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었을 때와 다르게
에세이로 읽었을 때가
더 강인하고, 더 명확하고,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에이드리언 리치 작가의 솔직한 글.

분명 작가는 담담하게 써 놓은 것일텐데,
나는 왜 읽으면서 코 끝이 찡해 오는 것인가!
이 감동과 연민이 파도처럼 밀려 오니 밑줄긋기를 해 놓는다.

비단 나만 코 끝이 찡한 것은 아닐 터,
여성이라서,
엄마라서,
모두다 공감되어 그저 할말을 잃게 만들 것이다.
읽는다면
바로 이 순간!!!!
그렇게 된다.




대학을 마치고, 내 보기엔 뜻밖의 행운을 만나 첫 시집을 출간했고, 애인과 헤어졌다. 직업을 구했고, 혼자 살았고, 계속해서 글을 썼고, 사랑에 빠졌다. 나는 활력으로 가득한 젊은이였고, 시집은 다른 사람들도 내가 시인임을 동의하는 의미로 보였다. 여성 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당시 ‘완전한‘ 여성의 삶으로 규정되었던 모습을 모두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20대 초반에 결혼생활에 뛰어 - P36

들었고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세 아이를 낳았다. 내 주위에는 분명한경고 신호가 전혀 없었다. 당시는 1950년대였고, 이전 페미니즘 물결에 대한 반응으로 중산층 여성들은 완벽한 가정을 일구는 것을 경력으로 삼았고, 남편을 전문대학원에 보내려고 직장에서 일했으며,
은퇴 후에는 대가족을 길렀다. 사람들은 교외로 이주하고 있었고, 기술은 성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것에 정답이 되어줄 전망이었다. 가족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생활은 지극히 고요해졌다. 여성들은 결혼 생활에 충실하느라 서로 고립되었다. 1950년대 여성들은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  은밀한 공허감과 좌절감을 공유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두 번째 시집과 첫 아이가 같은 달에 나왔다. 그러나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책에 실린 시들에 만족하지 못했다. 전부 내가 아직 쓰지 않은 시들을 위한 단순한 연습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 시집은 "우아하다"라고 칭찬을 받았다. 나는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으니까 만에 하나 의문을 품는다면, 공허한 우울과 적극적인 좌절의 시기를 맞게 된다면, 내가 배은망덕하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어쩌면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셋째가 태어났을 무렵 나는 스스로를 실패한 여성이자 실패한 시인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제3의 명제를 찾아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운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에 떠밀려 들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일이었다. 한때 자기 의지와 에너지를 거의 황홀경의 상태로 경험했던 여자, 도시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거나, 한밤중에 기차를 타거나, 교실에서 타자기로 글을 쓰던 여자를 까맣게 잊고 표류한다는 생각이 정말 무서웠다. 내 할머니에 - P37

관해 쓴 시에서 나는 (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자는 줄 알았던 젊은 여자는 죽음을 확인받았다"((가운데 Halfway) 나는 부분적으로는 피로 때문에, 분노가 억눌리고 자신의 존재와 접촉을 상실한 여성의 피로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타인이 끊임없이 없었던 일로 되돌려놓는 소소한 집안일, 허드렛일, 어린아이들의 끝없는 요구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여성의 단절적 삶 때문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나마 쓴 글은 내가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 안에서나 밖에서나 나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고 이해해보려는 과정에서 나는 그 갈등의 진짜 속성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 인간의 삶은 환상으로, 즉 반드시 행동으로 옮길 필요는 없는 수동적인 백일몽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심지어 생각을 잘하는 것은 환상도 아니고 환상을 종이에 옮기는 일도 아니다. 시를 쓰려면, 등장인물이나 행위가 꼴을 갖추려면, 상상을 통한 현실의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과정은 절대로 수동적일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이 계속 움직일 것이고, 집중력을 통한 공중부양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아는 글라이더 조종사처럼 생각의 기류를 타고 계속 나아갈 자유가 필요하다. 더불어 그 상상이 경험을 초월하고 변형시켜야 한다면, 그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삶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도전을 제기하고, 대안도 생각해내야 한다. 낮이 밤이 될 수 있고 사랑이 미움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어야 한다. 상상이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실험적이게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큼 신성한 일도 없다. 글쓰기란 ‘이름 바 - P38

꾸기 re-naming‘이기 때문이다. 이제 낡은 방식으로 온종일 어린아이들의 어머니 노릇을 하고, 남자와 함께 낡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한 활동을 억제하고 보류해야 하며, 일종의 보수주의가 필요하다. 지금 나는 글을 잘 쓰거나 생각을 잘하려면 절대 타인을 돕지 말고 이기적인 자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남성적인 예술가와 사상가의 신화였고, 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여성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기능을 수행하려고 하면, 상상력의 전복적인 기능과 직접 충돌하고 만다. 이때 전통적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분명히 여러 가지방법이 존재할 것이고,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창조의 에너지와 관계의 에너지를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늘 사랑의 실패자로서 갈등을 느꼈다. 한때는 내가 섹슈얼리티와 일과 자녀 양육이 공존하는, 다시 말해 대다수 남성에게나 가능한 완전한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의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늘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해도 충분하지 않은 단 한 가지를 원했다. 바로 생각할 시간, 글을 쓸 시간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은재빠른 폭로의 세월이었다. 남부에서 쿠바의 피그스만에서 연좌 농성과 행진이 벌어졌고, 이 초기 반전운동은 대규모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내 주변 남성적인 학계는 이런 질문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유창한 대답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파시즘과 저항과 폭력에 대해, 시와 사회에 대해,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나의 관계에 대해직접 생각해봐야 했다. 약 10년 동안 나는 아주 짧은 시간에 맹렬히 집중해 글을 읽고, 공책에 끼적이고, 단편으로 시를 썼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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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8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은재빠른 폭로의 세월]
이후 반세기를 넘어
2022년의 세상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11-28 17:3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에이드리언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 했었어요.
2022년도 달라진 게 없는데요? 반문 하면서요ㅜㅜ