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 시네마틱 노블 1
오누이 외 지음 / 스토리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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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인류애가 사라져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자신이 돈이 많다고, 자신이 덩치가 크다고 등등의 이유로 자신이 옳다며 상대를 눌러버리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내 주위의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행위에 동조하거나, 방관한다면 인류애가 과자 부스러지듯 바사삭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분명 지난 시간들 속에서 그런 순간을 한 번 이상 만났을 것이다. 


이 책은 유래 없는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고 간, 계속 발전해 온 과학 기술이 더 이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던 '인류애'란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미래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첫 번째 이야기는 오누이 작가의 D - 1 이다. 2024년 세상은 '라섹(라스트 세컨드)'을 맞이한다. 2024년 7월 2일 한국 시각 오전 4시 37분 13초. 이 시각은 인류가 경험한 마지막 시각이며 이를 '라섹'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가 되면 세상은 정확히 하루 전으로 돌아간다. 이 현상을 '프리즈'라고 한다. 프리즈는 공전, 자전, 생명체의 생사여부까지 모두 하루 전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라섹을 맞이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축적되는 것은 인간의 기억 뿐이다.


수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자기계발서 그 자체라고 할만큼 자기를 '계발'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파이어족 그러니까 조기은퇴가 목적이었기에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돈을 벌었다. 연애? 그런 건 사치이자 돈 버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라섹이라니? 더 이상 통장엔 잔고가 늘지 않는다. 아니, 은행 자체가 쓸모가 없어진다. 사람들은 폭음, 마약, 폭력, 절도 등의 행동을 거침없이 하고, 심지어 프리즈가 일어나기 직전에 몸에 불을 붙인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수미는 새벽에 조깅을 하다가 프리즈를 맞이했다. 온전한 하루를 살 수 있는 수미는 이 시대의 금수저가 되었다. 수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기훈은 슬프게도 라섹이 일어나기 하루 전 아파트 창문 사이에 끼인다. 그러니까 그는 매일 창문에 끼인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를 수미가 발견하고 꺼내준다. 하지만 프리즈가 일어나면 다시 창문에 끼이게 되는 기훈은 수미가 오지 않을까 겁이 난다.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만약 이 프리즈가 끝이 나고 라섹 이후의 시간이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제 세상은 프리즈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프리즈를 끝내고 싶어하는 디프로스터로 나뉜다. 디프로스터가 이 프리즈를 끝내면 직전에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디프로스터는 이 프리즈를 끝낼 '냉장고'를 끄겠다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냉장고'를 끌 수 없도록 디프로스터를 방해한다. 자, 시간이란 무엇인가? 흐르지 않는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을 꿈꾸던 인간에게 내려진 이 영원 아닌 영원 같은 이 시간은 행운일까? 과연 무엇이 옳은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우리 안의 '인류애'는 휴머니즘은 어떤 선택을 하라고 할까?


두 번째 이야기는 정현욱 작가의 유어라이프이다. 2080년대에 사는 예연은 기자이며 피임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은 아이를 갖고 싶어해서 출산율은 제법 높은 편이었고, 인구절벽도 없다. 그런 시대 예연은 우연히 '유어라이프'라는 2045년에 유행했던 게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신의 할아버지 및 노인 세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시대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2040년대에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자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부양 의무가 지나치게 무겁다는 사실에 노인 세대를 경멸하고 비난한다. 거의 배설 수준으로 욕을 하던 어느 순간, 정부에서는 복지 차원에서 영양제를 지급하고, 유어라이프라는 게임이 유행하고, 그리고 인구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여기에 무슨 음모론이 있는 것일까?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영양제에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악나스트로마이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 세대에게 지급하는 영양제에는 '스트루모릭아펜'이 들어있다. 향정신성 약물로 의욕을 고취시켜 주어 개발 초기에는 우울증 치료제로도 쓰였다는 그 약물 주입 이후 출산율은 올라갔다. '유어라이프'라는 게임은 어떤 식으로 작동해서 이 게임에 빠진 노인들을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도록 했을까.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뇌에서 일어나니까 호르몬을 조절하면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가? 우리와 로봇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이런 인구 조절 계획이 타당한 것일까?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세 번째 이야기는 김지원 작가의 사람도 아닌데이다. 이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어떤 물건을 검색하면 내가 사용하는 sns든 유튜브든 곳곳에서 그와 관련된 광고를 보여준다. 나의 성향에 맞춰진 알고리즘... 음악도 무작위로 재생한 후 마음에 안 드는 음악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재생목록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로 채워진다. 만약 사람도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성격들로 이루어진, 내가 반할만한 외모와 성격으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가 나를 유혹한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W>를 보면 여주인공은 말 그대로 만화 속 주인공인 '강철'과 사랑에 빠진다. 그가 현실 세계의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 이야기 역시 유사하다. 해주는 남편인 김진오와 이혼 소송 중이다. 김진오는 바람을 폈고, 이혼을 요구한다. 김진오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다름 아닌 그의 성향에 맞춰진 안드로이드... 나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해주고, 내 단점을 보듬어주고, 대화가 통하고... 이런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면 나는 뿌리칠 수 있을까? 나중에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더라도?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맞춰진 존재가 사람이든 안드로이드든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하지 않는 관계가 노력해도 안 맞아서 파국을 맞이하는 관계보다 나은 것인지, 애초에 내게 맞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네 번째 이야기는 황모과 작가의 배내똥 거래소이다. 이 이야기 역시 정말 가슴이 시리다. 인간 세상은 거듭해도 강자와 약자 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나 보다. 인분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친환경 바이오' 회사들은 늘 인분을 찾았다. 회사들이 동네마다 '배내똥 거래소'를 설치했고, '배내똥'으로 판명나면 비싼 값을 쳐 줬다. '배내똥'은 메탄가스 발생 비율이 높은 고품질 똥을 일컫는 말이다. 식용으로 재가공한 폐휴지 조각으로 만든 파스타를 먹고 닷새나 묵혀 만든 똥은 급식이 없는 겨울 방학을 나게 할 훌륭한 돈벌이었다. 다만 이 똥을 만든 예율은 아직 어리고 영양가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할 나이라는 게 문제랄까. 최저임금이 낮아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유연한' 시대에 예율의 아빠는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유민과 유민의 엄마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유민의 엄마가 소개시켜 준 직장은 무인편의점이다. 무인편의점에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할까 싶지만, 고장이 난 기계를 고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그동안 사람이 기계 안에서 기계인척 기계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신해 일하는 기계를 대신해 일하는 사람이라... 커서 돌고래가 되고 싶다는 유민의 소원 역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거대한 수족관에서 돌고래 인형 속에 사람이 들어가 헤엄치는 세상... 예율이 바라는 모든 이가 바나나똥을 누고,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가능할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배명은 작가의 선샤인은 저 너머에이다. 이 시대의 결혼 정보 회사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어디 접속하면 아바타처럼 내기 좋아할 만한 장소에서 조건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다. 이를테면 운동을 좋아한다고 하면 등산을 하면서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난다든지, 미술을 좋아하면 전시회가 만남의 장소가 된다든지 말이다. 혜주는 우연히 이 회사의 이용권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녀는 0과 1 사이의 어떤 오류로 인해 프로그램에 갇히게 된다. 혜주는 계속해서 장소가 바뀌며 사람들을 만나는데 문득 자신의 포장 가격은 얼마인지 궁금해진다. 이 흐릿한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될까. 현실 세계나 가상 세계나 인간을 상품화하고 서열을 매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살면서 인류애가 바스러지는 순간이 있다면 인류애로 가득 차 세상이 아름다워보이는 순간들도 있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이리라. 내가 기대하는 것과 실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 사이 추악한 것들도 보지만 아름다운 것도 보겠지. 그래서 세상은 균형을 맞춰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움을 모르게 된다 하더라도 끔찍하고 추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모두가 인류애로 가득 찬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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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5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이야기들이 전부 참신하네요. 읽어보고싶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출발하는 책이 내용 전체도 어떨지 막 궁금해져요.

꼬마요정 2022-11-15 23:1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정말 참신하다 생각하고 읽었답니다. 우리나라 작가라서 그런지 과학소설이 좀 더 현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달까요. 많은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