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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마카롱 에디션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평점 :
봄은 아름답다. 꽃잎이 흩날리고, 푸르른 잎들이 고개를 내밀며,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그러나 봄은 변덕스럽다. 때때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진다. 그렇게 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깨운다.
비 한 번에 꽃잎은 떨어지고, 비 한 번에 날씨는 조금씩 더워진다. 봄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 직전 푸르고 푸른 아름다운 시절인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는 16살, 우리 나이로는 18살. 한창 호기심 많고, 어른이 되기 직전, 어린아이다움을 간직한 '소년'이다. 봄 같은 아이. 그런 그가 21살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피는 꽃, 장미 같은 여자. 몰락한 가문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어른 여자, 지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처음 그녀를 본 순간, 들고 있던 총을 떨어트린 그 순간부터 '열병'에 빠진다. 사랑이라는 열병. 아직 풋풋한 소년인 그는 그녀와의 작은 접촉에도 전율하며, 마치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가 되는 상상 속에 빠진다. 그런 그가 어른들로 가득한 자세킨 집(지나이다의 집)을 드나들며 어른의 세계에 어울려 보려고 한껏 노력하지만, 환심을 돈으로 사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비열한 행동을 하며, 자기 자신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어른들이 보기에 그는 그저 귀여운 애송이일 뿐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누구에게도 속하길 원하지 않는 지나이다는 만인의 여왕이고, 만인의 연인이다. 그녀의 웃음 소리는 모든 이를 황홀하게 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모두를 취하게 한다. 그녀는 적당히 관심을 나타내고, 적당히 관심을 거두어들인다. 그녀는 훌륭한 왕이었다가 난폭한 왕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모두를 발 아래 무릎 꿇린다. 그녀가 사랑이란 감정의 늪에 빠지기 전까지는.
질투에 사로잡힌 블라디미르는 칼을 챙겨들지만, 나중에는 어떤 원망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지나이다의 사랑으로 공이 넘어가버렸다. 슬픔에 가득 찬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숨, 창백한 낯빛, 어두운 웃음... 그녀가 사랑하게 된 상대는 누구일까.
우리는 당연히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자세킨 집에서 지나이다에게 구혼하는 어른들도 다 알고 있지만,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와 말을 타고 나가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깨닫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그 감정들, 순진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어릴 때는 그저 매력적인 여자와 매력적인 아버지에게 빠진 불쌍한 소년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다르게 다가왔다.
남자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지나이다는 정말 변덕스럽고 천박한 여자인가. 데이지 밀러가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처럼 자기 감정에 빠진 남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닐까. 죄 지은 이브, 유혹하는 데릴라 이런 틀 속에서 죄를 전가하기 쉬운 상대 말이다.
블라디미르가 사랑한 지나이다는 아버지가 여자라면 그렇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매력적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고,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은 어린 아이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나이다에게 부모의 사랑을 원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오히려 지나이다와 아버지인 표트르와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둘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어쩌면 그 인상이란 게 욕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욕정만으로 서로의 인생을 파괴하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다. 훗날 아버지가 블라디미르에게 남긴 편지에는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라는 충고가 담겨있다. 내리치는 채찍에 살갗이 찢기는 고통보다도 더 강렬한 욕망,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욕망에 더 깊이 다가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죽음으로 이를지도 모를 상실감을 견디는 것일지도. 그러다 결국 바래져서 아스라한 감정을 아름답게 남기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