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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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빵을 좋아한다. 단팥빵도 좋고, 크루아상도 좋고, 호밀빵도 좋다. 빵집에 들어섰을 때, 그 버터냄새 가득한 빵냄새도 좋아한다. 비록 빵을 소화시키는 능력은 좀 부족해도 빵이 좋다. 하지만, 헌혈은 한 적이 없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여러 이유로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몸무게가 미달이라, 빈혈이라, 저혈압이라... 그래서 난 헌혈을 해보지 못했다. 대학을 다닐 때 늘 헌혈하는 건물 앞을 지나다녔는데 늘 미안했다. 만약 내게 피가 필요하다면, 나는 주지 못한 피를 나에게 주는 그 고마운 사람들과 피가 필요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이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에서 어떤 고등 외계 생명체는 지구를 이렇게 악당들의 행성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이 궁금한 점은 하등한 악당들이 신기하게도 '헌혈'이라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여러 이유를 대면서 여러 논문을 쓰고 학회를 열고 최신 이론을 공유한다. 과연 지구인들은 왜 '헌혈'을 하는걸까? 


<이상한 녹정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를 보는 듯 해서 좋았다. 녹정은 사슴의 정기, 사슴의 혼, 사슴 도깨비... 뭐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저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 천재지만 6두품의 한계에 좌절했던 최치원이 세상 만물 이치를 깨닫고 신선이 되었다는데, 그가 워낙 잘 가르쳐서인지 그가 중얼거리는 말만 들어도 들은 이는 깨칠 수도 있단다. 1785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역적 모의를 한 무리들이 있는데, 이는 최치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어느 사슴, 아니 '녹정'이 이치를 깨닫고 인간 모습을 한 불로불사의 존재가 된 후 세상을 개혁하고자 했던 일들이 이상하게 이용당한 결과였다. 결국 녹정은 그저 조용히 살아갈 뿐었다. 다만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인구조사를 하니 적당히 한 번씩 주민번호 갱신하면서 살다가 육상 선수가 되고 올림픽 개막식 대표 선수가 되기까지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던 사람이 닭집 사장이 되고, 스포츠 기획사 사장이 되고, 누군가는 망하고, 누군가는 겨우 버티고 이런 일들이 이상하지 않는데, 사슴이 육상선수가 되는 일도 있을 법 하지 않을까. 지구엔 인간만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괜히 그래서 마지막 이야기인 <지상 최후의 사람일까요>와 연결되는 것도 같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산다면. 갑자기 자연재해가 막 일어나서 갑자기 다 몰살되거나 핵전쟁이 일어나서 다 파괴되거나 우주에서 외계생명체가 지구를 폭파시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자연히 인구가 감소해서 딱 한 사람만 남은거다. 뭔가 그럴싸하면서 괜찮은 미래라는 생각도 들고, 굳이 인간이라는 종을 보존하려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 로봇이든 어쨌든 컴퓨터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제어하고 그 한 사람이 살기 좋도록 환경을 만들어준다. 지금 우리가 상상한는 로봇과 인간이 싸워서 한 쪽이 없어져야 하는 그런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그 곳에 사는 인간은 딱히 외롭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다. 하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듯 하다. 그렇기에 후손을 남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오히려 길에서 사람을 쳐다보는 길고양이가 더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여행문>을 읽을 땐 놀라운 정보를 얻었다. 시간여행이라는 게 그냥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웜홀을 이용한다면 그 웜홀이 가동되기 시작한 때까지만 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2022년 웜홀이 없다면 미래에서는 2022년으로 올 수 없다는 것.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3차원에 살기에 시간을 자유자재로 생각한다는 건 개미가 공간을 이해한다는 말이랑 비슷할 것이다. 물론 인간 중에는 천재라서 시간을 초월하는 사람(최치원?)도 있을 수 있을 거고, 공간을 초월하는 개미도 있을 수 있겠지.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는 좀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 상처받고 은둔형 외톨이가 된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혹은 고달픈 삶을 벗어나 숨 쉴 구멍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정말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은 벌 받는 곳이라고 해도 될만큼 아프고 슬픈 이들이 많다. 비단 사람 뿐만이 아니라 지구 자체가 아파하는 것 같다. 마술사는 답을 알고 그 답을 찾아 모험을 하고 시련을 이겨내고 왕국을 구해낸다. 그러나 괜히 고통당하는 용은 무슨 죄이며, 그 용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무엇이며, 그런 용과 사람들 때문에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마술사와 검사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사람이 만든 속 세상의 마술사는 시련을 이겨낼 능력이 있지만, 사람은 현실 속에서 모든 시련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피조물을 부러워하고 피조물의 세상을 갈구한다. 신들의 황혼이라... 신에게 희망을 바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힘을 믿어볼 수 밖에. 마술사처럼 말이다.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은 정말 재밌었다. 읽는 내내 맞아 맞아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2시간 안에 제출해야 할 서류가 있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히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알게 되어 담당자가 되어버린 김 박사의 고군분투기다. 어휴, 무슨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역을 출력한 뒤 제출하면 되는데 그 사이트를 찾기가 너무 어렵고, 팝업 차단 때문에 서류를 떼기가 어렵고, 극한의 액티브 X 그 따위 것을 깔아야 되는 것도 어렵다. 심지어 보안프로그램을 깔고 나면 브라우저가 종료되니, 다시 그 사이트를 찾아야 하고, 서류를 클릭하면 크롬에 최적화 되어 있으니 크롬으로 접속하라고 한다. 하아.... 다들 겪어 본 이야기가 아닐까? 실컷 이렇게 저렇게 해서 서류를 출력하고 제출하려고 하니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단다. 겨우 해결하고 서류를 업로드하면 업로드가 되는지 마는지 화면은 가만히 있는 경우가 왕왕 있고, 시간에 쫓기며 새로고침을 눌러보기도 하고 컴퓨터를 껐다가 켜 보기도 하고... 결국 제출 마감시간을 넘겼으나, 프로그래머들은 천재인가보다. 소스코드를 보고 성공적으로 제출한다. 그러나 그 해 법은 개정되고, 내년엔 또 어떻게 제출해야 할까. 김박사는 다시는 회사 전화를 먼저 받지 않을 것 같다.


<판단>은 읽으면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네네, 나라도 사표 쓰겠네. 자기 기분 나쁘다고 신입사원들 -아니, 말 들어보니 자기도 같은 세대 내지는 별 차이도 없겠던데- 싸잡아 개념이 없네 마네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여간 자기 기분 상한다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건 본인이 당장 욕하고 있는 그 일인데 말이다.


<차세대 대형 로봇 플랫폼 구축사업>은 우와 하면서 읽다가 마지막에 풋 하고 웃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우쭈쭈 해주는 건 통하는 데는 잘 통하나보다.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고도 뭔가를 더 해야하는 김 박사와 이 박사는 22페이지에 걸쳐서 노력한데 비해 조박사는 두 페이지면 끝이다. 그것도 최 과장에게 대단하십니다를 말하며 칭찬하는 것도 포함해서.


<멋쟁이 곽상사>도 마음이 아팠다. 가슴 아픈 시대가 만들어 낸 비극을 나름 유쾌하게 풀어내려 했지만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걸출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짜내야 했다. 식민지에, 전쟁까지 너무 힘들고 고단했던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곽상사는 자신의 신념으로 많은 이들을 지켜냈고,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 좋았다. 군복을 깨끗하게, 공습이 심한 기간에 차가 아닌 도보로 원대로 복귀하는 운전병... 그렇게 한 마을의 학살은 막을 수 있었고, 위정자들이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니기에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씁쓸하다.


<기억 밖으로 도주하기>는 읽으면서 상상하기 좋았다.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떠오르기도 했고. 김혜자님 연기가 너무 좋았는데. 뭔가 나도 탈출하고 싶을 때 저렇게 계획을 짜서 탈출할 수 있을까. 길치인데... 난 아마 건물 안에서 헤매다가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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