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문짝이 날아간 문갑이 하나 있다. 안에 넣어 놓은 물건들이 다 보이고, 겉은 긁힌 데다 막내가 어릴 때 해놓은 낙서들로 가득하다. 남들 같으면 버려도 열 번은 더 버렸을 지저분한 문갑. 그것은 엄마의 소중한 추억이다.

 

 이제 내년이면 엄마, 아빠 결혼 30주년이다. 지금은 딸인 내가 봐도 샘날 정도로 사이좋게 살고 계시지만, 두 분이서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고 마침내 결혼식장에 서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다지 좋지 못한 여건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양가 부모님의 반대였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두 분의 결혼을 강력하게 막으셨던 엄마의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는 두 분의 고집과 사랑 앞에 결국 결혼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결혼 비용은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내게 말씀하신다. 그 때 돈이 없어 혼수로 수저 한 벌과 밥그릇 하나 달랑 들고 시집 왔다고. 그런 엄마를 한없는 사랑과 따뜻한 배려로 감싸 주신 아빠께 고맙다고.

 

 두 분은 결혼하고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가구 등 집안 살림을 채워 나가셨다. 그 중 가장 먼저 산 것이 지금은 지저분하지만 그 때는 빛깔이 고왔을 그 문갑이었다. 처음 가구다운 가구로 문갑을 들여놓은 날, 엄마는 괜스레 외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셨다. 딸자식 결혼 하는데 번번한 혼수 하나 제대로 장만 못해줬다고 가슴 아파하시며, 가구 사는데 보태 써라 돈을 주시는 외할머니의 이마에 가득한 주름이 마치 당신의 탓 같았다고.

 

 이제는 사촌언니들한테 꼭 너희 이모부 같은 사람 만나라고 노래를 하실 만큼 아빠를 좋아하시는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그 문갑을 보고 잔소리 하신다. 저거 좀 내다버리라고. 그 때마다 엄마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다. 덩달아 외할머니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나도 언젠간 결혼을 할 것이고, 그 땐 엄마완 달리 나름대로의 혼수는 장만해 갈 것이다. 그럼 엄마가 가지고 계신 그런 낭만적인 추억은 내겐 없게 되는 걸까. 문득 거실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문갑이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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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2-0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멋진 글에 저라도 추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꼬마요정님은 어머님 아버님보다 더 멋진 결혼생활 하실 거예요^^ 문갑은 시집가실 때 가져가시는 게 어떨지...^^

꼬마요정 2006-12-0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글쎄요.. 엄마가 절대 안 주실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