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홉 꼬리의 전설
배상민 지음 / 북다 / 2023년 12월
평점 :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그 속에 약한 이들의 사연이나 바람도 있고, 권력을 가진 이의 의도도 있다. 무엇을 담든, 이야기는 햇솜처럼 부풀려져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때는 고려시대 말이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왜구가 날뛰고 이인임이나 임견미 등이 토지 수탈 등 전횡을 일삼다가 제거되는 등 나라가 매우 어려운 지경이었고, 백성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다못해 '가왜'라고 나라나 호족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왜구인 척 도적질을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가왜'의 정체를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관리가 있었고, '가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 선비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이다.
정덕문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로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음서로 출사할 수 있었으나 과거를 보러다니는 한량이다. 그리고 금행은 양백연의 수하에 있다가 그가 제거되자 최영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인물로 당파가 없는 천출 무관이다. 왜구 토벌이든 홍건적 토벌이든 전쟁은 신분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신분상승한 이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혜린 님의 만화 <인월>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도 왜구의 침입 때문에 감동은 인수라는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니까. 물론 이는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정덕문의 고향은 최씨 호장이 세력을 가지고 고을 일을 좌지우지 하는 곳이었다. 고려 조정은 그런 호장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고을마다 조정 관리인 '감무'를 보냈고, 호장과 감무의 알력과 이중 세금 때문에 고을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생기면서 마을은 더 뒤숭숭해졌다.
"여우가 나타났다!!"
난자당한 시신이 나타날 때마다 호장의 노비들이 외치고 다니는 소리였다. 주로 고을 처녀들이 희생자였고, 노인이 살해당할 때도 있었다. 이들의 시체는 내장이 다 파헤쳐진 채였고, 간이 없었다. 여우의 소행이라는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고, 어느덧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라는 둥, 인간으로 둔갑할 줄 안다는 둥 갈수록 더 기이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이한 존재를 찾아다니는 문덕은 불가살이라는 쇠붙이를 먹는다는 요괴 때문에 금행을 만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여우가 사람을 죽인다는 이 마을의 감무로 오게 된 금행과 만나게 되었다. 둘은 이 사건은 잔혹한 범죄를 여우라는 존재로 사람의 짓임을 덮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범죄자를 찾기 위해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여우 소문 뿐만 아니라, 처녀 귀신 소문도 있었다. 이 고을에 부임한 감무는 귀신의 방문을 받게 되고, 다음 날 타살의 흔적 없이 혼백만 빠져나간 것처럼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장화홍련'이나 '아랑'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 이야기들이 억울하게 죽은 혼령이 방문한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 속 처녀 귀신은 혼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게 다를까. 그리고 또 다른 중대한 범죄를 들키기 싫은 누군가의 사주로 교묘하게 일어난 사람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이 달랐다.
이 처녀 귀신 사건으로 만나게 된 수선과 문덕, 금행은 끔찍한 살인의 범인을 찾기 위해 힘을 합쳤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성장하게 된다. 권력 싸움에 발을 딛기 싫었던 문덕은 지키기 위해 힘을 가져야 함을 알았고, 왜구와 싸우던 용맹한 장수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던 수선은 동생의 한을 풀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지럽고 힘든 시기,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살아갔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곳이던가. 하지만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 커다란 의리를 보여주었고, 제법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많은 이들을 구했으니 슬픔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때라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모든 순간이 행복한 것도 아니니 삶은 그렇게 시간을 견디며 작은 기쁨들을 맞이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사람을 해치는 여우 이야기가 아니라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가난한 이들이 수확한 농작물이 뺏기지 않도록 해주는 암행어사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