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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ㅣ 문지 스펙트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예전에 우포늪에 갔었다. 더운 때라 새벽에 출발해 아침 8시에 도착해서 늪 주변을 걸었다.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던 그곳은 조용했고 반짝였다. 늪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늪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해가 떴음에도 축축했고, 음산했다. 그리고 물풀로 가득한 늪지 안으로 묘하게 빨려들 것만 같았다. 늪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늪의 풍경은 내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의 첫 단편인 <두 명의 교사>를 읽고 어리둥절했던 난 두 번째 단편인 <모자>를 읽고나자 그 우포늪이 떠올랐다. 이 단편집은 늪이다. 질척이고 축축하고 음산하지만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힘든데, 덮을 수가 없었다.
<두 명의 교사>는 제목 그대로 두 명의 교사가 나온다. 새로 온 교사가 자신이 겪고 있는 불면증과 그로 인해 끔찍해진 삶을 고백하는 형태이다. 무언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유년기 시절의 억압 혹은 경험이 그의 삶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억압된 자아일까, 죄책감이나 두려움일까. 그는 왜 용서를 구했을까.
<모자>는 우연히 주운 모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한다. 모자의 주인을 찾기 위한 여정인지, 끔찍한 무기력과 쓸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의 표출인지 알 수가 없다. 삶은 우연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지만, 극심한 우울감 밑에 살고자 하는 의지도 같이 있었던 걸까.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는 조금 특이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느 정도 덜 비참하다고 느끼는 걸까? 그 사람의 삶이 비극이라면 내 삶은 희극일까. 이 단편 역시 죽음이 가득했지만, 강제로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뒤 미쳐버린 삶은 더 비극적이었다. 단편들 모두 죽음을 갈망하지만 죽지 못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삶을 향한 의지가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죽을 의지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세 편의 단편 이후 나오는 단편들은 모두 극도의 우울감을 드러냈다. <야우레크>도,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도, <인스브루크 상인 아들의 범죄>도, <목수>도, <슈틸프스의 미들랜드>도, <비옷>도, <오르틀러에서-고마고이에서 온 소식>도 모두 말이다. 모두 죽었거나 죽을 지경인 인물들이 나왔고,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방관하거나 무관심했다. 삶은 살 가치가 있는지, 그저 질병과도 같은 것인지, 그저 고통의 연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도 희망의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다 읽어버렸다. 너무 불편하고 우울하지만 덮지 못하고 가슴 한 구석에 늪지의 축축함을 느꼈다. 외삼촌과 어머니의 근친상간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외삼촌에게 멸시 당하지만 야우레크를 떠날 수 없다. 사슬에 묶인 것 마냥 그 곳에서 나올 힘을 내지 못한 채 그저 코미디언을 흉내내며 견딜 뿐이다.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이 어떤 불안감이나 우울감에 사로잡힌 지 모른 채 삼촌은 그를 추앙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인스브루크 상인의 아들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괴롭힌 건 가족, 아버지이지만 범죄의 낙인은 피해자인 아들에게 찍힌다. 사회가 만들어 낸 범죄자인 목수는 가족인 여동생이 감당해야 했다. 그들을 끔찍한 삶으로 내몰고도 사회는 그저 그들을 외면하면서 아무 일 없는 듯 행세한다.
휠체어를 탄 여동생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인지, 혹은 벗어날 수 없어서인지 슈틸프스를 떠나지 못하는 상속자들 이야기 역시 답답하고 우울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영국인은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그저 말만 번드르 할 뿐이다.
죽은 삼촌의 비옷은 그 비옷을 입은 다음 사람을 자신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한 아버지의 사연은 그저 비옷의 출처에 밀려 사라졌다. 그 비옷을 손에 넣은 엔더러 씨는 어떻게 될까.
예술과 과학은 공존할 수 있을까. 예술이든 과학이든 증오로 가득한 곳에 굳이 파묻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르틀러는 부모의 학대를 상기시키는 곳이며, 형의 광기를 부추기는 곳이다. 유년기의 끔찍한 상황이 발현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치유되지 않는 광기는 스스로를 잠식하고, 죽을 의지조차 상실한 채 비극을 이어나간다. 희망은 없다, 세상은 원래 그러한 곳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