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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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마음 속에 담아두는 생각이 하나 있다. 세상은 노력한다고 해서 노력한 만큼 결실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노력한 만큼 혹은 조금만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만족하려고 하고,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온다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생각이 어쩌면 현재에 안주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편하다. 나이가 든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불편해져서 등등의 이유로 일을 하기 어려워져도 먹고 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오면 어떨까.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아예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오래 거칠 수도 있고, IMF처럼 사회 환경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경은 가장이다. 수경의 부모님인 여숙 씨와 양천식 씨, 남편인 우재, 조카인 준후와 지후 이렇게 다섯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 우재는 주식에 매진하기 위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 양천식 씨는 사기를 당해 집을 잃고, 여숙 씨는 범죄의 피해자가 된 딸의 곁에 있기 위해 청소일을 그만두고, 우재의 형 주재는 이혼하고 사라졌고 주재의 아내는 애들을 동서의 집에 맡긴 채 아주 가끔 연락만 한다. 그래서 이 작은 집에 여섯 명이 살게 된 거다. 수경과 우재가 방 하나, 준후와 지후가 방 하나, 여숙 씨와 양천식 씨는 거실에서 생활한다. 


수경은 회사에서 믿었던 동료가 수면제를 탄 술을 마셨다. 그 동료는 그녀를 업고 모텔로 갔고, 의심스러운 점을 포착한 모텔 사장의 신고로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경은 더 이상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됐다. 성범죄의 대부분은 '아는 사람'의 짓이다. 회사의 상사는 자신이 건넨 음료수를 먹지 못하는 수경을 보며 자신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에 불쾌해 한다.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


한동안 밖을 나올 수 없었던 그녀를 지키기 위해 여숙 씨는 일을 그만두고 수경을 지킨다. 우재는 계속 주식을 하지만 수익률은 마이너스이고, 양천식 씨는 일다운 일을 구하지 못한다. 준후와 지후는 학교를 가고, 가끔 준후의 여자친구인 은지가 수경네 집에 놀러온다. 


수경은 자신이 벌었던 돈으로 생활하는 가족이 점점 궁핍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고기 반찬은 먹어본 지 오래고, 늘 두부에 싼 반찬들로 밥을 먹는다. 가난은 개인이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수경은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억지로 한 걸음 내딛는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수경은 여숙과 택배 일을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면이 적은 일이라 심적 부담은 덜했으나 최저 임금만큼이라도 벌려면 정말 죽어라 뛰어야 했고,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여야 했고, 밥을 빨리 먹어야 했고, 몸이 다치지 않아야 했고, 사고가 나지 않아야 했다. 


수경이 움직이자 양천식 씨도 무슨 일이든 해보려 한다. 준후의 도움으로 앱을 깐 그는 걸어서 배달하는 일을 한다. 예전 회사의 김과장에게 연락도 해본다. 물론 이상한 라면이나 떠안았지만. 그나마 라면값은 안 내도 되어 다행이긴 했다. 뻘하지만, 양천식 씨가 다단계에 빠질 뻔한 일을 보니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울 엄마도 다단계 땜에 돈 좀 날리셨지... 내가 엄마 때문에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우재도 몸으로 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긴 수경이 극복하는 과정을 보며 온 가족이 그들을 잠식하고 있던 무기력과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경력이 단절된 40대 남자인 우재가 갈 수 있는 직장은 정말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리운전과 병행하여 일을 구해야 했고, 청소일과 음식점 주방일을 하던 여숙 씨 역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양천식 씨 역시 변변찮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 가족의 일은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한 때 우리 가족의 모습과도 겹쳐지고, 내 친구의 가족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 이웃의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나름 뻔한 결말인 것 같아도 기적 같은 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우재의 친구인 황보석은 비영리 가게를 열었는데, 별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았다. 그 곳을 방문한 수경과 우재가 자신들만 불행한 게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불안을 조금이나마 잊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불안한데 이 불안을 해소할 방법은 개인이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버리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같은 배경이나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개인의 능력 때문이려니 받아들이는 모습은 이치에 맞지 않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수경과 여숙은 결국 '헬프 미 시스터'라는 앱을 통해 신청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앱은 여자들만 이용할 수 있다. 즉 신청인은 모두 여자이고,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 역시 모두 여자다. 그래서 수경은 조금은 덜 두려운 채 일을 할 수 있었으나, 의뢰인에게 질문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범죄의 방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앱이 수락률을 90% 이상 유지하게 하고, 승낙 여부를 1시간 이내에 하도록 하고, 평가 단계를 10개에서 5개로 줄여버리자 고민에 휩싸인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말이다.


'사이버 프롤레타리아'. 근로자를 사업주라 하고, 고용주는 중개자가 되어버린 세상. 앱이나 웹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일을 시키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형태. 현대판 노예제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황보석의 말은 일견 타당하다.


준후와 은지의 모습으로 보는 10대의 세상은 조금 무서웠다. 결코 밝지 않은 미래가 눈에 보였다. 준후는 자신이 관리자라고 착각하지만, 결코 준후는 관리자가 될 수 없다. 또 다른 일개미일 뿐이다. 미성년자들만 사용해야 하는 앱에 어른이 끼어들며 변질되어 버린 그 세상은 은지가 사이버 매춘 같은 일을 겪게 만든다. 오디션에 합격한 은지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래서 남자 어른에게 사진을 보낸 과거가 들킬까봐 겁내 한다. 어린 아이들을 이용하는 어른들이 혐오스럽다. 


여자의 존재 이유가 남자의 성적 만족을 위해서인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공창' 제도를 말하면서 남자의 성적 충동은 막을 수 없다고 했다.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지고 싶지만 일단 막을 수 없다고 치고, 그럼 그 충동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하지만 희안하게도 그 충동을 해소하려면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여자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 됐거든요. 알아서 해결하세요... 아님 억제하던가. 성범죄의 처벌 수위도 높아지고, 성적 도구란 없다는 것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롯데리아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던 여숙 씨와 양천식 씨는 플랫폼을 통해 일을 하면서 조금은 세상과 가까워졌다. 이제는 롯데리아에 가서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다. 조금은 느릴지라도 먹고 싶은 햄버거와 커피를 사서 마신다. 이만큼의 사회화도 기적 같은 일인 걸까.

"돈이 제일 무섭다는 거 놀면서 깨달았어."
진심이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트라우마 운운하기에 수경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어떤 분노는 가난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드러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수습되어버린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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