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더블 - 도플갱어 작품선
엘리자베스 개스켈 외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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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Doppelgänger)는 독일어로 ‘쌍으로 걸어 다니는 자’란 뜻이다. 보통 신화와 픽션에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나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된다. 또한 도플갱어는영어로 ‘더블(double)‘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블은 ‘제2의자아‘, ‘분신‘, ‘유령‘, ‘쌍둥이‘ 등 여러 가지 함의를 내포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도플갱어는 죽음이나 불운을 몰고 오는 존재로 여겨진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인 도플갱어가 이토록 무서운 함의를 지닌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자아는 합일된 자아라는 개념을 허무는 자아의 분열을 의미한다. 또 자아가 분열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무의식의 막을 뚫고 표면으로 떠오름을 뜻한다.  (p.312)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도플갱어 또는 더블은 분신, 유령, 쌍둥이 등을 뜻하며, 그 존재가 자아의 분열을 의미하기에 두렵게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즉 인간 본성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인 것이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내가 억눌러 둔 어떤 본성이 드러난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그래서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클라라 수녀 막달렌>과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마크하임>의 더블들은 그런 두려움이 엿보였다. 하지만 더블이 무조건 두려운 대상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나로 내가 얻지 못한 것,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거나 이룰 수 있는 존재 혹은 그저 '나'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셉 콘래드의 <비밀 동반자>의 레갓이나 아서 코난 도일의 <빨간 머리 연맹>의 클레이가 그러한 경우이다.  


<클라라 수녀 막달렌>에서 브리짓은 카리스마 있고 유능한 하녀였고 딸인 메리에게 집착했으나 메리는 떠났다. 유일한 신분 상승 수단이었던 귀족 기즈번과의 결혼을 통해 메리는 독립했다. 하지만 기즈번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메리는 신분은 상승했으나 딸인 루시를 낳고 죽었다. 브리짓은 메리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메리가 돌아올 곳이라 믿은 콜드홈에 정착했고, 불행히도 나쁜 남자인 기즈번에게 저주를 내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이라 믿었던 루시의 더블은 그렇게 브리짓에게서 시작해 기즈번을 통과하여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기즈번이 아니라 루시가 불행해져야 하는가. 루시의 더블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상속자를 찾던 변호사인 화자를 통해 드러나는 루시의 모습은 성녀와 마녀로 구분된다. 악의 상징 같은 루시의 더블이 한 잘못은 큰 소리로 웃고, 남자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거침없이 걸어다녔을 뿐인데. 브리짓과 메리와 루시의 삼 대는 가부장을 뛰어넘으려다 실패하고, 그 힘은 스스로를 파괴하러 온다. 결국 브리짓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온순해짐으로 저주를 풀려고 하지만, 과연 뜻대로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비밀 동반자>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선장의 이야기이다. 자신과 동일시 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나'인 이방인 레갓을 위해 배를 좌초의 위험에 노출시킨다. 선장이 원한 것은 무엇일까. 살인까지 불사하면서 배를 장악할 힘을 원한 것일까?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그렇게 선장은 레갓을 도왔고, 레갓의 모자를 이정표 삼아 배를 돌려나온다. 


<윌리엄 윌슨>은 자신을 따라 하는 이름마저 똑같은 학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닥터 트랜스비의 학교에서 만난 윌리엄 윌슨은 기묘하게도 자신과 똑같았다. 어느 밤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 윌슨은 그 곳을 떠나 이튼에 입학한다. 무모하고 오만하고 죄의식이 없던 그는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똑같은 윌리엄 윌슨이 나타나 자신을 저지하는 것을 알게 된다. 윌리엄 윌슨의 더블은 도리어 악행을 저지하는데, 그는 양심의 또 다른 이름일까,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일까.


<빨간 머리 연맹>은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이고, 또 더블과 그닥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내용은 다 알고 있었기에, 왜 이 이야기가 여기 나올까 했더니,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홈즈가 클레이를 또 다른 자아로 인식했다고 한다. 홈즈가 클레이를 두고 한 "런던에서 가장 뻔뻔하고 대담무쌍한 범죄자"란 평가는 최고의 찬사이지 않을까라고.


<마크하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과정이 마크하임이 골동품점 주인을 살해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그에게 나타난 더블은 누구일까. 거울을 통해 나타난 그는 내면의 양심일까, 천사일까, 악마일까. 인간에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한다. 양심은 끊임없이 악을 누르려고 하고, 충동은 순간의 만족을 위해 위험한 행동을 부추긴다. 마크하임이 소환한 그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더블이 누구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블이 무슨 행동을 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마크하임의 더블은 나타나서 그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계속 속삭이지만, 마크하임은 결국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도플갱어, 더블이 두려운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보는 것이 제일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모습도 보이겠지만, 내가 감추고 싶은 모습도 보일테니까. 되고 싶은 나와 억눌려진 나는 다르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포를 마주하면 두렵고 피하고 싶다. '크툴루'가 두려운 것처럼, 도플갱어도 두렵다. 하지만 또한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다. 저 신비한 존재는 진짜 저주인가, 아니면 숨겨진 또 하나의 본성인가. 


그래서 공포인가.   

이제 행위를 저질렀으니 시간은, 그러니까 희생자에게 닫힌 시간은 살인자에게는 긴박하고 중차대해졌다.(마크하임)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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