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미학 - 20주년 개정판
승효상 지음 / 느린걸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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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공간학생건축상‘의 주제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조명한 소규모 도시건축‘이었다. 그 출제와 심사를 담당한 나는 많은 출품작 가운데서 한 학생의 작품을 발견하고 나의 오래된 질문에 빠졌다.
침묵의 메타포로 가득 차 있던 그 학생의 작품을 읽으며,나는 막스 피카르트의 말을 기억해냈다.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
자폐적일 정도의 무표정으로 거리의 아우성에 대항한 침묵의 벽,그 벽이 침묵으로 서 있는 한 그 거리는 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47쪽)

그 학생이 인용한 사무엘 베케트의 대사--˝말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네가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네가 무언가 말하려 생각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러고도 말하기를 그칠 수 없다는 것....˝([Molloy],1955)--를 읽으며 자코메티가 디자인한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장치를 떠올렸다.
앙상한 한 그루의 나무와 어스름한 달빛...1961년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 연극무대는 비록 그 내용이 베케트의 희곡을 압축하여 시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코메티와 동일선상에 있는 정신세계였을 것이고 바로 그의 삶에 대한 긴장임에 틀림없을 것이다.(49쪽)

쓸모없는 공간, 예를 들어 우리네 ‘마당‘은 참 좋은 예가 된다. 생활의 중심이나 관상의 상대일 뿐인 이방의 마당과는 달리, 우리의 마당은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 사고의 중심이며,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발견케 하는 의식의 공간이다.
이를 ‘무용의 공간‘이라고 하자.

침묵
벽체들은 이러한 공간들을 한정할 뿐이다. 이들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형태 이전의 목적을 가진다.
벽체를 과장하는 것은 그 속에 만들어진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혹은 잘못된 삶의 형태를 이끌기도 하기에 이는 위험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85쪽)


나는 이를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59쪽)

20년만에 재출간된 건축가 승효상의 사유로 응집된 작은 책이다. 읽게 된다면 승효상의 침묵과 여백의 미가 강조된 건축철학에 깊이 매료되어 절로 평온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백이 많을수록 생각은 들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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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3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6-12-03 22:58   좋아요 1 | URL
님의 사진은 늘 동양화를 보는 듯 합니다
비움의 미학! 맞아요^^

2016-12-04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6-12-04 07:25   좋아요 0 | URL
일찍 일어나셨네요?
저도 갑자기 일찍 눈이 떠져 밀린 글들을 읽고 있었어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들은 설명을 들어보면 나름의 철학이 엿보여 감탄스럽고 재밌더라구요^^
저는 승효상 하면 제일 생각나는 것이 유홍준교수의 한옥자택 수졸당과 고노무현 대통령 묘역이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은 글은 많지 않은데 읽고 나면 마음이 좀 정돈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유부만두 2016-12-04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감기로 고생중이에요 ㅠ ㅠ
약먹고 일찍 잤더니 눈이 떠져서...뉴스 보고 ...북플 중이죠;;; 책읽기엔 컨디션 핑계를 댑니다~

책읽는나무 2016-12-04 07:43   좋아요 0 | URL
아~~어떡해요?ㅜㅜ
전 지난주말 목,콧물,몸살까지 겹쳐 월요일까지 몸져 누워 있었어요ㅜㅜ
이제 좀 살만해졌어요
에휴~~~
집에선 엄마가 아프니 애들도 먹는게 부실해져 내가 먹을 죽 만들면서 반찬없어 같이 먹여 학교 보냈더니 애들이 죽 먹기 싫다고!!!^^
요즘 감기는 너무 독해서 만나는게 무섭단 생각이 들더군요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생강차 있음 따뜻하게 달여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