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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그쳤지만, 어제 밤부터 계속 비가 왔다. 많은 양의 비가 내린 뒤 창문 너머 세상은 여전히 물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맑고 서늘하며 깨끗하다. 물은 더러운 먼지들을 쓸어갔고, 세상은 다시 태어난 듯 했다.
비가 땅의 먼지를 씻어내듯 속죄가 죄책감을 지워줄 수 있을까?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누군가가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양심은 어떤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모두가 사랑하는 집안의 어린 막내딸 브리오니는 우연히 호숫가 옆에 선 두 사람을 본다.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듯한 로비와 그의 강압에 굴복한 듯 스스로 옷을 벗고 호수에 뛰어드는 세실리아를. 이 장면은 평생 브리오니에게 달라붙어 남은 생애 전체를 흔든다. 아마 그녀가 모든 것을 잊어도 이 장면만은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뇌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를 사춘기 소녀로 만들고, 두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떠밀어버리는 원인이 되는 순간이니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몽상가 브리오니는 큰오빠인 레온이 온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연극을 준비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갈 곳이 없어진 사촌 롤라와 피에르, 잭슨과 함께 연극을 올리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레온은 친구인 폴 마셜을 데리고 오고 세실리아는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모든 것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햇살 가득한 날,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아실에 머물던 브리오니가 그 호숫가를 보지 않았더라면, 로비가 자격지심을 버렸더라면, 세실리아가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더라면, 폴 마셜이 오지 않았더라면.... 혹은 롤라가 아라벨라 역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은 운명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하나씩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로비가 의대를 간다고 하자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상실감에 혼란스러웠고, 로비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이유가 세실리아 때문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둘은 심장에 서로를 새겨두고 다른 곳을 헤매고, 그 사이 이제 사춘기로 접어드는 몽상가 브리오니가 사랑하는 언니를 지키고 첫사랑과 결별할 준비를 한다.
저녁 시간 직전, 드디어 세실리아와 로비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면서 희망에 가득 차지만, 어린 마음에 불안했던 피에르와 잭슨은 가출을 하고 사람들은 흩어져서 쌍둥이를 찾는다. 그리고 그 사연 깊은 밤, 끔찍하게도 롤라는 강간을 당하고 로비는 누명을 쓴다.
"기다릴게, 돌아와"
자유를 원했던 세실리아와 로비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나서야 자신들이 원하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한 소녀의 거짓말은 두 사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게 했다. 함께 하기로 언약한 날, 둘은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헤어져야 했고 이후 행복은 두 사람의 삶 속에서 사라진다.
삶은 전쟁터일까. 감옥 대신 군을 택한 로비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게 된다. 무너진 건물들, 사지가 찢긴 사람들, 숨 쉴 때마다 맡아지는 피비린내... 특히나 로비가 삶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파괴된 마을들은 마치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 해서 안타까웠다. 쉽게 가는 길은 없다지만, 끝없이 보이는 황량한 사막 같은 길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브리오니는 돌려보려 노력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다.
책의 첫 장이 시작되기 전,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캐서린이 노생거에서 엄청난 오해를 했고, 그 오해를 짐작한 헨리가 몽상에 갇힌 캐서린을 환기시키는 장면이었다. 캐서린은 몽상에서 벗어났지만, 브리오니는 그러지 못했다.
사랑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헤어져야했던 비극적인 연인들,
사춘기 소녀의 거짓말이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의 인생,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인간,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는 가진 자들의 위선,
고통 속에서도 삶의 희망이자 살아갈 이유가 되는 사랑... 그 절박하게 반짝이는 사랑...
그리고 전쟁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참상들...
한 문장, 한 장을 읽고 넘길 때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세실리아가 되었다가 로비가 되었다가 브리오니가 되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는 것은 맞지만,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끝내 그 '책임'을 지지 못한 브리오니는 면죄부를 받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용서를 바라기엔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우리 삶 또한 그런지도 모른다.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평생을 그 실수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안나 까레니나가 생각났다. 안나는 성장하지 못했지만, 레빈과 키티는 성장했다. 노생거 수도원의 캐서린 역시 성장했다.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다는 것은. 그래서 끊임없이 '배워'야 하겠지.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 P323
이런 것들을 목격하면서 그녀는 이전에도 알고 있었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통렬하게 실감했다.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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