은 음악에 관계된 일일뿐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들의 마음속에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하느님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마데우스의 소년시절의 생각이었으며 레오폴트는 아마데우스의 생애를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는 여행 안내원, 흥행주 그리고 공연자와 매니저의 역할을 혼자서 담당했다. 항상 가까이 에서 아들의 발전을 지켜보며 오직 하나의 목적과 사명에만 전념했다.

볼프강은  다섯 살 때 짤즈부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바이에른의 도시 뮌헨을 필두로 비엔나와 체코의 프라하, 파리와 이탈리아 등지로의 많은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뇌에서 나타나듯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열 살 때 이미 피아노 작곡을 시작했으며 열 세살 때 첫 오페라를 썼을 정도였다. 그는 당시의 음악장르를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으며 생애의 모든 시기에 걸쳐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의 창작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련되며 깊은 맛을 내는 그의 오페라는 중량감과 형식적 완성감이 더해져 간다. 그는 쉴 새없이 대본을 쓰고 곡을 붙여갔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쳐 살았던 인물들에 극적인 독자성을 부여했으며 로렌초 다 폰테가 쓴 대본으로는 '코지 판 투테'와 '돈 지오반니'를 원작의 의도 이상으로 완성시킨다. 원래 '돈 지오반니'의 주제는 모든 한계를 무시하고 신비한 사랑을 파괴하는 방탕아의 잡스런 쾌락으로서, 기존의 '돈 환(돈 지오반니)'이 색마와 범죄자로 그려진 반면 모차르트는 그를 한 남자의 사랑을 구도의 절대성으로까지 상승시킨다. 이 '돈 지오반니'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프라하시민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된다.
모차르트는 또한 9살 때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무려 53개의 완전한 교향곡과 11개의 단편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음악과 미사곡, 그리고 장송곡을 남겼고, 주옥같은 피아노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모차르트에게 시련은 끝없이 찾아왔다. 자신을 아껴주고 음악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서거한 후 후임으로 짤즈부르크를 다스리게 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형식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는 결별하게 된다. 1782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버가의 둘째 딸 코스탄체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언니인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했던, 부자로 한평생 살고 싶어했던 뜻마저 이루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비엔나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35세였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아내인 콘스탄체와 친구 3, 4명이 고작이었다. 12월 6일 오후, 그의 주검은 콘스탄체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발인하여 콘스탄체와 혼례를 거행했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최후의 성수를 맞은 뒤 공동묘지로 향했다. 모진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묘지까지 운구마차를 따라간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불운한 천재 모차르트는 결국 천민들이 한꺼번에 묻히는 공동묘지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인 체코의 프라하 시민들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더 슬퍼하여 12월 8일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인파가 프라하 시내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미사를 거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그로부터 7년 후 동거했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망부의 묘에 참배하려고 했지만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그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트라이데의 좁은 골목은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 난다. 골목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골목이 중첩되어 중간 중간에 성문처럼 통로가 연결되어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오히려 생동감 넘치고 구 시가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는 호엔짤즈부르크 성으로 이어지며 성채가 있는 언덕 바로 밑에 카피텔 광장이 있고 한쪽에 대성당이 놓여있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데, 어떤 카페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아련한 추억의 그 날로 되돌린다. 그 옆에는 움직이는 대리석 조각이 하나 서있었다. 이것은 사실은 석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하얀 분칠을 하고 마치 조각처럼 꿈쩍 않고 서 있다가 앞에 놓은 동전바구니에 동전 몇 닢을 떨어뜨리면 그 답례로 포즈를 다르게 바꾸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흥미롭게 쳐다보며 즐거워한다. 광장의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아마도 건너편의 카페에서 연주하는 자신의 음악이 반음 높은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것 같았다.

짤즈부르크의 메인 콘서트홀인 '축제극장'에서는 매년 7,8월이 되면 음악제가 열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음악회와 오페라 등 공연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슈타츠라는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들어 서게 되면 미라벨 정원이 나타난다.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 무대이기도 했던 이 정원에는 현재의 주교가 살고 있는 건물과 기하학적으로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면 호엔짤즈부르크성의 모습이 정원과 잘 조화된다. 오늘 저녁도 카피텔 광장의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스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과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가 연주될 것이다. 짤즈부르크는 비운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영원한 음악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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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2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꼭 가고 싶은 곳입니다...... 미라벨 궁, 사운드 오브 뮤직......

꼬마요정 2004-06-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고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