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실시 기담괴설 사건집 ㅣ 허실시 사건집
범유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7월
평점 :
나는 괴담류를 좋아한다. 그리고 조상신이 도운다거나, 귀신이 해코지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살아있는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인간이 죽는다고 깨닫거나 해탈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귀신이 산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죽는 순간 깨닫는 바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득도할만한 것일까 하는 거다. 그리고 대부분은 죽는 순간 집착하는 대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텐데, 그 집착이 과연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까? 그래서 뭐 찻집을 가든 저승사자를 따라 삼도천으로 가든 어쨌든 무사히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간다면 정말 다행이면서 이승에 남은 이들에게 영향을 안 끼칠테고, 집착이 심해서든 죽은 줄 몰라서든 계속 이승을 떠돈다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구에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니까 돌이든 여우든 나무든 요괴가 될 수도 있을 거고, 도깨비도 있을 수 있을 거고, 이름을 그렇게 붙여서 그렇지 그냥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살 수도 있을테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허실시'는 있으면서도 없는 도시다. 우리 주변에 혹은 내가 사는 이 도시가 허실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향토사 연구자라고 주장하는 진설주 씨에 따르면, 허실시의 연원은 조선 중기 문신 김중환의 문집 <지구집>에서 찾을 수 있다. 헛개나무 열매가 마치 매실처럼 커다랗게 열리는 고을이라 '헛매실골'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허실골'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허실정(虛實町)이라는 한자가 붙어 지금의 허실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땅의 기운을 죽이려고 이름의 유래와는 상관없는 한자를 끼워넣기도 했다는데, 아마도 '허허로운 과실'을 의도했을지도 모를 그 작명은 당시 허실정(虛實町)에서 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던 이로 하여금 묘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p.7) 진설주 씨는 계속 허실시에서 전설이나 괴담을 모으고 있는데, 이제 나오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었다.
<최애빵 구출 레시피>는 범유진 작가의 이야기로,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허실시에는 '허실당'이 있다고나 할까. 허실동의 아이인 노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빵은 '김말자 빵'인데 그 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허실당에서 파는 김말자 빵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허실당으로 내려 온 노지연은 자신의 최애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허실당에 알바로 취직한 지연은 이 빵과 얽힌 사연을 밝혀낸다. 과학을 미신으로 덮고, 진짜 귀신은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 앞에 놓인 진실은 역시 인간의 탐욕과 편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땅이 울린다'는 표현으로 화재가 난 캠핑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한 지연은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고, 나이도 어렸기에 피해자였겠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덕대골' 이야기는 남편 없이는 제사상에 위패 하나 올리기 힘들었던 여인네들의 한이 서려 있었고, 지연의 인정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역시 인간이나 귀신이나 살아있을 적 삶이나 희망, 원한 등을 내려놓기는 힘든가 보다.
<학교의 흉터>는 박하루 작가의 이야기이다. 학교에 호랑이 귀신이 나타났나? 호랑이 발톱 같은 것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양들이 남았다. 그 날 학교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물건만 찾아서 집으로 갔는데 떠나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의심받은 차우진부터 말이다. 이야기는 갑자기 <삼국유사>에 나온 김현의 이야기로 뛰어간다. 신라시대 김현이 탑돌이를 하다 만난 아리따운 여자가 사실은 호랑이였고, 둘은 사랑을 속삭였고 미래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호랑이 처녀의 오라비들이 사람들을 죽였기에 나랏님은 호랑이 토벌을 명했다. 죄는 오라비들이 지었으나 호랑이 처녀는 자신이 사냥 당하는 것으로 김현의 앞날을 닦아 주었다. 뮤지컬 <송산야화>로도 만들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도 재연된다. 누구의 죄를 누가 벌하고 누가 갚는걸까. 불어 온 바람과 도서관의 소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걸까? 역시 귀신은 살아 생전의 성품을 버리긴 힘든 것 같다.
<사굴기담>은 정마리 작가의 이야기이다. 허실시에 있는 해망산은 예전엔 뱀굴이라 불렸다고 한다. 뱀이 많아서 그런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뱀신을 모시기도 했다고. 한 때는 무당이었다가 하나 뿐인 조카 동희가 무당 이모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자 무당을 그만 두게 된 미령은 허실시에 자리 잡고 조용히 살아간다. 하지만 허실시에서 실종 사건이 몇 차례 일어나고 실종 사건이 일어난 건물이 모두 한 사람 경희 언니의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경희 언니가 커다란 뱀꿈을 꾸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단순히 귀신 탓일까, 귀신 탓인 게 마음이 편한걸까.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귀신은 변덕을 부리는 것일테지. 그렇게 미려는 본래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간다.
<서울에듀아랑 학원 전설>은 김영민 작가의 이야기이다. 성덕은 대구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가 불미스러운 소문 때문에 대구에서 200키로미터나 떨어진 허실시로 가게 된다. 그 곳에 있는 학원에서 자꾸 선생님들이 실종되거나 죽어서 자리가 비게 된 것. 성덕은 그 학원에서 잘해보려 노력하는데, 다음 실종될 사람이 자신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덕은 다음 주에도 계속 학원에 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실종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성덕은 최초의 실종자인 가온과 영주쌤 두 사람의 행적을 학원생인 서정과 향토사 연구자 진설주와 함께 조사하게 된다. 여기서 아랑 전설은 마치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아랑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그 원한을 풀기 위해 귀신이 되어 사또 앞에 나타났고, 사또들이 줄줄이 죽어나갔지만 어느 현명하고 용감한 사또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내려오다 어떻게 허실시까지 온 것일까. 이 이야기 역시 범죄와 과학은 저주로 덮이고, 산 사람이 제일 무섭고, 아랑 전설이 보여준 것처럼 악의에 찬 소문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H골 여우 누이 설화 변이형에 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린레보 작가의 이야기이다. 허실시에서 열린 '요괴소설 컨퍼런스'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주최자인 향토사 연구자 진설주와 대만의 요괴소설 작가 류젠밍은 같이 이 컨퍼런스 사회를 맡아 발표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성별 때문에 BL작가로서의 생명이 끊겨버린 '세실리'는 과연 누구일까. 우리 나라에 전해내려오는 여우 누이 전설은 여느 전설과는 다르게 아주 폭력적이다. 어떤 한이나 이유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우 누이 자체가 악한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허설시에서는 이 여우 누이 전설을 살짝 비튼다. 막내 오빠가 세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위급할 때마다 하나씩 던지는데, 허설시에서는 주머니가 아니라 헛개 열매 세 개이며, 하나씩 던질 때마다 가시밭이나 불바다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는데, 허설시 전설에서는 헛개 열매를 던지면 고기나 훈남이 유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엔 갑자기 금강역사가 나타나는데, 진설주 및 세실리는 나름의 해석을 내 놓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여우 누이의 이야기일까, 인간 요괴의 이야기일까. 갖고 싶은 것이 나타나고 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난다는 해석은 제법 그럴싸했다.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거나 유혹을 헤쳐나와야 하는 거나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모든 동네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게 아랑 전설이든 여우 누이 전설이든 말이다. 여우 누이 전설은 제법 신기한 이야기인데, 새로운 해석이 신선해서 좋았다. 역시 옛날 이야기는 이렇게 비틀어도 재미가 있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어차피 살아 있고 죽어 있고의 차이 뿐이라서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